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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온라인청소년백일장 예심통과자ㅡ김승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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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황
댓글 0건 조회 1,612회 작성일 17-06-21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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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힌 꽃



 

   남자는 반쯤 눈을 뜨고 상체를 일으켰다. 남자의 머리카락은 천장으로 뻗쳐있었다. 남자는 거칠게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려고 노력했다. 눈을 비비는 손에서 물감 냄새가 나자 남자는 손을 내려다봤다. 빨간색과 파란색 물감이 묻어 있는 손. 남자는 손에 묻어있는 물감을 보고는 주먹을 쥐었다.

거실 한가운데엔 흰 도화지를 들고 있는 이젤이 놓여있었다. 남자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흰 도화지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남자가 고개를 돌렸어도, 이미 남자의 눈에는 채워지지 않은 도화지가 담겨있었다. 남자는 마치 눈 속에 담겨있는 도화지를 없애려는 듯이 느리게 눈을 껌뻑였다.

남자는 4층짜리 건물 중의 2층에 자리 잡은 조그만 상담소로 거리낌 없이 올라갔다. 삐걱거리는 계단 소리가 남자의 귀에 맴돌았다. 남자는 닫혀있는 상담소 문을 열어젖히며 안으로 들어갔다. 문 위에 아슬하게 매달려있던 종이 사람이 왔다는 것을 알려주며 상담소 안을 울렸다. 그리고 종소리가 끝나지도 않았을 때, 형식적인 인사말이 종소리의 뒤를 이어 상담소 안을 울렸다. 그는 들려오는 형식적인 인사에 아무렇지 않게 친근한 말을 내뱉었다.

  “오랜만.”

  “그러게 참 오랜만이다, 그치?”

   정연은 승현의 비꼬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익숙한 듯이 먼저 상담실 안으로 들어갔다. 정연의 뒤를 이어 승현 또한 상담실 안으로 들어갔다. 승현은 입고 있던 희색 가운을 제대로 다듬고는 정연에게 말했다.

  “, 그래서 뭘 상담할 건데?”

   승현의 물음에 정연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참을 침묵했다. 나 이래봬도 바쁜 사람이거든, 이라는 승현의 말에 정연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요 몇 주간 있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모조리 뱉어냈다.

   예술세계라는 말의 시작부터 남들 이상의 노력과 그 결과 얻게 된 인정. 이제는 자신의 앞에 평탄하게 열려있는 길 위를 걸어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하지만 정연은 그 펼쳐진 길을 걸을 수 없었다. 일자로 펼쳐져 있기에 저 멀리까지도 보이는 그 길을, 정연을 발조차 디딜 수 없었다. 앞으로 앞길이 유망하다고 주목받고 있는 이 시점에서 자신에게 슬럼프가 온 기막힌 타이밍을 정연은 믿을 수 없어했다. 남들은 슬럼프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회복되니까 괜찮다고 웃으며 말했지만, 정연은 잘못하다간 앞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를 만큼 갑작스레 찾아온 이 슬럼프에 뒷걸음질 쳤다. 정연은 이제껏 남들에게 하지 못했던 말들을 모두 승현에게 토해냈다. 억눌러져 있던 속마음들이 다시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나왔다.

  “주위에서는 너도 슬럼프를 겪는구나 하며 웃어넘겼지만, 나는 비웃음에 갇혀있는 기분이 들었어.”

   정연을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정연의 모습은 마치 죄인 같았다. 정연은 빨간색과 파란색이 멋대로 휘젓고 있는 자신의 손을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정연의 말을 듣고 있던 승현이 입을 열었다.

  “차라리 잘 됐네. 넌 과하다 싶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그림에만 매달려 왔으니까, 이번 기회에 그냥 쉬는 게 어때?”

   승현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투에 정연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한층 올라간 목소리로 승현에게 말했다.

  “3개월 후면 전시회를 열어. 그런데 그냥 쉬라고? 넌 무슨 그림이 하루 만에 뚝딱하고 나오는 줄 알아?”

  “그럼, 뭘 어떻게 할 건데?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있어? 괜히 억지로 그리다가 오히려 역효과 일어날 수 있다. 평생 그릴 수 없어도 좋다면 연필 들든지.”

   승현의 목소리는 마치 미래를 예언하는 듯이 담담했다. 정연은 승현의 말에 어깨를 굽히고 눈을 내리깔았다. 담담한 속에 숨어있는 무서운 승현의 말이 정연을 내리눌렀다.

  “……무슨 상담사가 이러냐? 안정을 주는 말을 해줘도 모자를 판에 무서운 말을 하네.”

  “공짜로 상담 받고 있으면서 불평하지 마라. 돈도 안 내는 주제에.”

   정연이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갈 거라는 말과 함께 문 쪽으로 발을 움직였다.

  “그래, 꼭 쉬어라. 무리하다가 평생 그림 못 그릴 수도 있다는 말 진짜니까, 무리하지 말고.”

   정연이 알았다는 의미로 대충 손을 흔들고는 닫혀있는 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그리고 문이 거의 닫히기 전, 승현이 정연을 불렀다. 정연은 다시 문을 열어 고개만 돌린 채로 승현을 바라봤다.

  “슬럼프를 핑계로 제대로 쉬어. 진지하게 내 말 들어라.”

   승현의 말을 들은 정연은 속에서 불쾌한 느낌이 올라왔다. 위를 한바탕 뒤집는 느낌을 정연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길로 바로 술을 마시러 갔다.

   상담소에서 나온 후 시간이 꽤 흐른 상태였다. 환하게 떠있던 태양이 어느덧 반을 돌고서 자취를 감췄다. 정연은 술을 입이 아닌 발로 마신 것처럼 가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를 반복하며 조용히 새벽이 내린 길 위를 누볐다. 천천히 길을 걷던 정연은 누구네 집인지도 모르는 담장을 손으로 짚어 조심스레 땅에 앉았다. 그리고 담장에 등을 기댔다. 정연의 고개가 담장에 머리가 닿을 만큼만 젖혀졌다.

   정연의 손에 묻은 빨간색과 파란색의 물감은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더 짙게 드러났다. 정연은 물감이 묻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어젯밤에도 그림을 그리려 물감을 들었지만 애꿎은 손에만 묻을 뿐, 도화지에는 물감이 묻지 않았다. 마치 도화지에 방패라도 달아놓은 마냥 그것에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정연은 숙인 고개가 아픈 듯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여름과 가을의 경계에서 가을로 점차 식어가고 있는 날들이어서 그런지, 바람이 온몸에 기분 좋은 시원함을 두르고서 주위를 떠돌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감은 눈을 떠서 주위를 둘러봤다. 여름날에 멀쩡하게 가지에 붙어 있던 초록들이 몇몇 바싹 말라 바닥을 뒹굴었다. 바람이 자유롭게 춤추고 낙엽이 하나 둘 바닥을 뒤덮고 있는 그 속에서 정연만이 홀로 멈춰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정연의 머리 위로 무언가 떨어졌다. 정연은 머리 위로 떨어진 물체를 주워들었다.

  “이게 뭐야?”

   정연은 물체를 가로등 빛에 비춰봤다. 그러자 초록색의 과일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일의 물렁한 느낌과 달달한 향이 매우 친숙했지만, 이것이 무엇인지 정연의 머릿속에서는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정연은 바닥에 그 물체를 내려놓았다. 피곤함이 얹혀 있는 정연의 눈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감겨졌다.

 

 “여기서 자면 입 돌아갑니다. 아저씨, 아저씨? 신고할까…….”

자신의 어깨 위로 느껴지는 온기에 정연은 무릎 사이에 묻었던 고개를 들려했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던 탓인지 정연의 고개는 들리지 않았다. 정연은 뒷목을 잡고서 한 번에 고개를 뒤로 젖혔다.

목이 기분 나쁜 신음을 날렸다. 목에서 나는 비명에 정연의 미간이 좁혀졌다. 정연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누구……?”

  “이 담장 주인의 아들 되는 사람입니다만.”

   정연은 천천히 고개를 둘러 사방을 살펴봤다. 어느새 날이 밝아있었다. 정연은 정신을 최대한 가다듬고는 다시 얼굴에 앳된 티가 나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담장을 짚고는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제가 신세를 졌네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기요, 잠깐만요. 혹시 저 무화과 아저씨가 딴 거예요?”

  “무화과요?”

   담장 주인의 아들 되는 사람, 소년이 움직이려는 정연을 막았다.

  “……설마 무화과도 몰라요? 그 왜 꽃이 뒤집혀서 된 게 열매잖아요. 요즘 무화과 철이라서 많이 팔 텐데.”

   소년이 정연의 뒤쪽 바닥을 가리켰다. 정연은 소년이 가리키고 있는 곳을 고개만 돌려 바라봤다. 정연이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에는 어젯밤 정연의 머리 위에 떨어져, 그가 땅에 놓아둔 열매가 있었다.

  “저거 저희 집 무화과인데……할아버지가 아끼는 건데 혹시 따셨나요? ……할아버지가 아시면 아저씨 여기 앞에서 물통 들고 오토바이 자세하실 지도 몰라요. 그러니 그거 갖고 빨리 도망치세요.”

말이 빨라진 소년의 얼굴이 비장해보였다. 정말로 심각한 듯 양 미간을 찌푸리며 정연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소년. 정연은 그런 소년을 보다가 무화과라 불리는 열매를 주워 들고서 말했다.

  “제가 딴 것이 아니라, 어제 제 머리 위로 떨어진 건데…….”

  “떨어져요? , 그럼 익은 건가보네. 아무튼 빨리 가요. 익든 안 익든 떨어진 거 보면 우리 할아버지가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당신 벌세울지도 몰라요. 무화과는 선물이니까 가져가고요.”

   소년은 허겁지겁 서두르며 정연을 빨리 보내려했다. 얼떨결에 쫓겨난 신세가 된 정연은 멋쩍은 기분에 머리를 쓸어내리며 집으로 발을 움직였다.

  “익으니까 떨어졌다고?”

   정연은 소년이 준 무화과를 내려다봤다. 맛이 달다고 들었던 것과 달리 무화과의 겉모습은 초록빛이 돌아 안 익은 느낌을 주어 맛없어 보였다. 그러나 이게 익은 거라니, 정연은 역시 겉으로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말이 맞구나 라고 생각했다.

   정연은 거실 벽 쪽에 있는 소파에 누웠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아까 익으니까 떨어진다고 말한 소년의 말이 정연의 귓가에 맴돌았다. 넌 이제 다 했어. 그러니 그만 물러가는 게 어때? 누군가가 정연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정연은 씁쓸함이 목으로 올라와 기관을 막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슬럼프 한번 겪는다고 그만둘까 어쩔까 하다니. 나 정말 끈기가 없구나?”

자조적인 한탄이 정연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 그림 그려야 되는데.”

   순간 정연은 모든 것이 멈춘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뒤이어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에서 생겨났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정말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인가.’

   정연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처음엔 분명히 그림을 그리는 것을 원해서 시작했다. 원하는 것이어서 인정받고 싶고 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갔으면 했다. 그리고 정연은 바라던 소망을 이루어 정상에 올라섰다. 주위에서는 자연스레 전시회를 열자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정연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원래 목표가 그것이었다는 듯이 재빠르게 그 말에 동의했다.

  ‘나는 왜 인정받고 싶었던 걸까? 물론 좋아하는 것을 인정받으면 나 또한 좋아. 그런데 지금은 뭔가 거기에 이물질이 들어간 듯한……그런 느낌이 들어.’

   씨앗이었던 상태. 흙에 깔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모르던 상태. 그런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서 정연은 어느덧 꽃을 피울 거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꽃을 피우지 않으면 씨앗으로써 실패한 것이라며, 자신의 삶에 커트라인을 만들어 그 위치에 억지로 자신을 끼워 넣었다. 정연은 소년이 준 무화과를 바라봤다. 다른 꽃들과 달리 꽃이 피지 못하고 뒤집어져 열매가 된 무화과. 피어오르는 꿈을 접어서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단 맛을 품에 넣은 무화과.

   정연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꽃을 피우지 않아도 열매를 맺을 수 있었어…….”

   무화과는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든 모르든 그저 가지에 매달려 자신의 꿈과 맞바꾸며 열매를 키워냈다. 그리고는 익어서 가지를 붙들고 있던 힘을 풀어 땅으로 떨어짐으로써 그의 존재를 알렸다. 정연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의자를 끌어와 이젤 앞에 앉았다. 이젤이 안고 있는 도화지는 이미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말하는 듯했다. 정연은 다시 한 번 꽃을 뒤집어 열매가 된 무화과를 생각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연필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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