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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용 시인의 세계

서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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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방지기
댓글 0건 조회 4,561회 작성일 03-07-29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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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문학레터] 김구용의 ‘구용일기’를 읽고  

내, 외사랑하는 출판사가 하나 있어 이름하여 솔출판사이다. 출판사 어느 곳에 화수분 감추어 두었는지 모르나 솔출판사는 제가 생각하는 출판사를 그리며, ‘열심으로’, 이상의 꽃나무처럼, 아름다운 책들을 간행하고 있다.
나는 그 부드러운 질감의 표지 디자인이며 몇십 년은 너끈히 견딜 것 같은 단단한 제본상태가 좋고 무엇보다 그 책의 임자들이 좋아 그 집 책이 나올 때마다 한 권씩 한 권씩 사모으는 재미를 끝내 놓아버리지 못하곤 하였다.

그렇다고 힘에 부치는 책값을 쉽게 감당할 수만은 없으니, ‘김구용전집’(솔, 2001)이 나왔으되 나는 먼 산 바라보기만 하다 겨우 용기를 내어 그 다섯째 권인 ‘구용일기’를 손에 넣었던 것이다. 그의 수십 년 인생 여정이 담긴 902페이지 짜리 책에 ‘민족문제의 재등장’이라는 제목이 붙은 책 한 권을 덧붙여 신용카드를 삼 개월 할부로 쭉 그으니 세상이 담뿍 내 손에 들어온 것 같은 뿌듯함이 가슴에 일었다.

그러나 구용 자신이 일기는 허영이 아니고 감사며 고통이며 책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두꺼운 책을 펴들고 1922년 생 젊은 구용의 면모를 따라 함께 나이를 먹다 보니 어느새 나는 부끄럽다. 문학은 사치가 아니라 노역인 것을, 문학은 세 치 재능이 아니라 끝없는 독서와 수련의 산물인 것을, 나는 문학이라는 사치품을 소비하여 인생을 너무 헛되이 살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위안, “우리는 우리나라 것의 가치를 널리 선전하지 못하고,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 것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때, 비로소 재인식하는 버릇이 자고로 있다”라고 했던 구용의 말처럼, 언제나 자기 망실의 위기를 겪어야 하는 이 작은 나라의 문학인으로서 뒤늦게나마 자기 전통의 가치를 깨달음이 그것. 나는 또 하나의 살아 있는 전통을 접하였으므로 어제보다 덜 경박해질 수 있으리라는 것.

그러나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만 지독히 낡으면서도 첨단적인 칼의 양날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방민호 / 문학평론가
2001/07/20 14:37


'김구용 문학전집’ 나왔다

시·연작장시·산문 등 6권 묶어

10여 년간 동학사(1940~1962)에 기거하면서 불교경전을 섭렵,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독특한 시 세계를 구축한 시인 김구용(78·전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 문학의 모든 것을 수록한 <김구용 문학 전집>(솔)이 나왔다. 전 6권으로 묶인 이 전집은 시집 <시>, 연작장시 <구곡(九 曲)> <송백팔(頌白八)> <구거(九居)>, 일기문 <구용일기>, 산문집 <인연>으로 이뤄졌다.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동양고전 번역작업을 제외한 모든 작품들이 빠짐없이 들어 있는 셈이다. 그 중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연작장시 3권. 불교적 세계관에서 더 나아가 동양사상을 아우르는 정신의 편력을 보여준다. 참 자아를 찾아가는 지난한 구도의 과정을 그린 , 진정한 있음의 경지를 추구하는 <구거>는 모두 선불교적 직관과 상상력을 보여준다. 이처럼 김구용의 시 세계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 ‘나’를 찾아가는 험난한 정신적 여정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겠??


동주 열국지 1

저자 : 풍몽룡
출판사 : 솔
출판일 : 2001년 6월 15일
페이지수 : 354
판형 : A5
판수 : 1
정가 : 7,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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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서평
춘추전국시대, 이 안에 있소이다
"삼국지"가 태산이라면, "열국지"는 거대한 산맥과 같다. "삼국지"처럼 빼어난 진경은 없지만, "열국지"는 웅장한 위엄으로 중국문학의 든든한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중국 고전소설의 뿌리인 "열국지"는 대중적으로는 쉽게 읽히지 않는다. "삼국지"가 소설에 가깝다면 "열국지"는 사서(史書)에 가까운 탓이다. 춘추전국시대(B.C. 770∼221년)를 기술하는 방대한 문헌을 종합적으로 재구성한 ‘역사 다큐멘터리’라고 할까. "열국지"는 사실 소설적 재미가 덜하고 예술적 성취가 부족하다. 하지만 ‘열국지’는 중국의 문학 역사 철학에 관심있는 독자라면 빼놓을 수 없는 정보의 보고다.

작품의 무대가 된 춘추전국시대 550년은 주(周)나라 초기 3000개의 달했던 ‘벤처국가’들이 치열한 경쟁속에 합병과 병탄을 거듭하던 격변기. 이런 시기에 영웅, 호걸, 미녀, 재원이 대거 등장해 인과응보와 천리(天理)의 엄정함이란 교훈을 남긴다. 최근 두 판본의 "열국지"가 동시에 출간돼 관심을 끈다. 시인이자 한학자인 김구용(金丘庸·79) 선생의 [동주(東周) 열국지], 역사소설가 유재주(45)씨의 "평설 열국지"가 그것이다. 김구용판은 1980년대 처음 나온 것을 손봐 증보한 것이고, 뒤의 것은 지난해 일부 연재하다 중단된 것을 완간한 것이다. 역저(力著)라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두 작품은 여러모로 대별된다.

김구용판이 8년간에 걸쳐 명나라 풍몽룡(馮夢龍)의 원본을 꼼꼼하게 완역한 것이라면, 유재주판은 다시 김구용판을 해설을 곁들여가며 소설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작품의 얼개는 흡사하지만 독자의 이해를 구하는 방식 역시 구별된다. 김구용판은 춘추전국시대 격변기의 제도 문물 생활상, 제후들의 관계와 연보 등을 담은 방대한 부록을 추가해 당대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반면, 유재주판은 무성한 에피소드의 잎에 가려져있는 큰 이야기 줄기를 드러내기 위해 편마다 적절한 주인공을 설정하고 상상력이란 칼로 적절한 가지치기를 시도한다. 한학이나 중국 역사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김구용판을, 학생이나 초심자라면 유재주판이 적당할 듯 하다.


윤정훈(책의향기) / 동아일보 / 20010609



●현대문학 : 1955년 1월 창간 문예지, 조연현

[현대문학] 지령 5백호  ---[중앙일보] 1996. 7. 26

문학월간지 『문예(文藝)』의 주간(主幹)을 맡고 있다가 잡지의 갑작스런 폐간으로 일자리를 잃게 된 평론가 조연현(趙演鉉)은 울적한 심회를 달래기 위해 동료문인들과 함께 이따금 역술인들을 찾았다. 휴전직후인 1954년의 일이었다. 장안 에 명성이 자자하던 백(白)모 관상가를 찾았을 때 조연현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던 그 관상가는 이렇게 말했다.
『곧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이제까지 당신이 해오던 어떤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을 맡게 될 것입니다.』 앞날의 운명을 점치는 사람의 「예언」이었지만 조연현은 동료문인에게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시인 서정주(徐廷柱)였다. 마치 영감(靈感)을 떠올리듯 「하늘이 당신에게 준 사명」이라면서 곧 또 다른 문예지를 맡게 되리라고 장담했던 것 이다. 맞지 않을지도 모를 예언 이었고, 동료간의 단순한 위로일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신통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로부터 얼마후 소설가 오영수(吳永壽)의 소개로 대한교과서를 운영하고 있던 김기오(金琪午)를 만났을 때 조연현은 그로부터 뜻밖의 제의를 받았다. 영리가 목적이 아닌 문화적·교육적 목적만을 위한 잡지를 창간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현대문학』은 55년 1월 창간호를 내놓게 되었다. 조연현은 창간사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했다.

『아무리 빛난 문학적 유산이라 할지라도 반성없이 이에 추종함을 조심할 것이며, 아무리 눈부신 새로운 문학적 경향이라 할지라도 아무 비판없이 이에 맹종함을 경계할 것이다. 무정견한 백만인의 박수보다도 문학에 대한 깊은 애정과 옳은 식견 을 가진 단 한사람의 독자를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상업주의에 물들지 않고 독자의 기호에 영합하지 않겠다는 창간사의 그와 같은 다짐은 5백호의 지령(誌齡)을 쌓은 지금까지도 『현대문학』의 「분명한 색깔」로 유지돼 오고 있다. 재정적 뒷받침이 비교적 단단했음에도 대개 단명(短命)했던 문예지의 속성탓에 그 지속성에 회의적인 눈길을 보내는 사람도 많았으나 오히려 그런 고집스러움이 장수(長壽)의 바탕이었을 것이다. 시인·소설가·평론가 등 5백여명의 문인을 배출하고 우리 문학사에 길이 남을만한 작품들의 산실 역할을 담당 해 온 『현대문학』의 새로운 도약이 기대된다.

『현대문학』은 한국 현대문학의 거대한 저수지다. 여기서 배출한 문인들만 95년말 현재 5백35명이다.현재 4천여명의 문단 인구 중 누구도 『현대문학』(이하 『현문』)으로부터 작품청탁을 받은 적이 없다면 일견 자신의 문학을 의심할 정도로 『현문』은 전체를 아우러왔다.『현문』이 문을 연 것은 55년 1월.
『본지는….한국의 현대문학을 건설하자는 것이 그 목표며 사명이다. 그러나 본지는 이 현대라는 개념을 순간적인 시류나 지엽적인 첨단의식과는 엄격히 구별할 것이다. 본지는 현대라는 이 역사상의 한 시간과 공간을 언제나 전통의 주체성을 통 해서만 이해하고 인식할 것이다.』

『현문』이 창간호에서 밝힌 목표와 편집 방침이다.전통의 주체성을 이어가며 당대의 문학인 현대문학을 일궈나가겠다는 것. 시류에 편승하지도, 첨단의식을 반영하지도 않은 과묵함으로 『현문』은 현대문학사의 본류를 형성해왔다. 6·25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54년 7월. 이미 모두 고인이 된 문학평론가 조연현(趙演鉉)·소설가 오영수(吳永壽), 그리고 대한교과서 김기오(金琦午)사장이 만난다. 이 자리에서 金사장은 비장하게 말문을 열었다.『독립국가에 문예지가 없다는 것은 더 없 는 수치요, 문화적 두뇌마비다.』 문예지 창간 의지를 내비쳤고 두 문인은 적극 참여할 뜻을 밝혔다.

해방 후 문단은 식민잔재 청산, 좌·우익 논쟁 등을 놓고 복잡하게 분열·대립했다. 그 많은 파당들 나름의 문학과 주장을 펼치기 위해 우후죽순처럼 문예지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대부분 통권 5호 안팎의 단명에 그치고 그중 장수를 누렸던 『문예』마저 54년 3월 통권 21호로 종간돼 문예지 한권없는 암흑기를 맞게 된다. 이러한 시점에서 『현문』이 창간돼 한 호의 결간없이 올 4월 통권 4백96호로 한국 잡지 사상 최장수 기록을 계속 세워가고 있다. 창간때 주간은 趙씨, 편집장은 吳씨가 맡고 편집에는 김구용(金丘庸)·임상순(任相淳)·박재삼(朴在森)씨가 참여했다. 창간호에는 시·소설·수필·평론에 걸쳐 30명의 작품을 싣고 또 35명의 「나의 문화적 포부」라는 단문도 실어 당시 문단 에서 필명깨나 날리던 모든 문인들을 망라했다.
그러면서 『현문』은 차츰 ▶문단의 총체적인 표현지 ▶경향이나 유파를 초월한 정통문학 엄수 ▶고전 계승과 세계문학 소화 ▶문학에 대한 엄정한 가치평가 태도 ▶신인 양성이라는 다섯가지 편 집전통을 만들어가게 된다. 특히 창간호부터 표지에 사고(社告)를 내 역량있는 신인들을 추천,전후 황폐화된 문단을 재건해 오늘의 다양하고 풍요로운 문학을 일군 것은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현문』의 지위다.

[현대문학]의 문인들 ---[중앙일보] 1996. 4. 27

55년4월호에서 한성기(韓性琪)씨를 시단에 추천한 『현문』은 이듬해 박용래(朴龍來)·임강빈(任剛彬)시인을 잇따라 내보내 대전·충남 시단의 대부로서 순수서정을 일구게 했다.『현문』의 편집을 담당하던 박재삼씨는 55년11월호에 추천돼 중앙시단에서 전통서정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같은 호에서 김관식(金冠植)씨도 시단에 뛰쳐나와 거침없는 욕설과 역설로 세상의 허위를 호통치고 갔다. 현 문예진흥원장인 문덕수(文德守)시인도 56년『현문』으로 나와 시전문지 『시문학』을 펴내며 시단 인구를 늘렸다. 문학과 지성사의 간판급 시인 황동규(黃東奎)시인과 80년대 참여시에 앞장섰던 고은(高銀)씨도 58년 『현문』을 통해 나왔 다. 이밖에 교편을 잡으며 강릉 등 초창기 관동지방 시단을 일군 황금찬(黃錦燦)씨를 비롯,『현문』은 59년까지 40명의 시인을 추천제를 통해 배출했다.
60년대 들어서는 성춘복(成春福)씨를 시발로 해 재미시인 마종기(馬鍾基), 영산강의 번뜩이는 감성과 농민들의 끊질긴 삶에 대한 애착으로 민중서정의 한 전범을 보인 이성부(李盛夫), 비대상시를 향한 실험파 시인 이승훈(李昇薰), 광주 참여시의 거목 문병란(文炳蘭), 가볍고 환한 이미지로 존재의 비의를 드러내는 정현종(鄭玄宗), 4행시 실험과 성적 이미지가 빛나는 강우식(姜禹植),원초적 그리움을 감성과 지성의 균형으로 마음에 잡힐 듯 담아내고 있는 오세영(吳世榮), 언어 로 언어를 초월해 있는 세계의 본디 모습을 담으려는 오규원(吳圭原)씨 등을 시단에 내놓았다. 또 정완영(鄭梡永)·김제현(金濟鉉)씨 등 시조시인과 김후란(金厚蘭)·허영자(許英子)·김초혜(金初蕙)·천양희(千良姬)·유안진(柳岸津)씨 등 빼어난 여류들도 배출해 여성시단의 도도한 흐름을 이루게 한다.소설에서는 백인빈(白寅斌)·정을병(鄭乙炳)씨를 시작으로 능청능청 늘어진 문체에 사회를 향한 뼈대있는 의식을 담아내는 한국 토종 소설가 이문구(李文求)씨 등 26명의 작가를 배출했다. 또 67년 제1회 장편소설을 공모해 김원일(金源一 )·이동하(李東河)씨를 당선자로 문단에 선보였다.평론에서는 신동욱(申東旭)·박철희(朴喆熙)·김윤식(金允植)·박동규(朴東奎)·홍기삼(洪起三)·임헌영(任軒永)·이선영(李善榮)씨 등 23명의 평론가를 내보내 문학 현장을 진단케 함과 동시 에 대학 강당 등에서 다음 세대의 문학을 열게 한다.
55년부터 69년까지 『현문』은 시인 1백29명, 소설가 56명, 평론가 33명, 희곡작가 5명 등 총 2백23명의 신인을 문단에 배출한다. 60년대말 중앙문단 식구가 5백명을 넘지 못했으니 절반 가까이가 『현문』출신인 셈이다. 이들은 각 기 출신 지방으로, 참여·순수 등 경향별로, 혹은 문학현장·강단 등으로 흩어져 나름으로 가지를 치며 차세대 문학을 일궜다.71년 8월『현대문학』(이하 『현문』)은 지령(誌齡) 2백호 기념호를 꾸며냈다. 그러자 각 신문들은 사설등을 통해 『우리 문학 사상 기적적인 경사』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55년1월 전후 황무지 문단에서 순수문예지로 태어나 한 호도 결간없이 2백호를 기록한 것이 경이일 수밖에 없다. 또 당시 문단 인구의 반 가량인 2백여명의 문인들을 『현문』이 배출해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더구나 엄정한 편집 태도로 문학의 권위를 확립하며 발표지면을 제공한 것은 한국문학사에서 결코 빠뜨릴수 없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문』은 70년대 들면서 그 문학적 지위가 크게 위축당한다. 계간지이지만 『창작과 비평』『문학과 지성』등의 창간이 『현문』의 독보적 지위를 잠식해 들어갔다. 66년1월 창간된 『창작과 비평』은 문학의 역사적·사회적 소명의식과 예술적 전위정신을 기치로 내걸었다. 70년9월 첫호를 낸 『문학과 지성』은 국수주의를 극복하고 문학과 지성의 자유를 들고 나왔다. 물론 두 계간지가 의도적으로 겨냥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 기치는 『현문』의 보수적·순수문학적 태도에 배치되는 것이다. 또 당시 군사독재가 장기화 기미를 보이고 산업화·도시화로 전통사회가 급속히 붕괴되고 곳곳에서 사회문제가 터지고 있어 문학도 순수주의에만 안주할 수는 없게 됐다.
그러한 시점에서 지령 2백호를 맞은 『현문』에는 최고 권위의 최장수지라는 실증적 위치에 대한 상찬과 함께 편집방향에 대한 비판도 일었다.편집태도의 보수성이 균형있는 문학 발전을 막는다는게 그 첫번째 지적이었다.「문단의 공기(公器)」임을 너나없이 인정하는 『현문』의 보수적·순수문학적 고집은 진보적·실험적 노력에 본의아닌 압력을 주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추천위원들이 원로급들로만 고정돼 있어 전통을 이을 수는 있지만 신인 발굴의 폭이 지극히 좁아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또 이렇게 배출한 문인들 위주로 지면을 제공,『현문』이 공기의 역할을 못하고 순수문학동인지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경고가 지령 2백호에서 이미 이형기(李炯基)시인등에 의해 심각히 제기됐다. 그러나 『현문』을 창간 때부터 81년 타계할 때까지 편집 책임을 맡은 조연현(趙演鉉)씨는 그의 말처럼 『당대의 비판보다 후대의 공정한 평가』에 맡기는 순수·보수 지향의 엄격한 편집태도를 견지해 나간다.
70년 1월호에 시『구약』을 추천완료해 이건청(李健淸)씨를 내보낸 『현문』은 70년대에만 81명의 시인을 배출한다. 이때 등단한 주요 시인들로는 신달자(愼達子)·이기철(李起哲)·김정웅(金政雄)·이태수(李太洙)·하종오(河鍾五)·이상호(李相昊)씨 등을 들수 있다. 또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와 소설 『즐거운 사라』등으로 성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파문을 일으켰던 마광수(馬光洙)씨도 77년 시『배꼽에』가 추천돼 문단에 나왔다.
소설에서는 한용환(韓龍煥)씨가 70년 1월호로 나온데 이어, 같은 해 『태백산맥』『아리랑』의 대하 작가 조정래(趙廷來)씨도 내보낸다. 또 70,80년대 여류소설계를 신선한 의식과 감각으로 수놓다 지금은 병석에 누운 이순(李筍)씨, 장편 『인간시장』으로 장안의 지가를 높이다 민주당 대변인으로 정치에 뛰어든 김홍신(金洪信)씨도 『현문』을 통해 등단했다. 이밖에도 『현문』은 박양호(朴養浩)·유홍종(柳烘鍾)·김채원(金采原)·정소성(鄭昭盛)씨 등 28명의 작가를 70년대에 배출했다.
80년대부터 95년말까지 『현문』은 시단에 96명, 소설에 40명의 신인을 내보냈다. 한편 70년이후 평단에는 김인환(金仁煥)·전영태(田英泰)·최동호(崔東鎬)·이동하(李東夏)·김선학(金善鶴)씨등 36명을 배출했다. 이렇게해서 『현문』이 창간 이래 새로 내놓은 문인은 총 5백35명. 단일 문단데뷔 창구로서는 가위 압도적인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역량있는 신인 발굴뿐 아니라 『현문』은 다양한 사업을 펼쳐 문학의 질 향상과 저변 확대를 꾀했다.55년 창간때부터 시·소설·평론·희곡의 각 장르를 아우르는 종합문학상으로 현대문학상을 제정, 올해까지 1백23명에게 본상을 수여했다.
수상자 면면을 살피면 모두 해당 장르에서 당해연도를 대표하고 있어 이 상이 한국문학의 수준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또 59년부터 전국순회 문학강연회를 통해 문학의 저변확대를 위해 노력했는가 하면 상설 문예창작실기교실을 운영하며 차세대 문단의 재원 교육에도 힘쓰고 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문』의 문단에서의 지위는 70년대 이후 줄곧 떨어지고 있다. 이것은 50, 60년대 등단 문인과 70년대 이후 등단 문인들의 문단에서의 역할을 비교하면 여실히 드러난다. 실로 70년대, 특히 80년대 이후 『 현문』을 통해 등단한 문인들은 그 숫자에 비해 빼어난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문인들은 안쓰럽게도 열손가락으로 꼽기조차 부족하다.또 발표지면으로서의 『현문』의 영향력도 현저히 저하되고 있다. 한 호에 시·소설을 발표할 수 있는 문인을 30명 가량으로 칠 때 『현문』이 배출한 문인 5백여명은 1년에 한번 모지(母誌)에 발표 기회를 갖기도 힘든 상황. 자연히 출신 문인들의 쌓인 원고 때문에 출신과 경향은 다르지만 출중한 작품을 발빠르게 실을 수 없어 동인지적 성격으로 전락해갈 수밖에 없다.
이제 70년대 이후 수많은 문예지들이 등장, 한국문학의 한 뙈기씩을 맡고 있는 문단 할거주의 시대가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각각 할거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이념이나 경향의 대립·갈등은 가 시고 교호주의 문단으로 가고 있다. 바로 시대조류에 편승하지 않고 문학성 높은 작품이면 범문단적으로 싣겠다는 『현문』의 창간정신으로 문단이 돌아왔다는 말이다.이런 상황에서『현문』이 어떻게 공룡같은 몸집을 운신하고 문단할거를 인정하며 창간정신을 지켜낼 수 있느냐가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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