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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미니서사/김혜정/숨은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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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94회 작성일 20-01-20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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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미니서사/김혜정/숨은 벽


김혜정


숨은 벽



무언가가 내 뒤통수에 내리꽂히는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뒤로는 감감하다. 아니, 내가 발을 잘못 디뎌서 미끄러졌는지도 모른다. 근육들이 맹렬히 경련을 일으키고 온몸의 피가 머리에 쏠린 느낌이다. 이러다가 숨이 멎는 건 아닐까. 나는 배에 힘을 주어 상체를 일으켜 세우려고 안간힘쓴다. 하지만 아무리 몸부림쳐도 일어설 수 없다. 대신 입안에서 깔깔한 감촉이 느껴진다. 뱉어내 보지만 끊임없이 흙이 솟는 느낌이다. 누군가 나를 쓰러뜨리고 입안에 흙을 쑤셔 넣었나? 아니, 나를 파묻으려고 흙을 덮은 거라면? 오싹하지만 아직 나는 살아 있다. 내 몸을 덮고 있는 흙과 나뭇잎들을 밀어낸다. 묵직한 저항이 느껴지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그것들을 걷어낸다.
마침내 밀려드는 맑은 공기를 힘껏 몸속으로 받아들인다. 주위를 둘러본다. 감당할 수도, 거역할 수도 없는 무게의 어둠이 깔려 있다. 여기가 숨은 벽이 맞는 걸까. 내가 제대로 찾아오기는 한 걸까. 
나는 퇴근 후에 산에 올랐다. 능선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숨어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는 숨은 벽을 향해. 산이라고는 동네 야산밖에 오른 적이 없는데 며칠 전부터 뭔가가 내 안에서 수런댔다. 한번 꽂히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스스로도 수긍할 수 없는 감정, 그건 뭐였을까.
아무리 눈을 부릅떠 봐도 빛 한 점 발견할 수 없다. 점차 눈이 어둠에 익숙해진다. 나무들이 어둠의 농담을 이루면서 늘어서 있다. 몸이 온기를 되찾기 시작하더니, 점차 생기도 되찾고 있다. 이어 의식도 또렷해지기 시작한다.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지 모르겠지만, 이 어둠으로부터 한시라도 빨리 도망쳐야 한다. 그것만이 내가 살 수 있는 길이다. 하지만 이미 공포에 발목이 잡혀 움직일 수 없다. 아니,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엉덩이 걸음으로 나무 가까이로 다가간다. 나뭇가지를 거머쥔다. 어쨌거나 걸어가야 한다. 여기서 더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지금은 그 방법밖에 없다. 나는 나뭇가지를 잡고 일어서서 걸음을 뗀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바위들은 나 몰라라 뒷짐을 진 채이고 하늘은 그저 멀리서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고만 있으며 바람은 무심히 나를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복병인가. 코앞에서 뭔가가 움직인다. 온몸을 짓누르는 공포 때문에 숨을 쉴 수조차 없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은 분명 살아 있는 생명체다. 야생에 오래 방치된 생명체 특유의 다져진 몸과 분방한 몸짓, 분노로 거칠어진 호흡, 그 무엇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눈빛.
이런 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니. 내 운명은 여기까지였나? 나를 옥죄고 있던 사슬, 상사의 압박과 동료들의 따돌림으로부터 빠져나오긴 했는데, 결국 이런 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니. 숨은 벽. 그건 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능선 따위 나타나기를 바라지도 않고 걸었었다. 그저 내게 주어진 임무와 직분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승진에서 밀렸고, 외근으로 내몰렸다. 그리고 퇴사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다음 주에는 전세 값을 올려줘야 하고 다음 달에는 아내가 아이를 낳을 건데. 
  허옇게 드러낸 저 이빨, 거친 숨소리와 살기등등한 눈. 나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건가? 아니,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심호흡을 한다.

나도 알 수 없는 뭔가가 내 몸과 의식 속으로 파고든다. 이어 내 안의 감정이라고는 할 수 없는 광폭하고 거친 소용돌이가 시작된다. 나는 소리를 질러 본다. 내 목소리인데 내 것이 아닌 것만 같다. 이건 정말 포효에 가깝다. 눈앞의 짐승이 아닌, 그 짐승 너머의 어떤 것을 향한 포효. 나를 여기까지 내몰아온 그 무엇, 나를 짓눌러온 보이지 않는 폭력을 향해 나는 소리친다. 놈도 물러서지 않고 아가리를 쩍 벌린다. 아가리 안은 온통 어둠이다.
피해! 피하라고!
내 안의 비굴한 짐승이 속삭인다. 피하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 지금까지는 그렇게 살아왔다. 하지만 더 이상의 굴복은 없다. 나는 온몸으로 내 눈앞의 짐승을 향해 내달린다. 놈의 이빨에 갈가리 찢겨 결국 저 어둠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놈과 맞설 것이다. 나는 몸을 최대한 부풀리고 두 팔을 쳐들고, 재빠르게 움직인다. 악악, 내 입에서는 쉴 새 없는 악이 튀어나온다. 악악악, 내 안의 모든 악들이 튀어나와 내 눈앞의 악과 맞서려고 한다. 
숨은 벽을 몇 개나 넘었을까. 얼마나 더 남았는지 알 수 없지만 전의를 가다듬는다. 좋아, 해보자. 끝까지 가보자. 그런데 웬걸, 놈이 꼬리를 내린다. 서서히 꽁무니를 빼기 시작하더니, 결국 도망치기 시작한다. 놈의 그림자가 점처럼 사라져간다. 비로소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사위가 밝아오고 있다. 바람이 공기를 가르고 나무들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드디어 그곳, 깊은 어둠에서 빠져나온 걸까. 한 줌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빛이 이마에 닿는다.  *





*김혜정 199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비디오가게 남자」 당선. 소설집 『복어가 배를 부풀리는 까닭은』, 『바람의 집』, 『수상한 이웃』, 『영혼 박물관』. 장편소설 『달의 문門』, 『독립명랑소녀』. 간행물윤리위원회(우수청소년 저작상) 수상. 송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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