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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용 시인의 세계

구용 시의 독법/박제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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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방지기
댓글 0건 조회 4,842회 작성일 03-07-29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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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2년 01월 26일

구용 시의 독법

―김구용 시인 추모

박제천

 

김구용 시인이 2001년 12월 28일 동선동 자택에서 영면하셨다. 다음날 삼성병원 영안실에 들러 조문을 하고, 동숭동 문학아카데미 사무실에 들어서자 내 책상 앞의 구용 글씨가 새삼 나를 먼저 반기는 듯했다. 내 책상 오른쪽에는 선생이 1971년에 써주신 당호 ‘芳山齋’ 현액이 걸려 있고, 왼쪽에는 13년 전 1990년 경오 원단에 써주신 대련 현액이 두 점 걸려 있다.

‘방산재’에는 ‘내가 아호를 짓고, 芳卽是山이요 山卽是芳이라 풀이하다”는 글씨가 소자로 씌어 있다. ‘대련’ 현액의 한 점은 ‘詩思淸於新竹色 交情澹到古琴音”이라는 휘호 한 폭이고, 다른 한 점은 “무형의 기운, 무형의 하늘로 깨어나/ 바다가 된 나, 사막이 된 나/ 지구가 된 나, 우주가 된/ 나를 되찾고 싶다”는 필자의 시구를 적으며 慈妙菴人이라고 당호를 밝혔다. ‘방산재’는 선생이 한창 구용체라 일컬어질 무렵의 기기묘묘한 기운 생동의 글씨이고, ‘대련’은 선생이 그 해 어느 날 내게 전화를 걸어 ‘이후의 글씨에는 힘이 빠질까 두려워서, 생각난 김에 써둔 것이니 찾아가라”고 하신 것인 만큼 질박하면서도 단아하여 한 획 한 획에 고담하면서도 맑은 향이 떠도는 글씨였다. 선생 당년의 절정이 이루어낸 글씨여서 두고두고 음미할수록 먹빛에 뿌리를 내린 난향에 절로 감싸이게 된다. ‘대련’에 힘입어 뒷날 이런 시를 쓰게도 되었다.

시인 구용丘庸 선생께서 무릎을 치며, 낭랑한 소리로 찬탄한다

 

새로 솟아나는 맑은 댓잎의 푸르름이여

마음 바닥에서부터 차올라 온몸을 감싸는 악기의 소리여

문득 막걸리를 따라올리며 세상살이를 여쭈었더니

딴청으로 상여소리를 내며

들리지 않는다 한다

듣기 싫은 소리는 듣지 않는 좋은 귀를 가지셨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가끔은 남의 질문이 들리지 않아

귀에다 손나팔을 만들어 애써 듣곤 했는데

청력검사 결과 고주파 난청이라고 한다

마침내 나도 좋은 귀를 갖게 되었구나

혼자 무릎을 쳤다

―SF―소리의 우주」

 

학생시절 이후 선생을 다시 뵙기는 1970년 겨울이 아닌가 싶다. 그무렵 『현대문학』에 실린 「장자시」를 김현이 『문학과 지성』에 재수록하겠다 하여 어느 눈 내리는 날 처음 만나 술자리를 가졌던 바, 그 자리에서 화제가 김구용에 이르면서 우리는 대번에 의기가 투합되었다. 그날밤 우리는 술이 장취한 채로 눈길을 달려가 선생을 찾아뵈었다. 선생은 우리를 오랜만에 만나는 친아우처럼 반겼다.

그로부터 강우식, 김여정, 홍신선, 정진규 등과 기회 있는 대로 혹은 한두 명이 짝지어 찾아뵙거나, 혹은 무리를 이루어 찾아뵈면서 선생의 술과 글씨와 노래를 익혔으니 그 세월만도 30년이 넘은 셈이다. 특히나 만년에 출입이 자유로와지지 않으면서도 한낮에 대학로까지 나와서 찾으시길 여러 번이었다. 선생은 비교적 낯가림이 심했다. 한창 때 돈암동 맥주집에서 만날 때는 옆자리에 시인 송욱이 홀로 술을 마셔도 목례만 나눌 뿐 합석을 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기에 새로이 누구를 만나기보다는 예전의 어린 후학들과 자리를 자주 갖고 싶어했건만, 그새 나이들어 버린 우리는 시간을 내어 동선동으로 찾아뵙는 일이 점차 뜨악해지고 말았다. 마음은 지척이지만 사는 일의 고단함에 지레 지치고들 만 것일까.

그 많은 세월 동안 선생은 시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으셨다. 시 이야기가 나올 만하면 학도가를 불러대시거나 귀곡성을 소리쳤고, 그도 여의치 않으면 ‘귀 안들림’을 빙자하거나 ‘웬쑤를 갚아주시요’와 같은 말로 자리를 피해나갔다. 그러면서도 매달 문예지나 시집을 꾸준하게 읽으셨기에 우리들 작품의 속내까지 환히 아시는 눈치였다. 예컨대 취흥이 도도해져 글씨를 쓰게 되면 언제 보셨는가 싶게 우리들 새 작품의 구절을 기억해내시는 것이었다.

시 이야기를 피하시긴 하였지만, 선생의 화제는 늘 무궁무진하셨다. 필자에게는 주로 주역과 노장을 중점으로 삼았으나, 추사에 이르면 절로 흥이 나시는 것같았다. 특히나 추사의 ‘백화’ 글씨 초본을 찾아내었을 때는 화색이 만면한 채 그날로 당호를 ‘백화시실’이라 정하기도 했다.

선생은 추사를 사모하였기에, 스스로 많은 당호를 가지려 하였을 뿐 아니라 우리들에게 당호를 지어주시는 데도 참으로 선선하셨다. 이 때문에 때로는 너무 쉽게 당호를 작명하시는 바람에 의미 있는 당호를 기다리던 우리를 난처하게도 하였다. 예컨대 필자의 방산재는 하마터면 필자가 그무렵 살던 면목동과 연관져 면목재(面牧齋)로 낙점될 뻔하였으며, 강우식 시인의 경우는 옛 지리지에 의해 고향인 주문진과 관련해 수극재(水極齋)로 작명되어 급기야는 수형(水兄)으로 개명을 할 정도였다.

선생은 스스로의 시를 자평하되 천상병의 말을 빌어 ‘원광’과 같다 하셨다. 우리 시의 옹색함을 뛰어넘고자 한 스스로의 시업이 한편으로는 대견하고, 한편으로는 늘 애석하셨던 같다. 평생에 걸쳐 우리들 후학이 찾아갈 수 있는 원광과 원광 속의 다듬어지지 않은 수많은 원석들을 마련하였기에 뿌듯하면서도누구도 쉽게 보아내기 어려운 화씨벽(和氏璧)의 고사를 상기하자니 마음이 답답하셨던 것이리라. 그러나 논리를 뛰어넘는 곳에 시가 있고, 틀을 벗어버리는 데 자유로움이 있으니, 선생의 원광이 있으므로 곧 우리 시의 지평이 마련되었음을 우리 詩史가 두고두고 증명하리라 생각하면 이승의 시업 또한 쉽게 떨쳐버릴 수 있으실 것이다.

선생은 내게 선배이자 가형과 같으신 분이다. 선생을 추모하는 간절한 마음에 전날, 나름대로 구용 시를 읽어보자 애썼던 자취를 덧붙여 둔다. 구용 시에 독법이 따로 있을 리 없으나, 또 한권의 韓國詩經을 읽는다는 생각으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도 달도 다 잊어버린 채 다만 그 뜻을 새기는 마음으로 구용 시를 따라가 볼 일이다.

 

1.

1964년의 일이었다. 아마도 초여름쯤이 아닌가 싶다. 우리 일행은 을지로 4가에서 전차를 타고서 돈암동에서 내려 동선동을 찾았다. 일행은 서너명쯤 되었는데 그 이름을 낱낱이 기억하기란 어렵지만, 지금은 내 아내가 된 김정희가 아마 유일한 여학생인 듯 싶고, 울산의 천기철, 선원빈, 그리고 홍신선이 모두가 아니었나 싶다.

우리는 당시 동국대학교 국문과 재학생으로서 시 합평회의 강사를 찾고 있었는데 의논끝에 김구용선생을 모시기로 합의하고, 선생의 댁을 찾아가 그 뜻을 밝히기로 하였던 것이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뵈었건만, 다행히도 선생께선 댁에 계셨다. 약간은 겁에 질리고, 그 때문에 미리부터 방자한 심기를 북돋우고 있던 우리를 맞아준 선생께선 뜻밖에도 소탈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만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없어서, 우리의 뜻을 겨우 더듬더듬 밝혔는데 선생께선 기꺼이 청을 들어주셨다. 이제 돌이켜 생각하면 당시 선생께선 지금의 내 연배에 견줄 수 있는 연치였건만 너무나 의젓한 장자의 풍이었다.

며칠 뒤, 우리는 ‘동국시 세미나’라는 거창한 현수막을 건 자리에서 학생 시에 대한 선생의 강평을 들었고, 몇가지 질의를 하기도 하였으며 잇달아 합평회보다도 더 기다리던 술자리를 벌였다.

선생과의 첫 대면은 겨우 이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그로부터 선생의 이름자는 하나의 각인으로 내 가슴에 새겨져 있었다.

합평회에 선생을 강사로 초빙하기는 하였지만 선생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천박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선생의 서라벌 제자였던 천기철이 그나마 선생의 시와 인간에 익숙한 정도였을 뿐 우리는 선생의 시를 읽으며 ‘참으로 재미없는 시를 쓰는 시인’이라는 인상이 고작이었던 것 같다.

선생의 시를 유심히 읽기는 그로부터 2,3년 뒤의 일이었다. 강원도 양구 어느 고지 아래서 졸병 생활을 하던 무렵이었다. 산에 나무를 하러 가게 되면 점심을 먹고 한잠씩 자곤 하였는데, 그 토끼잠을 자는 시간이 내가 독서를 즐길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이었다. 당시의 나는 되도록 시를 멀리 할 양으로 노장이나 주역, 그리고 휴정의 『선가귀감』을 비롯한 불경 따위를 뒤적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다 휴가 때 집에서 들고온 고본잡지에서 선생의 시 「消印」이며 「불협화음의 꽃」 등을 오려내 읽곤 하였다.

 

囚人이 그날그날을 노동으로 소일하며 철창 너머 구름과 벗하며 붉은 벽돌담을 등지고 선 樹木과 대화하며, 밤이면 등불과 벽들을 기다리며 눈바람에서 음악을 듣는다면, 내 地上의 安定을 아무나 빼앗지 못할 것이다.

―「소인」에서

 

특히나 「소인」의 마지막 부분은 당시의 내 심정과 너무나 흡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문에 선생의 시를 읽는 것은 아니었다. 위의 구절처럼 하나의 시를 이룬 부분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구절은 역(易)에 연상되거나 귀감(龜鑑)에 나오는 선사들의 방할에 뿌리를 두었으며 노장의 마음과 연원을 같이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고독과 육체의 피로에 휩싸인 채 명가의 책들과 씨름하고 있던 나로서는 씨름의 대상이 하나쯤 더 늘어난다 해서 크게 마음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한국 시경을 한권 더 읽는 기분이었다. 김범부의 표현을 빌자면 비사체의 시를 읽는다는 게 더 적확할지도 모른다.

 

딛는 발길이 위태롭다. 실족하지 않도록 조심성을 가지면 허물은 없으리라―(1)

죽음은 삶의 운명이지요. 구경 우주도 그 이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보면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2)

이건 역시 쓸모가 없는 나무다. 그러나 이렇게 클 수도 있었다. 신인이 그의 생명을 보전하는 것도 쓸모없는 나무의 도리에 의해서다―(3)

 

꿈같고 허깨비같고 물거품같고 그림자같은 것, 또 이슬같고 번개와 같아 마땅히 이처럼 보게 된다.―(4)

(1)은 역의 ‘離爲火’에서 나온 구절이고 (2)는 「소인」의 한 구절이며 (3)은 장자의 말이고 (4)는 금강경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이렇듯 삼가와 선생을 동열에 세움은 저들의 뜻을 아직도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고백에 다름아니다. 다시 말해 강원도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는 줄곧 저들과 씨름할 뿐, 허리춤을 틀어쥐거나 멱살을 잡아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선생의 시를 三家와 견주는 것은 망발임에 틀림이 없다. 시는 시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노력은 학문의 것이 아니라 시의 것인데도 그 길이며 넓이를 한껏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데 불만이었던 것이다.

선생이 일찌기 유불선 삼가를 섭렵하였던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하나 그렇다해서 선생의 시가 반드시 그와 같다는 것은 비약일 뿐이다. 내가 굳이 지난 독서 체험을 들먹여, 선생과 삼가를 나란히 내세움은 그 정신의 연원이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지, 선생의 시가 이루고 있는 성취도를 운위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다만 이 자리에서 덧붙일 수 있다면, 선생의 시 표현은 아직 해독키 어려운 점이 많으나 정신의 성취도는 편린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밤에 쓰는 시/ 아무도 못듣는 말을/ 돌(石)은 용하게 알아낸다./ 돌은 날이 새기 전에/ 물(水)에 구절(句節)을 기록하고/ 너의 음성을/ 나의 목소리로 상감(象嵌)한다.

―「육곡」에서

 

예컨대 선생의 시에 절망하다가도 위와 같은 시구를 읽을 때는 정신이 번쩍 나지 않을 수 없으니 ‘무의미한 난해’라는 세평에 무작정 기울 수만도 없는 것이 내 실정이다.

최근에 나는 ‘한국명시순례’라는 기획 아래 선배 시인들의 시를 한편씩 가려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왜 그들의 시가 한편의 시로 우리들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는지, 그 뿌리를 더듬어 올라가기 위해 짐짓 내 스스로가 시인으로 변신하여 한 편의 에세이를 써보는 방식이다. 선생에 대해서는 「頌 76」을 대상으로 삼아보았기에 이 자리에 묶어두기로 한다.

 

2.

구름 소리를

나무테의 음악을

없는 말씀을 듣는다

바람 좀 보았으면

씨앗 좀 심어 보았으면

샘물 좀 보았으면

우러렀다가

무릎을 꿇어

두 손으로 천천히 짚고

머리를 깊이 숙인다

없는 흙은

행여나 만날까 하여

오랜만의

봄운동이다

―「송 76」

 

구름을 바라보노라면 그 황홀한 변신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것들은 세모꼴이나 네모꼴과 같은 도형일 경우도 있고, 멍석이나 키와 같은 경우도 있다. 소나 양과 같은 동물의 모습인가 하면 상수리나무나 느릅나무와 같은 식물의 모습일 수도 있고 조개나 게, 혹은 잉어와 같은 해물일 수도 있다. 사전적인 정의를 따르면 공기 중의 수분이 얼어붙어서 떼를 지어 움직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구름이 기류에 따라 서로 모여졌다 흩어지면서 연출하는 갖가지 형태야말로 신의 작품이랄밖에 없다. 사전은 그 형태를 대충 햇무리, 회색 차일, 비, 산안개, 새털, 소나기, 비늘, 양떼, 뭉게, 두루마리 구름 등으로 가름하고 있다.

어려서 어쩌다 구름에 눈길을 줄 양이면 기기묘묘한 그들의 천변만화에 흠뻑 빠져들어 시간 가는 것을 잊었던 기억이 난다. 뿐이랴, 그 구름을 따라 마음도 혹은 기쁘고 혹은 슬프기도 했으며 때로는 구름에서 보내오는 모든 소리를 전해 들었던 비밀한 경험 또한 아직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이 필자가 처음으로 맞딱뜨린 상상력의 세계였다. 동시에 상상력의 세계란 현실의 세계와 대립된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현실의 세계에서 경험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세계인 것을 깨우쳤던 셈이다.

김구용의 시는 바로 그러한 상상력의 세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구름의 형태나 감성, 음향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순수하게 표현하고자 한다.

시인은 먼저 구름의 소리를 내세운다. 구름이 시인에게 어떤 소리를 전했는지 우리는 헤아릴 길이 없다. 그 소리가 시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도 알 길이 없다. 시인은 이어서 ‘나무테의 음악’을 말한다. 이 역시 구름의 경우처럼 시인의 설명을 듣을 길은 없다. 시인은 세번째의 행에서 비로소 ‘없는 말씀을 듣는다’고 진술한다. 이렇게 3행으로 구성된 1연을 읽고서도 우리에게는 아직도 많은 의문이 남겨져 있다. ‘듣는다’가 비록 구름의 소리와 나무테의 음악과 없는 말씀에 연결이 된다 하더라도 의미를 따지기 좋아하는 우리의 관성으로는 애매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시인이 보여준 3행이 상상력의 세계라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그러한 진술에서 우리는 더이상의 것을 찾아낼 길이 없다. 이쯤에서 우리는 재래식의 시읽기를 포기해야만 한다. 낱낱의 단어, 낱낱의 행과 연을 분석하여 그 의미를 따지기 보다는 차라리 시인의 상상력과 보조를 맞추는 편이 구용시를 읽기에 훨씬 즐겁기 때문이다.

시인은 2연에서 1연과 동일한 진술을 반복한다. 바람을 보고 싶다는 희망, 씨앗을 심어보고 싶다는 희망, 샘물을 보고 싶다는 희망의 반복이다. 그 반복을 무심히 들어넘기다 보면 또 하나의 허방이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바람과 씨앗과 샘물이 존재하는 세계가 1연의 상상력의 세계와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제2연은 바로 그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바로 하나의 세계임을 암시하고 있다. 1연이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것이라면 2연은 사물에 대한 희망을 피력함으로써 사물과 시인간에 이루어지고 있는 갈등과 화해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그러나 독자인 우리는 아직 구체적인 화해의 모습을 실감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시인이 제3연에서 마치 제의를 연상시키는 경배 행위를 묘사하면서 우리는 시인이 이제껏 부딪쳐 보고자 했던 사물이 초월적 대상임을 문득 깨닫게 된다. 1연과 2연의 갈등과 화해라는 등식을 제3연에서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아마도 상상력의 세계를 시의 주세계로 삼는 시인들이라 할지라도 대부분의 경우는 제3연으로 시의 마무리를 삼게 마련일 것이다. 하나 김구용의 경우는 제4연이라는 뜻밖의 복병을 배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복병은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제4연은 ‘없는 흙을 행여 만날까 하여’와 ‘오랜만의 봄운동’이라는 두 개의 부분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그 중 ‘없는 흙’이야말로 가까스로 시인의 상상력을 뒤좇아가고 있는 우리 앞에 넘을 수 없는 벽처럼 새로이 나타난 것이 아닐 수 없다. 없는 흙을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우리의 어떤 연상 놀이에서도 그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필이면 흙이란 말인가. 고백하자면 비교적 시인의 여러 작품을 대해 왔고 그런 대로 즐길 수 있었다고 생각했던 필자로서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시의 그런 구조적 신비를 파헤쳐가면서 우리 식으로 재단했던 해석방법에 기인한 오류였다. 제1연과 제2연에서 시인이 보여줬던 상상력의 갈등과 화해라는 난문제를 제3연의 도움에 힘입어 거뜬히 해결했다고 생각한 우리의 하잘 것 없는 자부심에 눈이 가려진 것뿐이었다. 시인은 1연에서부터 3연에 이르기까지 상상력을 증폭시켰다면, 제4연을 통해 사물에 대한 그의 깨우침을 알려주고자 했던 것이다.

사물에게 부여된 관성이나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란 상상력의 1차적인 몫이다. 그러나 진정한 상상력의 세계라면 사물의 존재 또한 뛰어넘을 수 있는 대상에 불과하지 않을까. 시인은 그 과정에서 사물이 곧 시인이고 시인이 바로 사물이기도 한 일체감과 자연의 순리를 밝혀낼 수 있었고, 이른바 오도의 한 경지를 한 가락 시로 빚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리라.

상상력과 깨우침이란 별개의 것이면서도 단계적인 것이다. 한데 시인은 그것을 동시에 수용하고 있다. 그러한 수용이 시의 골조에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시인이 모르고 있을 리는 없다. 여기서 시란 무엇이냐는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시가 한 세계의 표현이고 옮김에 지나지 않는다면 김구용의 시는 그러한 모형에 합당하지가 않다고 결론할 수가 있다. 그러나 시가 한 인간의 정신적 편차이며 승화의 다른 이름이라면 김구용의 시적 성취란 바로 많은 시인들의 희망점이 아닐 수 없다. 많은 평가들이 그의 시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이유의 하나는 이러한 희망점에 대한 무지의 소치일 수도 있으리라.

다시 말해 김구용시의 성취를 독자가 알아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정신의 상승 훈련이 요청되는 것이다.(시인, 경기대 교수)

추천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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