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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용 시인의 세계

김구용 시인 연보/민명자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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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4,693회 작성일 12-01-14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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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용 시인 연보

 

1922 2월5일(음력), 경상북도 상주군尙州郡 모동면牟東面 수봉리壽峰理에서 부父 김창석金昌錫과 모母 이병李炳의 6남 1녀 중 4남으로 출생하다.

 

1925 몸이 허약하여 철원군 월정역 근처의 한 마을에서 유모 삼마(탯줄을 자른 안노인)과 그해 겨울을 보냈다. 일기(1940. 3. 19)에 따르면 두 살 때 아버지와 어머니, 삼마 등에 업혀 ‘황악산 직지사’엘 갔다고 한다.

1926 아버지와 유모 삼마를 따라 내금강 마하연에 들어가 3년여 동안을 지내면서 가족이 있는 상주군의 집에도 내왕했다.

 

1931 경북 대구의 복명보통학교에 입학하다. 그 해 다시 철원군 보개면 심원사 지장암에서 병 치료를 위해 요양하였다. 당시 둘째 형(영두)과 셋째 형(영묵)이 일본에 유학할 만큼 부친의 교육열이 남달랐고, 가세도 부유 하였다. 김구용은 그러한 환경에서 문학적 자양을 마련했다. 아홉 살 경부터 《어린이》, 《샛별세계》등의 잡지를 애독하는 한편 형님들이 사놓은 책을 읽으면서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웠으며, 열한 살 경부터는 본격적으로 문학에 매달리기 시작하였다 한다.

 

1932 가족이 모두 서울로 이사를 하다. 서울 창신 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전학 하여 5학년까지 수학하였다.

1936 경기도 수원 소재의 신풍보통학교에 6학년으로 전학하여 졸업하다.

 

1937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다.

 

1938 충남 공주 자택에서 부친 별세하다. 김구용 시인의 부인 구경옥 여사에 의하면 부친별세 연도가 족보에는

 

1938년 음력 5월 8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1940년 6월 14일 일기(전집 4권, 49면)의 부친 탈상에 대한 서술에서 “만 3년이지만”은 일반적인 대상大喪의 시기와 전후 문맥으로 보아 병 치료를 위해 다시 금강산 마하연에 입산하였다.

 

1940 부친 대상大喪을 치르고 일제의 징병, 징용을 피해 충남 공주의 계룡산 동학사로 들어가 은둔을 시작하다. 그 후 10여 년간 수시로 동학사에 기거하면서 경전 및 동서고전을 섭렵하고 문학수업을 하였다. 동학사 기거중에 구주 탄광으로 가는 징용영장을 받고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불합격 하여 징용을 면하기도 했다.

당시의 일기에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정신적 방황이 드러난다.

일기(4.11)에서는 당시 「문학청년의 일기」, 서사시 「백화와 그 선생」의 집필이 여의치 않은 것에 대한 고뇌를 드러내기도 했다.

 

1941 책과 책상을 모두 동학사 미타암으로 옮기고 산사생활을 하면서 비구니들을 가르쳤다. 이로부터 산사에서 동서양의 사상을 섭렵하면서 정신적 깊이를 더했다.

 

1945 동학사에서 해방을 맞이하다. 부친 별세 후부터 이 시기를 전후해서 가산이 기울기 시작했다.

 

1947 동학사 미타암에서 내려와 모친이 계시던 형님 댁에 잠시 머물다.

 

1949 다시 동학사로 들어가 머물면서 요양을 하다. 미타암 양쪽 대문과 기둥에 붓글씨로 ‘게송’을 써 붙이기도 했다. 김구용의 시에는 보이는 게송의 특질이 체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9월 1일, 성균관 대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방학 때면 동학사로 들어가 『금강경』번역을 돕기도 했다.

김동리의 추천으로《신천지新天地》10월호에 김수경金水慶이라는 필명으로 「산중야山中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1950 한국전쟁 발발, 부산 피난 중에 모친 별세하다.

 

1951 김동리의 주선으로 부산에서『사랑의 세계』지 기자로 취직하여 1952년 4월호까지 출판하고 그만 두다. 이 시기 피난지에서 이형기, 김동리 등 많은 문인들과 교류를 하였다.

 

1952 부산에서 하숙을 하던 중 동학사에 들어가 3개월간 머물다가 다시 부산으로 오다.

부산에 임시로 개설된 상명여자중고등학교 교사로 취임(1952~1954)했으며, 밤에는 부산에서 임시로 세워진 성균관대학교에 나가 수업을 받았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지인 원의범과 함께 묘심사에 머물거나 이형기와 하숙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어려운 현실에서의 내적 갈등이 많은 산문시로 표출된다.

 

1953 성균관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다.

 

1954 《현대문학》지 기자로 근무하다.

 

1956 제 1회 ‘현대문학 신인 문학상’을 수상하다.

성균관 대학교 문과대학, 육군사관학교(5월~10월), 서라벌 예술대학교(1956~1973) 등에 강사로 출강하였다.

 

1957 건국대학교 강사로 출강하다.(1957~1958)

 

1958 숙명여자 대학교 강사(1958~1959), 숙명여자중고등학교 강사(1958~1961)로 출강하였다.

숙명여고에서 수업을 들은 제자 맹난자는 당시 굴원의「어부사」, 이백의「춘야원도리원서」,도연명의「귀거래사」등을 배웠으며 스승의 강의가 명 강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외에도 성균관 대학교나 여러 강의에서 김구용은『고문진보』나 『벽암록』,랭보와 베를렌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해박한 지식으로 열강을 했다 한다.

 

1960 성균관대학교 불문학교 출신인 능성綾城 구具씨(경옥)와 결혼하다.

성균관대학교 성대신문 주간을 하다.(1960~1961)

 

1961 장녀 수련이 성북동에서 출생하다.

 

1962 7월 12일, 성균관대학교 조교수로 임용되다.

방학 때면 동학사 미타암에서 지내다가 책들과 짐을 서울 성북동 집으로 옮겼다.

장남 원동이 돈암동에서 출생하다.

 

1964 2월 29일, 성균관대학교 부교수로 승진하다.

 

1965 차남 유동 돈암동에서 출생하다.

 

1970 1월 3일, 성균관대학교 정교수로 승진하다.

 

1972 십이지장궤양으로 수술을 받다.

 

1987 2월 25일, 성균관대학교 교수직을 정년퇴임하다.

 

2001 제 26회 ‘월탄문학상’을 수상하다. 제 1회 월탄 문학상 수상자로 지목되었으나 당시 자신이 심사위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고사하다가 2001년에야 수상을 한 것이다. 와병 중이라 시상식에는 직접 참여하지 못했다.

 

2001 12월 28일(양력) 영면永眠하다.

 

 

<저서>

1969 시집『시집 I』, 삼애사

1976 시집『시』, 조광출판사

1978 장시『구곡』, 어문각

1982 연작시『송백팔』, 정법문화사

2000 『김구용 문학전집』, 솔출판사(전 6권 『시』, 『구곡』, 『송백팔』, 『구거』, 『인연』, 『구용일기』)

2001 시집『뇌염』, 시집『풍미』, 솔출판사

 

<번역서>

1955 『채근담』, 정음사

1957 『옥루몽』, 정음사

1965 『열국지』, 어문각

1974 『삼국지』, 일조각

1979 『노자』, 정음사

1981 『수호전』, 삼덕출판사

1995 『열국지』, 민음사

2001 (동주)『열국지』솔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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