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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신작시/이승예/먼 섬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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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684회 작성일 20-01-29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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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신작시/이승예/먼 섬 외 1편


이승예


먼 섬



나의 어제는 상 중이다


간밤에 낙화한 백도라지 꽃 때문에
오늘아침 먼 섬이 보인다


백 년 전부터 약속된 날에
나도 저 섬 어디쯤 닿아 닻을 내릴까
보이는 항구도 없이


개구리 울음이 먼지 낀 유리창에 부딪쳐
깨진 초여름이 푸르게 흘러내려도
옆구리가 결리는 일을 날마다 용서하며 살아왔네


살아온 날들에 대한 집착은
돌아가는 길에도 잡지 못할 신기루 같은 것


어쩌다 나에게로 왔던 어제가 죽어 오늘을 지나가는데
백도라지는 꽃들의 혀끝에서 잊혀지고 있네


백 년 전에도 파도의 측면은 지나는 발을 지워
뭍 꽃들이 아득히 닻을 내렸을
저기 먼 섬


바람과 햇살 속에서 하얀 도라지 꽃 별자리 무덤 하나 일렁이는
오늘 아침





정아의 노랑바지



정아는 여행을 석 달이나 앞두고 옷을 사러갔다


한나절을 다 보내도록 수많은 노상을 지나
비로소 눈에 띈 노란 바지를 흥정해 샀다
사람들이 삶을 내려놓기도 하고 짊어지기도 하는
집으로 가는 길들은 정아를 지나야 당도하고
흥정과 흥정 사이는 언제나 정아의 생


수 삼년 전 사 입었던 옷 사이즈가 중년을 지나온 줄도 모르고
일만 하다가 몇 년 만에 해외여행을 보너스로 챙긴 정아는


집에 와 바지를 입는 방법으로 홀쭉하게 생각을 들이마시다가
후 숨을 내쉬는데 겨우 잠긴 지퍼가 그만 터져버렸다


지퍼를 고치는 방식은
낯선 것들의 은신처가 되어버린 고관절에게 그저
쓸쓸한 울타리를 조금 늘려 주는 것


노란표정으로 곱게 접힌 바지를 펼 용기가 나지 않아 쳐다만 보다가
여행 마지막 날 꺼내 입은 정아


자유롭지 못한 삶들이 튀어나와 바람의 깊은 속살을 울룩불룩 만져도
지퍼 안의 울타리는 노랗게만 흔들렸다


한 오 백장 사진 속에 영정처럼 고요히 남아
정아를 벗은 노란 바지는
 
장롱서랍 안에서 정아의 여행을 기다리는 중이다





*이승예 2015년 계간 《발견》으로 등단. 시집 『나이스 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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