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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용 시인의 세계

나는 내 시 얘기 안합니다/김강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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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방지기
댓글 0건 조회 5,680회 작성일 03-07-29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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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김구용

나는 내 시 얘기 안합니다
―행동은 죽지 않고/그들만 없다(金丘庸/‘4·19 기념’ 詩句)
김강태


金丘庸, 외로움이 묻은 셔츠

댁을 방문하기 전, 나는 투루게네프 시집 《산문시》1)를 읽는다. 모호하지만, 그에겐 <新산문시>라는 조금 생경한 장르가 따로 있다. 마찬가지로 구용의 시도 너무 어렵다. 공空이요 사변思辨이며 몸부림이고 베일이다… 투루게네프보다 더 난해하다. 웬일인지 나는, 구용의 산문시를 읽으면서 그가 산문 형식을 어디에서 인식했을까를 추리해본다. 산문시마다 이야기가 들어있다. 나는 구용의 산문단시散文短詩에 특히 호감을 갖는다. 부인의 안내를 받아 작은 방으로 들었다. 구용 영감마님이 꼿꼿 구부정히 앉아 있다. 오세요, 오세요, 하신다. 굵은 테 안경의 누런 뼈가 인상깊다. 어르신, 절 받으세요. 절한다. 숙인 고개를 드는데, 무심히 선생의 젖은 와이셔츠 깃에 묻은 흰빛 외로움.  

선생의 몸 앞/아래가 불툭하다. 허리 이하를 단단히 비틀어맸다. 약주를 자주 계속 마셔서 작은 일을 자주 보신다던데. 내 머리통이 섬칫, 죄스럽다는 생각부터 몰켜든다. 나는 소리부터 지르고, 동행한 시인 장경기는 비디오를 적당한 곳에 설치한다. 소리 지르기―. 구용 영감은 보청기를 낀다. 아니다. 이건 진실이고 사실이고 현장이지만, 선생을 뵌 나의 감상기 자체가 쓰잘데 없는 하나의 췌언이라는 생각에 낯빛이 떳떳치 못하다. 넓적 뭉툭한 코, 앙 다문 입술, 그리고 선한 눈. 비 맞고 엄마에게 살짝 혼난 아이같은 저 웃음… 그러나 구용은 외롭지 않다. 순간의 외로움은 단순 실상일 뿐이다. 집안에 묵향이 흐르는 듯, 예 저기 글씨들이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두루두루 다아 고맙지요, 고맙지요

어이쿠, 이거 워낙 누추한 자리라놔서 오시지 못하게 한 점을 깊이, 사과,드,립,니,다. 그래, 어,디,서, 오셨지요?…김강태씨십니까?…그런데 내가 뭐냐믄, 일체 사람을 안 만,납,니다. 신경통에 혼자 걷지를 못해요, …근데 모, 사진은 한 장만 찍으세요. 그럼요, 오시면은 막걸리 대접할게요. 아이고, 사진을 통해서 아는 분들을 오래간만에 만났어요. (《현대시》 ‘영상시집용’ 시인 얼굴을 바라보다가) 하이고, 어제까지 청소년같은 분들이 다아 여기 있네…그때 어린것들이. 이 얼굴이 이형기 맞지요? 그런데, 이 양반은 왜 이렇게 머리가 희어졌지요? 몹쓸 사람, 머리가 왜 이다지도…, 나보다 어린 사람이 쯔읏. 참, 이형기 씨가 많이 아프다더니 이젠 다 나았나요? 아직은 힘드세요. 다행이네요. 동대에서 정년퇴임했나, 봉급은 드리고 있지요? 뭐라고요? (몇 년 동안 제자들이 대강代講을 해드렸어요. 선생께서 스스로 그만두셨지요.) 아─하, 그래요? 그래두 봉급은 드려야 하는 건데, 계속 드려야 하는 건데. 여긴 김춘수지요? 이게 언제 찍은 사진인데 이렇게 젊게 나왔어요? 이 사람. 아─하. 그냥 근래 사진으로 놔두지 않고… 다아 고맙지요, 고맙지요. 어이구, 이 사람 봐. 이가 누구요? (이수익요.) 이수와? (이수익요.) 이수익? 거, 부산 엠비씨…어린것이 다 이렇게 컸네. 앙하, ‘아/하’ 사이에 꼭지이응(??)의 비음이 강하게 들리던데. …어? 조정권이 맞죠? 정권이! 어린 사람이, 재밌네. (만면의 웃음) 전 얘까지 알아요. 이 밑엔 몰라요. 구상 선생도 여든이 다 되셨지요? 이거 언제 찍은 사진들인데 창창하게 나왔어요. 허허. 앙하, 앙하! 두루두루 다아 고맙지요, 고맙지요.

미당은 올해가 84세이니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시집을 내시고. 많은 어려움이 있으셨지요. 그러니 이렇게 늙으실 수밖에. 난 77세고. (왜 요즘 시는 안 쓰세요?) 아이고, 그만 둘 때는 그만 둬야지. 70이 넘어서 시를 쓰다니요. 근데, 서정주 선생님은 아무리 연세 드셔도 천품이 타고난 이예요. 그런데 왜 박두진 선생 작품이 없어요? 아무리 책을 받아봐도 박두진 시가 안 나와요. 시종 기독정신으로 일관하신 분인데. 이랬다 저랬다 하는 분이 아니지요. 그인 내겐 대선배로 잘 압니다. 요즘은 도무지 선생 작품을 볼 수가 없어. 그럼 안 돼요, 청록파 중에 한 사람만 남았는데. 그 사람처럼 죽 일관되게 글을 써오는 분이… 도대체 몇이나 있어요? 맨 젊은 시인들 뿐이니… 그분이나 저나 사람 만나는 거 싫어서.

이건 이승훈이죠? 알아요. 여기도 대개 알아요. 고은·정진규, 김지하예요. 내가 김지하 씨는 만나본 일이 없어요. 이 냥반을 정면으로 본 일은 없고… 박경리 선생 사위가 맞죠? 임영조, 그리고 오세영 선생…, 그런데 머, 여기까진 완연해요. 그런데 이형기씨가 이렇게 백발이 창창하니, 뭐. 그러다가 김광림 시인의 안부를 묻는다. 전화도 뭣도 얘기가 안 통하니깐. 무신 놈의 전화예요. (뭐라고 여쭈자, ‘네? 네?’ 여러번 반문하시는 구용 시인.)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고, 나도 그만둘 때가 됐지요. 손이 떨려와서 도무지 시를 못 써요, 전화도 못 받고. 보청기를 끼고 그러니 아무 것도 안 돼요, 아무 것도. (선생 곁의 사모님 말씀, ‘선생님이 보청기를 자주 끼질 않으셔요. 듣고 싶은 말만 들어야 하는데, 듣고 싶지 않은 세상 소리가 하도 시끄러우니까.’) 정적, 적막. 시계소리 시끄럼. 손은 왜 그러셔요? 왼손목이 약간 돌아가 있다. (아주 큰 소리로:어디 좀 나다니세요?) 꼼짝도 못해요. 아주 오래 전에 변소 다녀오다가 이 마루에서 넘,어,졌,습,니,다. 손이 이렇게 바깥으로 해서 넘어져야 하는데, 안으로 접질러져서 너무 아파 혼났어요.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손목 팔목이 가늘다. 부인이 ‘사실은 지난 겨울인데’ 하신다.

내가 불교를 믿어서 불경을 많이 읽었지요. 인연이 닿아야 해요, 인연이. 다만 요즘은 아무 생각도 안 합니다. (사모님이 다가와 돋보기를 다른 안경으로 바꿔 드린다.) 계속 습관성 입맛 다심. 소형 탁자에서 원고지를 발견한다. 최근의 덜덜 떠는 필체다! 한사코 감추는 구용 영감. 반백半白의 머릿발.

담배와 술. 우선 담배. 눈이 나쁘다. 계속해서 담배를 태우려고 1회용 라이터를 찾는데 라이터의 10배는 됨직한 보청기의 소리조절단추를 계속 돌린다. 여기 있어요. 켜드리니, 그걸 그냥 달라신다. 난 내가 해요. 그리곤 신경통이 오랫동안 와서 아프다 아프다, 하신다. 그나마 없는 살을 꽉 꼬집는다. 아플 때마다 꼬집다가 알코홀로 서서히 몸을 마비시킨다, 쓰러뜨린다, 침몰시킨다. (무슨 말씀? ‘이젠 그만 살다 가야지요.’) 약준 무얼 좋아하세요? 오직 막걸리다. 맥주는요? 거, 비싸놔서… 막걸리가 좋아요. 우리나라 술! 김강태·장경기 복창한다,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 술!’ 걸쭉허니, 향내가 싸아허니 됴오타. 김구용 왈, 담배 펴요, 펴. 내 앞에선 괜찮아요. 다 친군데, 머. 웃는 얼굴의 동안童顔이 꼭 어린애같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참았던 장경기, 떨리며 매우 조심히 황송하여 담배를 한쪽으로 피우다. 바깥쪽이 푸름으로 가득하다. 앞을 꽉 가린 은행나무, 무려 30년이 넘었단다. 여기서 사신 지도 30여년. 목조 기와집에 붙은 현판이 몇 개 단촐히 붙었다. 추사체 모형, 당신 것, 그리고 음각한 것, 검은 것… 성균관대에서 추사 전집이 번역됐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봤어요. 당신 옆 탁자 위의 고려청자에 대해 여쭈니, 인사동 리어카꾼에게서 사온 모조품이죠. 내게 진짜가 없으니 가짜라도 모시고 봐야지, 으억헉(=웃음소리).



술·담배·책·비디오…

아는 분의 시를 읽는 것만으로 천만 다행이라신다. (그렇다면, 책은?) 저기 봐요, 천상병 전집을 인사동 <귀천>에서 사모님(목순옥 여사)이 보내오셨어요. (감동적인 표정.) 東里 전집도 민음사에서 보내주시고. 저거면 돼요, 행복해요. …그리고 완당 선생의 <반야심경>(영인본)을 꼭 가까이 모시고 보지요. ‘모시고’에 큰 힘줌말. 통문관 이 선생께 보이니 원촌原寸 그대로라며 귀히 간직하랬다고. 초의선사를 위해 이 글(뒷글)을 쓰셨다고 적혀 있네요.  

그리고 우리 엄마와 우리 아버지를 늘 봐요. (웃음. 웃는 양이 참 귀엽다. 송구!) 생각난 듯이 깨끗한 사진 두 장을 꺼낸다. 젊은 엄마, 아빠의 모습이 아주 젊다. 그러고 보니 벽에는 전에 석굴암에서 탁본했다는 문수보살상이, 옆 벽엔 보현보살상도 걸려 있다. 김구용, 안경을 바꿔 끼다. 굵은 테, 얇은 테. 책 좀 읽으세요? 책은 안 보고 테레비에서 녹화한 <한국의 명찰名刹> 같은 거를 잘 봐요. 방송국이 너무해요, 두 번을 보여야 하는데, 한번만 보여줘서 녹화할 틈을 주질 않거덩요. 한번 본 뒤 좋은 거는 그 다음에 기다렸다가 하면 되는데, 쯧. 그게 재방송이 되야만 되는 겝니다. (力說) 그런데 한번은 모르고 똑같은 걸 두번 찍었어요, 응이─. 말씀 간격이 떠듬떠듬 또박또박. 다소 막걸리에 목소리가 젖고 비음이 더욱 명료해진다. 아무튼 내가 3번은 크게 언성을 높여야 겨우 알아듣는 구용 영감.

나는 아버지 돌아가신 거 모릅니다. (왜 모르세요?) 그렇게 사는 거 아,닙,니,까.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엇허─. 이때 비디오 아티스트 겸 시인 장경기 형 등장. 김구용 시인을 중앙으로 하고 대담자 김강태 등장. 구용 님, 단좌의자에 따스히 단좌端坐 정좌靜坐.

첫 마디. 나는 내 시詩, 안 합니다. 나도 모를 걸 중얼거리고 있어요. 내가 한 문자는 얘기하기도 싫습니다. 모두들 어렵다고들 그러고… 요즘은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살아요. 그게 편해요. (큰 소리로 질문:그렇다구 정말로 아무 생각도 안 하셔요?) 안 해요, 안 해. 저녁 때 그냥 술 마시고, 마시다가 취하면 자는 거고… 그냥 자기만 하면 돼요. 그러다 보니 는(늘어난) 게 겁밖에 없습니다. 사실 좋아하는 시인들이 있는데 그걸 기억하지 못해요, 읽으면 금방 잊어버려서. 전부 이름을 한글로 쓰니 시를 읽어도 기억이 안 돼요. 편히 앉으세요. 편히.  

또, 담배, 담배. 라이터를 켜드리니 잡채듯 완강히 뺏으며 하시는 말씀, ‘내가 합니다.’


나는 내 詩 얘기 안 합니다

첫 시집에 대해 한 말씀 부탁 드리자 버럭 화를 내며 ‘난 말 안 해요. 모릅니다. 말 끌어내지 마세요. 왜 자꾸 말을 끌어내려구 그래요?’ 혼난다, 아이구. 그러나 이때 약간 취해서 당신 시의 비밀에 대한 중요한 말씀의 단초를 이렇게 남기다. ‘남이 다 알도록 시 쓰면 안 돼요. 그러니까 나는 (남이) 모르도록 써요. 그러니 헐 말이 없어요, 헐 말이.’ 나도 장경기도 할 말을 잃는다, 금세 생각을 앓는다. 금방 신경이 지지직 타오르는 듯. 이 구절이 김구용 시인 말씀의 전부다.

하루 일과는요? 6시에 기상하고 술 먹고 취하면 그냥 쓰러져 자고… 자야 되거든요, 우선. …병원 가는 것도 구찮아요. 그러다가, 이렁저렁 살다가 그냥 그저 가는 게지요, 뭐.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건 뜬 구름이 떠있음이요, 죽었다는 건 뜬 구름이 꺼진 데 지나지 않는다는 불경 구절을 되뇌신다. 구용 선생은 불경만큼 《고려 불화》(文明大, 열화당, 1991)도 즐겨 보신다. 장 형이 책을 만지작거리자, ‘보세요, 보세요’ 하다가 갑자기 언성이 높아진다.

거기 보세요, 고려 때 불화가 다 일본놈한테 넘어갔어요! (격분한다.) 우리나라 문화재는 일본놈이 다 가지고 있어요! (다시 흥분. 내 마음이 떨린다. 구용 선생의 손이 더욱 떨린다.) …일본에 가 있거나 어디 있거나, 어디나 있으면 되잖아요! (목이 끓으면서 비관.) 문화재가 아무 데나 있으면 어때요? (다시 격분. 체구가 작은 분의 속내 어디서 그런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터져나오는지 나는 적이 놀란다. 아직도 손목에 힘이 넘치시나, 악수할 때의 그 짜릿함!) 다시, ‘문화재에 무슨 국경이 있어요?’라는 비통스러운 말씀.  

구용 영감, 모처럼 당신의 속내 이야기를 꺼낸다. 조선조 <漢學 四家(朴齊家·李德懋)>로 유명한 실학자 柳得恭과 李書九 선생(특히 五言古詩에 능함) 그분들은 어떻게 됐냐 허믄, 자기 시가 어떻게나 어려운지 한 줄마다 스스로 자신의 주해를 달았어요. 허헉, 웃음소리. 이 말씀을 두 번이나 반복하다. 그들은 북학파의 거유巨儒 연암 박지원의 제자들이다. 구용은 퇴계 선생을 고인古人 중 제일로 친다. 퇴계는 자기 무덤에 묘비명을 직접 쓰고 돌아가신 분이란다. (가신 뒤에 나라에서 이 비문을 새겨 넣었다.) 그 내용인 즉, ‘낳으면서 크게 어리석었고, 자라면서 이 병이 어떻게 이리도 많았던고…’ 하면서 자기 칭찬을 전혀 하지 않은, 매우 고결·겸손하신 분이라고. 조선 시대가 오로지 퇴계 외엔 내세울 게 없다는 단호한 말씀. 나에겐 젊은 시인들이 옛것에도 좀 더 신경을 쓰라는 뜻으로 들렸다. 진정 부끄럽게도.


다시 고독감이

내가 사모님께 구용 선생의 옛날 사진을 보여달라고 하자, 준비하러 간 사이 나는 무심히 작은 방안 풍경을 목격한다. 놀란다. 선생이 취한 얼굴로 혼자서 작은 일을 치르고 있었다. 이때 부인이 안방에서 나오면서, 자연스레 ‘제가 도와드릴께요’ 하신다. 편하고 아늑하다. 영감은 애써 일 보고 애써 누워 지쳐 쓰러진다. 구용 영감에겐 ‘눕다’와 ‘쓰러지다’가 동격이다. 죄송하지만 곧 그는 누울 것이다. 곧 쓰러질지도 몰라. 손이 자주 와들와들 떨리고 신경통으로 몸을 꼬집으며 탁주로 고통을 씻는 구용 영감. ‘부처님의 세례’, 순간 그런 걸 생각했다. 난 눈시울을 만진다. 문득 박재삼 시인이 떠올랐다. 그분이 그랬지, 작년 6월호였던가. <커버 스토리> 인물. 운명하기 16일 전에 겨우 만나뵈었던 박재삼 시인. 만 1년이 지났다. 이 책이 나올 때 쯤해서는 1주기 추념식이 있겠지. …댁을 나오면서 나는 진심으로 오래 사실 것을 큰 소리로 올린다. 버얼건 얼굴로 당신은 이미 취해 누우셨다. 거대한 잠수함 형상이자 완전한 선객仙客으로. 圓鑑國師의 <두 선객에게 2>란 선시禪詩 하나. 풀이는 李元燮 선생 걸 택했다. 마음과 사물이 하나의 명경지수로 어우러진 시로, 현재의 구용 선생의 분위기와 흡사하다.


대숲 가에 紅桃花/뒤늦게 피어

아침 술이 볼그레/볼에 오른 듯

그러나 한바탕/퍼붓는 비에

푸른 잎뿐, 그 꽃들/간 곳이 없네.


문간에서 다시 부인께 묻는다. 찾아오시는 분이 있어요? 없어요, 거의… 전화는요? 나는 목이 쉰 채 다시 묻는다. 귀가 너무 어두워서 전화 받으실 수가 있어야죠. 구용 영감이 약주 자시기 전에 하신 말과도 같다. 부인이 의외로 젊어뵈신다. 그동안의 남편 병고를 수발한 분으로는 외려 해맑았다. 그저 일상적? 평상심? 노老와 병病과 사死를 초월한 느낌… 그치만 마음이 전혀 가볍지 않다. 장경기 그도 표정이 송구스럽고 어둡다. 둘이는 10미터 쯤 지나가다 만난 닭갈비집으로 들어간다. 목이 칵 막혀 냉막국수를 시키고, 익어가는 닭갈비 조각을 애꿎게 꾹꾹 누른다. 티비에선 축구 경기가 펼쳐지고. 곧 월드컵이 벌어진단다. 자메이카 팀과 2차전을 치르는 모습이 얼핏 눈에 들어오다. 홍명보가, 이상윤이가, 가끔씩 차범근이가 보인다. ‘자메이카 훼어웰’. 이상하게 나는 이 노랫말을 목구멍에 쳐넣다간 빼곤 한다. 대신에 뼈 없는 닭조각이 잘잘 씹히다. 가자, 5호선 지하철 역으로. 이 곳은 성신여대입구역. 자메이카, 오오 자메이카 훼어웰. 그런데 갑자기 내 머리를 때리는 말씀.

거, 쓸 데없는 거 쓰지 말아요! 빼버리세요. 내가, 대체 뭐,를, 아─우? 그러면서도 당신은 집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어 스스로 오류선생이라던 도연명 씨를 다시 꺼냈지. (도씨 역시 술 도사道士다. 마셨다 하면 취하는 게 자기와의 약속이었다니.) ‘불구심해不求甚解’라. <오류선생전>의 한 구절이다. 한문에도 약한 나는 퍼뜩 젊은 한문학자 林鍾旭의 일천쪽이나 되는 책을 커닝한다. 이른바 《고사성어대사전》(고려원, 1997, 356─357쪽)다시 급전急電(☏260─3501)을 취하니, 임 선생이 도연명을 들려준다. ‘책읽기를 즐겨하지만 억지로 외우지는 않고, 매번 자신의 뜻과 맞는 글귀를 보게 되면 문득 기뻐하여 밥 먹는 것도 잊는다’는 그다. 즉, 불구심해란 ‘억지로 외우거나 파고들지 말아야 할 걸 짐짓 파고듬을 거부한다’는 뜻이려니.

그는 이미 1972년에 십이지장궤양으로 눕는다. 오로지 생각이 ‘자신을 정리 못하고 가겠구나’ 싶었고, 시집을 적게 낸 것을 잠시 후회하기도 했다. 수술 뒤 성춘복 시인에게 맡겨 시집 출판을 부탁, 그나마 정리하게 되었다고. 구용의 연보는 간단하다. 타인의 너절한 정년기념문집의 소개문에 비해, 너무 간단한 그의 연보가 깔끔스럽기 그지없다. 본명 金永卓. ‘略歷: 1922년 2월 5일·경상북도 상주군 모동면 수봉리 출생/본적·경북 협천군 가회면 덕촌리/經歷:1953·성균관대 국문과 졸업/1953─1954·상명여중고 교사/1955─1956·《현대문학》 기자/1955·<현대문학 신인상> 수상/1956─1987·성대 문과대 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 역임/1956─1973·서라벌예대 강사/1956·陸士 강사/1957─1958·건국대 강사/1958─1959·숙명여대 대학원 강사/1958─1961·숙명여중고 강사/1960─1961·성대신문 주간’, 달랑 이거다. 더 이상 밝히지도 않는다. 물어도 소용없는, 더도 덜도, 필요없다는 말씀. ‘著書: 1969·시집 《詩集 1》(삼애사)/1976·시집 《詩》(조광출판사)/1978·장시 《九曲》(어문각)/1982·연작시집 《頌 百八》(정법문화사)’. 그리고 ‘《산문》 《일기》 未刊‘ 등, 고작 이 정도다. 미간은 무엇하러 밝히시누? 그러나 번역이 좀 있는 편이다. 《채근담》(정음사, 1955)·《옥루몽》(정음사, 1957)·《열국지》(어문각, 1965)·《삼국지》(일조각, 1974)·《노자》(정음사, 1979)·《수호전》(삼덕출판사, 1981) 등. 허구 많은 상 하나도 제대로 못 챙겼다. 구용 시인답다.  

그의 글씨는 독특한데(완연한 영감 글씨다), 유명시인(?) 집에는 거의 그의 글씨(휘호)가 있다. 개중에는 갑자년 겨울에 쓴 ‘나는 말도 할 줄 모르는데/어머님 나라 말씀은 곱기도 하네’가 마음에 든다. 압권은 단연 천상병 시집 《새》와 박제천 시집 《壯子詩》 글씨와 강우식 시인에게 준 글씨. 천상병, 김구용, 천상병, 김구용, 천상…병. 白華室이 그의 서재 이름이다. 출처를 알 수 없는 <肉聲>이란 일필휘지의 글씨. 또한 시인 김영태의 구용 초상화가 성큼 다가든다. 맛난 글씨로.


난 이런 분 보문 무섭드라구

구용 영감은 내게 말한다. (공책을 빼앗길까 걱정될 정도로.) ‘쓸 데 없는 거 다아 없애세요. 뭘 그리 적으세요… 말도 되지 않는 걸. 그리구, 말 끌어내지 마세요. 나는 이런 분 보문 무섭드라구, 꺼으꺼으.’ 하기사 ‘자작시에 대한 변설을 혐오’한다 하셨지. 지겹고, 끊임없이 아픈 존댓말, 제발 그 말씀만은─. 돈 플레이 댓 쏭. 언젠가 저 분이 교수였던가. 그는 시인이고, …지금 그는 많이 아프다. 문득, 김종철 시인과의 15년 전 대담기사를 노크(《현대문학》, <나의 文學, 나의 詩作法>, 1983. 2월호)한다. 시인은 <자신을 정리하는 길>(123쪽)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몸이 아펐기 때문에) 첫째 이제는 잘 쓰기 틀렸고, 둘째는 내가 못한 것을 뒷사람이 할 것이라는 생각, 이를테면 겁이 없어졌’다며 자기 생각을 솔직히 밝힌다. 그래서 ‘오히려 시가 술술 잘 나’온 것이라고. 한때 구용 영감에겐 그런 적도 있었다.

그는 사뭇 거부한다. 거부하고 또 거부한다. 나는 그가 거부할 때마다 가슴이 저리다. 알지못할 가슴 저림, 떨림. 그러던 중에 선생의 흥얼거림. 당신의 시처럼, 독자가 거부하는 게 아니라 구용은 거부하면서 쓰고 또 쓴다. 그는 첫시집에 1936년(14─15세) 때 쓴, 시조 내음 짙은 <懷古>(개성 수학여행 기념 작품)를 수록한다. 당찬 패기다. 9살부터 문학에 관심을 보인 그였다. 《어린이》 잡지 애독, 《샛별세계》인가 하는 잡지 구독하기. 문학에 본격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한 것이 어린 11세… 다행히 경제적 여유가 있었고, 게다가 둘째형이 문학을 좋아한 점도 큰 도움이었다. 그는 회고한다, 고복수의 <복되소서 이 강산>,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등이 유행하던 때, 소년으로서 몸 속 정한情恨 같은 애상哀傷을 깊이 느꼈다고. 그러하던 20세 안팎, 일제의 징용·징병을 피해 그는 절간 동학사로 간다. 도피다. 그게 10여년, 책만 주욱 읽었다. 그러다가 불경 등, 한문고전에 눈뜨다.

해방 뒤, 서울서 동리 선생을 만나뵈며 숱한 신세를 지다. 1949년 《신천지》에 처음 작품을 소개하시다. 곧 6·25 전란이 일면서 피난처에서 어머니 운명으로 이듬해 부산행, 동리 선생은 청년 구용을 취직까지 시켜주다. 당시 생사를 다투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선배 시인들의 ‘자연 친애 경향’의 시는 구용에게 깊은 실망만 안기다. 이때 조연현 선생의 주재로 우여곡절 끝에 《문예》에 파격적인 산문시 <탈출>을 발표, 세간의 염려와는 달리 의외로 좋은 반응을 얻다. (*본문 수록시詩, 대부분의 한자를 한글로 표기―글쓴이)

무수한 主義에 의하여 한 실체가 여러가지 색채로 나타났다. 제각기 유리한 직감의 중첩과 교차된 초점들로부터 일제히 해결은 화염으로 화하였다. 이러한 세력들은, 圭角은 분열로 구렁으로 모든 것을 싸느랗게 붕괴시켰다./거리마다 鐵彈이 어지러이 날아, 음향에 휩쓸린 방 속 나의 넋은 파랗게 질려 압축되었다.

<탈출> 첫부분이다. 완벽한 거부감이 시의 전반을 착, 때린다. 단순한 난해가 아니다, 문장 전개의 모순도 있다. 독자의 이해를 마냥 거부하는 그. 한자어의 중점 사용은 ‘긴장’을 다소 무겁게 유도하지만, 역으로 권위를 억지 부림으로써 읽는이들께 피곤을 풍겨준다. 시적 화자는 탈출한다. 어디를? ‘무수한 주의에 의하여 한 실체가 여러가지 색채로 나타’난 곳을. 그만큼 시적 화자의 당대는 ‘무수한 주의’가 난무하는 혼란기. 해결·합의는 없고 ‘화염’, 곧 불꽃같은 파쟁과 쟁론 뿐이다. ‘규각’은 무엇인가, 말과 행동이 어긋난다는 뜻이다. 그런 터질 듯한 상황하의 ‘모든 것’은 ‘싸느랗게 붕괴’될 수밖에. 주위는 ‘거리마다 철탄이 어지러이 날아’ 다니는 긴박한 전쟁 상황, 총탄 날으는 소리에 ‘방 속 나의 넋은 파랗게 질려 압축’되고 만다… (이 시는 1951년 작품!) 좀 어렵지만 예사롭지도 않아라.

그러나 한자어가 들어간 관념어 즉, 추상명사의 주된 사용은 지적할 만하다. 김종철도 구용 시의 특징으로 ‘의미와 이미지의 난삽성’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난해성이(은) 논리의 해체와 직관의 환상적인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는 데서 기인’한다고 어렵게 전해준다. (대담, 125쪽) ‘직관의 환상적인 인식’이라니! 일견 이해하지만, 좀 알쏭달쏭한 말. 다만, 구용의 추상명사에 대한 변은 시의 이해를 돕는 동시에 문제도 많아 보인다. 당시 우리나라의 시인 다수가 물질명사만 썼기에 구용이 일부러 추상명사를 이용했다? 서양인들의 후자 사용이 자유로워 저들이 깨인 듯이 보였다? ‘그래서 추상명사를 우리나라에 도입을 해서 정신이 있는 내부성을 표현해 봐야지’라고 생각하셨다구요, 오호라. 허나 이 정리엔 논리적 허점이 보인다. 물질명사로 ‘정신이 있는 내부성’ 표현은 정말 불가능한가, 과연 그런가. 그렇다면 시에서 말하는 이미지란 무엇이며 이미지 구사란 무엇때문에 존재하는가. 정신성은 꼭 추상명사로만 가능하다? (이 기록은 1983년에 작성되었다.) 어렵다 어렵다들 하지만, 사실 구용 시는 당시만 해도 자기 시작詩作 논리의 지배를 철저히 받았다는 느낌이다. 그러므로 의도적? ‘난해를 위한 난해’의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 난해의 외연은 보이지 않는 듯하다. 그가 그랬던가, ‘내 시를 보면 기다리면서 속을 비우는 데 있습니다. 오직 나타나길 기다리지 그걸 잡으려 하지 않아요.’ 그런데 ‘나 자신을 완전히 백지 상태로 비워놓고 멍하니 있으면 말이 떠올라요. 그러면 한 줄을 쓰고 또 자신을 비우고 기다려요. 또 그 다음에 뭐라고 쓸까 하는 것만 남기고 나를 완전히 비웁니다’를 짚어보면, 일견 그다운 풍모와 정결성이 함초롬히 엿보인다. (129─130쪽)  구용은 시창작 실기 지도에 엄격하다. 미사여구는 죽기보다 더 싫어한다. ‘공부 좀 더 해야겠구만’ ‘이건 버려!’가 그의 주된 채찍이었다니까. 그는 ‘초현실주의 시와 선적禪的인 시의 조화’란 세인들의 평가에 대해 전자를 부정한다. 서양 책으로는 동양과 통하는 폴 발레리 정도라며 ‘내 시의 바탕은 고전’이라고 분명히 힘준 바 있다. 상징주의 시도 읽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 초현실주의에 대한 오해는 엘뤼아르 등을 읽으면서 풀게 된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시인은 정지용이고, 萬海·未堂·李箱이 그 뒤를 잇는다. 또 구용 시의 특징 중에서 매우 긴 산문시 형식을 우리가 잊을 수는 없겠다. <消印> <꿈의 理想> <不協和音의 꽃Ⅰ·Ⅱ> <九曲> 등이 그 대표적. 말이 장시지, 직접 낭송하다 보면 환장할 정도다. 그는 자기 시가 긴 이유를, 짧게 쓸 수 없었기 때문이란 명답을 남기기도 한다. 다음은 1967년 지은 <消印>의 처음 부분인데, 8포인트 크기정도의 1행 40자에 20행, 무려 127에 시작한 쪽면이 156에 끝나고 있다.(산문시 <꿈의 理想>은 무려 30쪽에 593행이다. 내가 이런 시를 분석해야 하나, 한편 허탈해진다.) 지겹다,고 생각하다가 놀라서 그만 질린다. 더욱이 행갈이가 한번도 없음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아예 까무러치고 만다. 바로 이 시다. 맛만 보라.

머리 위를 똑바로 쳐다보며, 기묘한 꽃무늬의 天井紙에 붙은 거미를 비짜루로 후려치려는데, 그 거미가 황금의 彫像品으로 변하였다. 내 同情이 그러한 작용을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황금을, 즉 이러한 스스로의 躊躇를 후려갈기자, 책상에 떨어진 거미 배에서 뜻밖에 진한 진물이 내밀었다. 고름같은 진물을 보고야, 전기 코일처럼 세밀히 감겨 있을, 햇빛에는 언제나 오색이 영롱해야 할, 그러한 絹絲가 아닌 것을 알고, 다시 배반 당한 공허를 느꼈다.

명사의 추상성은 ‘스스로의 주저를 후려갈기’는 장면에서 도드라진다. 스스럼없는 표현법이 보통 이렇다. 이 시는 뜻밖에도 전체나 부분이 쉽게 풀린다. 대개의 부분이 전체고 전체가 부분이다. 부분적 전체시詩와 전체적 부분시詩도 많다. 등등등, 이러고 보니 내가 꼭 신뽀리같다. 그건 광수생각, 이거는 강태 생각… (내가) 이렇게 써도 섞갈리는 건 사실이지만. 이 시구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자. 거미는 즈이 똥구멍에서 실을 뽑는다. 시적 화자는 거미줄에서 칭칭 일던 햇살 기억이 많다. 곧 황금실타래가 들었을 거라는 의도적인 착각(=‘동정’)에 빠져 있던 중, 떨어진 거미 뱃속에선 황금의 전기 코일이 아닌 ‘진물’을 발견하곤 화자는 경악한다. 오색 영롱한 견사가 들어 있는 줄로만 알았던 것. 소결론은 ‘배반 당한 공허’다. 다만 ‘황금을, 즉 이러한 스스로의 주저를 후려갈기자’라는 비문은 문제다. ‘주저’란 머뭇거림인 바, 이번엔 ‘중얼거림·망설임·머뭇거림’ 투성이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시가 단순 난해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풀면 풀린다. 그의 언어 조직을 분석해나가다 보면, 단어와 단어의 떨어뜨림과 맞춤에서 비의秘意는 게릴라처럼 숨어있다가 돌출한다. 그래도 집요히, 해체시켜 보는 거다. 맥없는 서사부도 엔간찮이 보인다. 이 부분을 왜 썼을까, 의심스러운 시구도 많다. 나는 또 버릇처럼 ‘중얼거림’…이라고 뇌까린다. 그가 의도적으로 비틀었을까? 알 수 없지만, 혐의 짙음을 부인키는 어렵다. 구용의 시가 무섭다. 나는 ‘바보’라고 내뱉는다. 누군가에게, 알지 못할,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을. 그는 정말 내키는 대로, 붓이 가는 대로 썼다(?) 그리고 오탁번처럼 우릴 향해 ‘용용, 죽겠지’ 하는 걸까.

그는 김수영 시인의 갑작스런 죽음을 문상한 뒤 쓴 시가 있다. 김구용 식式 추상명사의 동업자 김수영. 예총 영결식, 거기서 돌아온 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쓴다. ‘당신의 글이 길이 빛날 걸 나는 믿는다. 추상명사만 갖고도 시가 된 게 당신이 아니냐’라고. 김구용이, 김수영에게… 나는 그들이 언급한 이 추상명사 속에 시의 비밀이 직통 열린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추상 이면엔 ‘구상具象’이 있는 법. 구상은 이른바 물질명사에 해당한다. ‘不可視‘와 ‘可視’의 절연할 수 없는 끈끈한 관계로, 불가시적 존재마다 가시적 존재가 그림자로 되비친다는 이항정리로 이해하자. 다시 말해 그의 추상은 난해할수록 구상성(=물질명사)을 수렴한다는 판단이다. 그러므로 나의 <구용 시 독해법>을 이해해달라. 짧은 산문시에서 의외로 그의 난해성은 베일을 벗는다. 그는 애써 감추려 하지만, 단문은 추상명사가 많을수록 노출의 허점, 곧 가시적 물질성(=구상성)이 많다고 풀이해도 좋겠다. 나는 그의 ‘단문 산문시’ 분석이 오직 자유로운 독해의 지름길로 판단한다. (당연히 구용 시인의 짧은 산문시를 주목한다.) 그는 의외로 노출하고 싶어한다. 드러내고 싶어 한다. 문인들은 항용 자기 속내를 문자로 표출하고 싶다. 외부로의 트리플 점프다. 젊은 것들이 튀는 방식의 여러가지를 보라. 점프, 점프, 점프! 곳곳마다 점핑이다.


초기 散文詩

제반 시집은 나름대로의 특성을 갖고 있지만, 나는 첫시집에 특히 매력을 느낀다. 우선 시의 골조가 상당히 단단하다. 연작시나 장시는 따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분석이 또한 그리 간단치 않다는 점에서 논외로 하고 싶다. 시집 《九曲》의 정신의 팽창주의는 부분 해석을 거부하고 있다. 풀어진 긴장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시집 《頌 百八》은 구용 시 인식의 전형을 일부 수정시킨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재고의 가치가 있는 작품집임은 틀림없겠다.    

특별난 서사 구조를 가진 시 <벗은 노예>(1954). 화자 ‘그’가 취해서 창녀와 일박한 체험을 아리게 그렸다. 쫓기듯 나오며 느낀 뒷맛은 ‘긴 몸이 축 늘어지고, 애증의 毒牙가 섬광을 일으키며 서로의 대가릴 물어뜯자, 피는 거울에 튀고, 물결은 방안을 피(血)빛으로 바꾸었다. 그는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정신을 잃었다’는, 경대 위 兩頭蛇amphisbaena를 목격하면서 뱉은 독백이 무척 아리다. 시적 화자의 여자 체험은 이렇게 가혹하다. 시적 화자는 그러므로 작품 속에서조차 ‘몸부림치며 구원을 불렀다’고 외치고 있다. 그런데 아름다운 감각의 미혹迷惑이 보인다. 보라, ‘끌려갔건 따라 들어갔건 간에 방안은 아름다운 물 속이었다. 여자의 긴 수초가 일렁거리며, 얼굴은 푸르렀다. 전등에 젖은 여자는 전설을 지닌 인어였다. 싸늘한 피부가 쓰러진다. 맹렬한 식욕의 날개는 단숨에 모든 영역을 지나 큰 입술로 빨려 들어간다’는 표현이 범상치 않다. ‘그’의 섹스 경험은 ‘자기 얼굴 아래서 신음하는 얼굴에 대한 연민이 학대의 기쁨으로 불타올랐다. 화염 속에서 여자는 굴욕으로 살고, 생성의 욕구는 腐爛한 지 오래였다’는 회고로 남는다. ‘부란’이란 썩어문드러진다는 뜻으로 미루어 ‘학대’의 매저키즘과 ‘기쁨’의 새디즘 사이에서 자기애自己愛의 시적 화자는 극심한 자기 혐오증에 시달리고 있다. 구용에게도 이런 시가 있었다, 무려 44년 전에.

‘그러나 이 유리창이 맑음을 잃고, 추위에 복잡한 꽃무늬로 凍結하는 것이, 내 아름다운 슬픔의 형상임을 보기도 한다’는 시 <나는 유리창을 나라고 생각한다>(가장 긴 시 제목)는 그의 감성의 극단을 노출하는 대표작이라고 생각한다. 환상적 감수성. ‘유리는 존재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빛의 장벽’이라고 이건제는 말하지만, 구용은 ‘나는 이 유리창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계절마다 가지가지로 변하는 벽화는 없을 것’이라고 독백한다. ‘장벽’과 ‘벽화’ 사이에서 난 머뭇거린다. 두 낱말이 주는 이미지의 괴리가 심하다. 시인은 장벽이 아닌 벽에 그림을 덧칠한다, 칠하려는 행위가 가열하다. 구용의 새로운 실존주의! 뿐만 아니다. <充實─석굴암에서>의 석굴암을 ‘무한을 함축한 본질’로 그렸다든지 <飛翔> <다방> 등에서 보인 모종의 願望wish─fullfillment은 전쟁 당대의 새로운 이상향으로 구분해도 좋을 것 같다. 우리는 이들 작품에서 구용의 50년대 감성이 매우 뛰어남을 알 수 있다.

내가 물 속에 있는 것이다. 점점 물 속으로 계산표가 일렁거리며 나타난다. 나의 희망에 이끼가 파릇파릇 돋아난다. 구름도 없는 분위기를 헤치며, 은린을 번쩍이며 모색의 고기들은 주변을 헤맨다. 내 함부로 뻗은 정신의 구성! 산호의 가지들 사이로 눈을 감으면, 수많은 고기들이 紺碧의 해심을 뚫는 만월을 넘는다. 그러나 내 얼굴은 저 벽의 DEATH MASK, 기름땀을 흘리며 음악과 電光으로 酸化하고 있다.  

─<다방> 부분

시적 화자는 다방에서 불이 든 수조水槽를 바라본다. 얼핏 금붕어들. 그도 물 속에서 유영하는 듯한 착시상태에 빠진다. 은린을 번쩍이며 무언가를 모색하는 물고기들의 배회. 마치 ‘내 함부로 뻗은 정신의 구성’과도 같다. 남푸른색(=‘감벽’) 깊은 바다 중심을 뚫는 만월이란 수조 안의 설치물을 일컫는 듯. 이런 평화가 물 속에서 고요히 이는데 ‘내 얼굴은 저 벽의 DEATH MASK, 기름땀을 흘리며 음악과 전광으로 산화하고 있다.’ 불안한 상황이다. 전쟁탓인가. 쉼터에서조차 불안은 가중되지만 사실은 시인의 안식, 곧 물 속이라도 안주하고픈 욕망의 극단을 역으로 그린 시다. 이중에서 <뇌염>은 독특한 역작이다. 여기 총탄에 맞아 죽은 자의 백골이 있다. 증거로 탄환구멍(=‘彈穴’)을 적시한다. 이를 화자는 ‘사람의 智腦에 의하여 사람이 사람을 서로 죽인 생명의 투쟁’의 산물로 보았다. ‘지뇌’란 인간의 뇌로, 슬기롭다고 하면서도 교활하다는 의미를 그 뒷선에 깔고 있음에 유의하자. 화자는 원한다, ‘순수한 빛의 영역을’. 더러운 인간들이란 ‘생명이 생존하는 생명을 침식하며 번식’하기 마련 아닌가. 종국은 멸망뿐임을 시인은 만방에 선언한다.

하얀 古甁에 나의 온혈이 한 점 번지는 정적, 그 열린 뇌수를 바라보면 무엇인지 분명 들리는 듯 연꽃이 솟아 피었다. 존재와 관념이 하나로 녹아들다.

─<서재> 전문

<指針 없는 시계>의 ‘우리를 보아라’(전문)라는 단 한 줄의 강요는 우리를 아찔하게 만든다. 무수한 상상력이 요구되지만 굳이 설명을 요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시분 초침이 없는 시계면의 표정은 엄숙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것이 없음은 당연한 비정상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시간을 가리키지 못하는 창백한 시계 얼굴에서 무엇을 읽었을까. 인간을 향한 어떤 무서운 암시와 경고다. 마찬가지로, <서재>는 고아한 백자에 화자의 따스한 피가 한 점 번지는 무서운 ‘정적’ 형상을 그린 시다. 그것이 마치 해부한 골의 뇌수로 보인다고 했다. 무언지 분명히 들려오는 듯한데 주변에 연꽃이 만개했다. ‘연꽃’은 불교적 의미로 봐야 한다. 곧, 구원의 형상화다. 그렇다면 서재는? 우리가 거기까지 애끓며 의미 분석 및 정탐을 할 필욘 없지만 이런 풀이는 가능하다. 서재는 지금 ‘존재와 관념이 하나로 녹아’든 곳. 이때 존재란 실존·행동주의 개념이요, 관념은 고리타분한 학문세계의 딴 이름이 아닐까. 다시 말해, 서재란 존재와 관념의 치열한 싸움터라고 봐도 좋겠다. 존재와 관념이 마치 정적으로 번지듯 하나로 녹아들다. 합일치, 화합 도모.

단시 <겁>은 완전한 老子 생각(도덕경)을 본떴다. 그의 정신적 소유 역시 동양과 불교사상임을 부인할 수 없다. 1981년 1월에 《현대시학》에 발표한 시 <오랫만이군요>(부분)는 새롭다. 50년대와 30년의 시간적 거리는 그의 작품을 온순하게 만들었다. 생경한 한자 단어도, 뒤틀린 언어 유희나 기교도 없다. 그야말로 ‘오랫만이군요’, 나도 이렇게 인사하고 싶다. ‘침묵으로서 듣는다/말씀 없이도 전한다’가 사고의 중심이다. 무엇을? 영원을. 그런데 구용 시인은 왜 다음 작품을 이어서 쓰지 않았을까. 그는 일상만을 사랑했을까. 장성한 자녀도 셋이라는데. 사사로운 것에 관해서는 도무지 말이 없다. 나도 뭐라고 구차히 덧붙이고 싶지 않다. 그게 낫다는 생각이다.

오랫만이군요./뿌리로부터 태어나서/잎들은 눈을 깜박이며/意思를 교환한다.//눈 한번 깜박이는 사이의/영원이 있다면/허무한 순간에도/존재하는 것//(…중략…)//침묵으로서 듣는다/말씀 없이도 전한다./지나친 욕망과 심한 실망으로/문자들이 아우성칠 때//부족한 한/의욕만큼 주려서/베풀어진/하늘은 무엇일까.

구용은 오랫동안 개별 시에 제목을 달지 않았다. 이유는 제목에 구속 받기 때문. 대부분의 산문시 제목은, 저승가는 데도 기어이 여비를 갖고 간 시인 천상병이 지어주었다. 안타까운 것은 현대에 가까울수록 시의 신선도가 떨어진다는 점이다. <九曲> <頌 百八>, 연재시 <九居>는 3부작으로, 총체적 제목이 <아리랑>이란다. 30년 계획의 산물이라고. 그의 아리랑론은 ‘식민 지배하의 분함과 서러움’에서 연유한다. 나는 아래서부터 아프게 받쳐오는 게 있어 불현듯, 부리나케 편지를 쓴다.

수신인 : 신낙균 문체부장관
참  조 : 성균관대 총장/金大中 대통령

안녕하십니까. 저는 시 쓰고 공부하고 가르치는 김강태입니다. 공사公私로 매우 분주하실 줄 믿습니다. 벌써 여름이 성큼 다가섰군요.

새 세상이 왔기에, 달라진 5·18 신묘역을 참배한 뒤 느낀 바 있어 이 글을 올립니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 일이 시급해졌습니다. 더 중요한 일은 나라의 존망이 걸려있는 ‘이 IMF 한파寒波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이겠습니다. 진심어린 말씀입니다만, …지금 정부는 예술인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을, 어떻게 갖고 있습니까. 장관님이 답해 주시면 진정 고맙겠습니다. 현재 문인을 포함, 예인들의 사고 양식을 얼만큼 알고 계십니까. 이제 지방 선거도 끝났으니 예술인에게도 관심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성대 총장님, 귀교 국문과 교수로 정년 퇴임한 金丘庸 선생을 아십니까. 이 분이 생존해 계신 지금, 캠퍼스 너른 중앙 한켠에 든든한 시비詩碑를 건립할 용의는 혹시 없으십니까. 또, 일반인들이 가족과 함께 편히 소요할 <丘庸 詩路>를 만들 순 없습니까. 주변에서 많은 문인들도 긴히 바라는 내용입니다. 듣고 보건대, 김 시인은 진정 겸허한 분입니다. 시인정신도 매우 맑습니다.

申樂均 장관님, 혹시 정신적 자산인 예술인(특히 원로들)을 위해 따뜻한 ‘만남의 자리’를 만들 의향은 없습니까. 시집 한 권을 펴내려 해도 400─500만원이 드는 어처구니없는 세상에서, 우리 문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구차한 마음으로 드리는 말씀은 전혀 아닙니다.  

金大中 대통령님, 정말로 바쁘시겠지만 이젠 서서히 우리의 ‘정신문화 개혁운동’에 동참하실 생각은 없습니까. 모처럼 ‘서민의, 서민을 위한, 서민에 의한 대통령’으로서 말입니다. 마음 속 한 가지 의문을 더 말씀드리자면, 저는 대통령께서 그토록 책을 좋아하셨다면서 왜 그리도 저술하는 시인·작가나 학자들에 대한 배려가 별로 없으신지 여간 서운한 게 아닙니다. 종전의 도서출판 지원금은 각고의 배려였을지 모르나, 문인들에게는 피부적으로 거의 와닿지 않았습니다.

대통령님, ‘시인과 작가’의 명예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한번쯤 긴밀한 대화석을 마련하실 의향은 없습니까. 중견 시인을 포함, 진정한 문단 원로들과 대통령께서 직접 대화를 나누시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즐겁습니다. 요즈음 우리 시詩 문화를 대표하는 未堂 徐廷柱·具常·金南祚·李炯基 선생님 들이 편찮으시거나 연세 또한 많습니다. 저희 문인들도 나름대로 방책을 강구, 일부 마음을 나누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치유책이 되지 못함을 익히 깨달았지요. 하지만 대통령님, 그리 상심하진 마십시오. 1세기 가까이, 오늘날까지 그랬던 것처럼 솔직히 저도 ‘혹시나’ 기대는 않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공허한 반향으로 와도 상관은 없지만, 두고두고 아쉬울 거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문인들은 아무 정신적 물질적 기대치가 없어도 꿋꿋이 쓰고 또 쓸 테니까요… 누가 뭐래도 시인의 ‘정신’은 어느 경우에도 결코 배고프지 않았으니까요. 저들의 에스프리는 늘 팽팽합니다. 허나, 우리들의 정신만은 사랑받고 싶습니다. (온 나라가 서로 아픔을 나누는 시대에 철없는 넋두린 아닌가요. 또, 문단 어른들께서 저를 빙충맞다고 나무라실지 모르겠지만.) 어려운 시대에 특히 건강에 유의하시어 나라 살림에 임하시기를.


몇 안 되는 평문들

우선 章湖 시인의 <천 구슬, 만 송이 소스라쳐 휘날아>가 띈다. 낙산사를 그린 구용의 <觀音讚> 해설(《시와 불교의 만남 1》, 동국역경원, 1989, 141─151쪽)이다. ‘길도 없는 녹음에 산호 젓대 불며, 사슴 타고 돌아오는 南巡童子 고와라. 기우뚱거리는 수평선 둥긋 부풀어, 어그 막이로 깎아 솟은 바위에 쏴아 검푸른 파도 하얗게 부서져, 천 구슬, 만 송이 소스라쳐 휘날아, 우렁찬 소리 속에 출렁 철썩 뛰는 물결, 홀홀 나부끼는 흰 옷자락, 두렷이 바위에 자리하신 나(我) 없는 자태여. 온 몸 금빛 감으사 눈매 부실 듯 다스로와라. 향기 솔솔, 푸른 눈썹 윤이 사르르 흘러, 오오 맑은 圓寂 일체를 먹음다’란 시구가 지나치게 황홀, 어찔하다. 진실로 현란한 문장 구사다. 서정성이 풍부한 시로, 습작기의 오랜 숙련성을 드러낸다. 장호 시인은 이 작품을 《삼국유사》의 ‘만파식적’에 비유(‘兵退病癒 旱雨雨晴 風定波平’)하거나, 호머의 서사시 《오딧세이》의 오르페우스에 견주고 있다. 남순동자는 곧 선지식善知識을 찾고 진리를 터득한 善財동자의 또다른 이름. ‘원적’은 세상에 두려움 없는 확고한 자신감을 이름한다.

홍신선은 <한 초월론자의 꿈>에서 구용의 전통미학에 대한 외로운 싸움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으며, 정진규는 (우리도) 구용처럼 ‘들리지 않는 것을 들어내는 귀를 갖자고 역설한 바 있다.

박제천 시론집 《영혼의 날개》는 김주연과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구용을 섬긴다.(동아일보 대담 기사, 1981. 1월─6월) ‘전에는 어떻게 보면 석탄같은 시였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제는 그냥 석탄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불이 붙은 석탄으로 사람을 따뜻하게 하는 것 같아요.’ 朴은 구용 시를 ‘의도적 (깊이 있는) 감춤‘으로, 金은 그러나 내용의 깊이면에서 회의적이다. 명쾌하지 못한 의미 전달을 지적한다.

구용 시를 보고 ‘무의미한 난해시’란 일부 평설을 들면서 ‘시인의 고독한 몸부림은 구용에 있어서는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이고 ‘뜨거운 인간애의 시’라는 윤병로 교수. (<김구용 시 평설─시집 《시》를 中心으로>, 신아출판사, 1987, 32쪽) 구용은 자기 시를 ‘부귀와 훼예로도 빼앗을 수 없는 위치에 용납이 있으나 타협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33쪽, 재인용) 이래서 까탈스러운가. 누가 뭐래도 그는 여전히 휴머니스트다.

하현식은 말한다.2) 구용은 ‘비평가로부터 경원된’ 대표적 시인이며, 그 이유는 ‘지나친 난삽성, 또는 난해성’ 때문인데, 시인적 진실로 접근하기 쉽지 않음과 전통적 방법에 익숙한 기존의 입장이 구용 시를 잘 수용치 않으려는 경향도 크다는 것이다.

젊은 이건제는 구용의 초기 산문시를 연구한 <空의 명상과 산문시의 정신>에서 의욕적으로 말한다. 구용 시 연구의 본격적인 접근이랄까. (송하춘·이남호 편, 《1950년대의 시인들》, 나남, 1994, 215─244쪽) 다만 과욕으로 인해 지나친 현학성으로 기울어서 아쉽다. 젊은 이건제 씨, 구용 시를 일부 평단이 ‘현학적 궤변’으로 폄하했다지요, 그런데 그 현학성과 구용 자신의 ‘자의식 과잉’이 그대 글에도 언뜻 보이네… 예를 들어, 플라톤주의는 염결성으로 그리면 안 되는지. 다만 ‘그의 정신사적 고투와 언어 실험’에 대한 언급(221쪽)은 특기할 만하다. 일부 권위적인 비평가들께 부탁 드린다. 텍스트를 분명히 완전 소화하셨는가, 보다 쉬운 용어를 취하셨는가, 문장이 혹시 비문은 아닌가. 진정한 이해를 위한 분석인가, 아니면 자기 권위를 위한 맹목적 횡포인가. 겨우 평문 읽기를 마쳐도 텍스트 시가 더 어려워졌다면 비평의 존재 이유가 없잖은가. (몽매한 독자라구? 비평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데. 이럴 땐 속이 느물느물.) 호불론자 涵虛堂의 입적하기 전의 게송을 드린다. 비움, 비움! (‘한 물건’을 ‘한 물질’로 바꿔본다.)

湛然空寂  텅 비고 고요하여

本無─物  본래 한 물질도 없구나.

그리고 후일담

강계순은 선생의 ‘이 웬수야’ 속에 담긴 애정과 한을 추억하고, 한림대 이병구는 선생의 ‘지각합시다’(저승에 늦게 가자는 뜻)란 말씀을 사뭇 그리워한다. 많은 이들이 아직도 선생을 애모하고 있다.

이제서야 독자들께 고백하지만, 구용 영감 뵙기가 너무 힘들었다. 도무지 만나주지 않는 것이다. 전화로 아무리 통사정해도 선생(성북구 동선동 2가 142/☏02─923─7992)은 막무가내였다. 부인을 한동안 설득한다. 그래도 안 된단다. 난 쳐들어가기로 한다. 구용 영감 댁을 가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바쁜 비디오·맨 장경기도 겨우 부탁, 동행한 건데. 무조건 전화 올리고는 마다는 부인 말씀도 멀리하고 댁까지 찾는다. 근처 복덕방을 거쳐 뉴욕제과 성신여대점(☏926─2104·5)에도 들어가 우유 한 컵으로 죽치며 연락을 기다린다, 2시간 가까이. 지금은 부인도 외출하고 안 계시다는 파출부님의 말씀. 한참 뒤에 나타난 부인, ‘정말로 안 되겠는데요…’ 힘없는 표정. 그동안 찾는 이도 없었지만 당신의 행색이 스스로 남루하다고 생각하셨는지 ‘누구도 한 발자욱, 집안에 들여놓지 않았다’고 한다. 음색은 극히 평범했다. 쓸쓸 기운은 전혀 없었다. 난 막걸리 한 상자를 준비한다. 가까운 수퍼를 가니, 거기도 구용 영감을 익히 알고 있었다. 배달할 테니 염려 말라고. 우린 어쨌든 댁을 무조건 들어가기로 계획을 탄탄히 세운다. 좋다, 오늘은 차 한 잔이라도 마시고 가자, 여기까지 왔는데. 술 세례를 받아도 좋다, 나도 썽난다. 내일 또 오지, 뭐. 좋─다, 삼고초려다. 계속 투덜거린다. 정말, 그러실 수 있어요? 내가 서늘한 눈빛을 부인의 눈 깊이에 꽂으니, 일순 부인 얼굴에 당혹감이 스친다. ─그랬었다.

구용과 세사적 삶, 인서어트, 사이, 거리감. 이 거리감은 <소외疎外>라는 이름을 지닌다. 그가 세상을 단절한 게 아니라, 세상이 그를 단절한 탓에 구용이 그만 칩거에 든 것이다. 아니, 소외의 이름 안에 단단히 아랫도릴 죄듯 자신의 숨통을 옥죈 것이다. 스님들 모냥의 하안거夏安居 자태? 허나 그는 결코 초라하지 않다. 살아있는 정신이 떳떳꼿꼿하다. (이 말씀조차 송구!) 다만, 그는 어서 부처님이 데려가기만을 기다리는 듯.

아저씨들. 저어기, 눈부신 흰 구름이 ‘하롱하롱’일 때, 젊은 그대들은 뜨거워지지? 오래 실컷 살고 싶지? 많은 걸 잊고 사니 편하지, 더욱 오래… UFO처럼 눈시울에 잠시 붙었다가 휑그머니, 구용이 편운片雲 위에서 흰 수염 날릴 때는 언제이러뇨. 1년 미만, 아니면 아무도 모르게 홀연히? 그러나 나는 믿는다, 그가 이 세상에 언제이든 뗏목 타고 영감부처로 뗏목 타고 언어를 부리러 다시 올 것임을. 흐르는 지하철 5호선에 몸을 싣는다. 유리창 속에 콰악콱 콱콱, 박힌 여럿의 눈, 구용의 퀭한 두 눈, 사람그림자… 이젠 마지막 편안하실 그 날을 위해 앞으로 내 인사준비하고 있겠수. 구용 님, 이렇게 말이우.

영감 모쪼록 잘 가시우.
(1998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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