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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청소년온라인백일장 예심통과 작품입니다-현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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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243회 작성일 14-10-10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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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현유림

지렁이

 

 

지렁이 노트#1

놀이터의 작은 모래알 입자들 사이로 작은 생명체 한 마리가 흘러가고 있다. 살아 움직이는 생물을 보고 ‘저 생물, 흘러가는구나.’ 하고 말하는 사람도 다 있냐며 코웃음 치겠지만, 그건 이 생명체가 발견되기 전까지의 생물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처음 한 달간은 아무도 이것이 생명체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요즘 길을 가며 주위를 주의 깊게 보는 사람들이 드물 뿐더러, 설령 이것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어른들은 그것이 그저 새로 나온 장난감이겠거니 생각하며 아이가 저 새로 나온 장난감을 사달라며 성가시게 할 생각에 얼른 눈길을 돌려버렸으며, 아이들은 쉴 새 없이 무언가를 하느라 새로 출시된 고퀄리티 장난감으로 추정되는 그것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던 중 드디어 한 남자에 의해 그것은 포착되었고, 고급 사진기에 찍히기까지 했다. 그것은 내심 자신을 알아봐준 사람이 있어 반가웠던지, 도망가지 않고 셔터 소리가 날 때마다 조금씩 포즈를 취하는 듯도 보였다. 남자는 그것을 앞, 뒤, 좌, 우로 찍은 네 장의 사진을 첨부한 기사를 부리나케 올렸으며, 사람들은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망을 통해 금새 그 기사를 보게 되었다.

한 사원은 업무 시간 중 몰래 ‘상사 엿 먹이는 법’을 검색하다 기사를 발견하고는 유레카를 외쳤고, 휴가 나오던 군인은 괴생명체인 그것의 존재를 알고 군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사람들은 각각의 상황에서 각각 다른 생각으로 그것을 맞이하였고 그중에서도 그것을 보고 가장 긴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생물학 박사들이었다.

박사들은 새로운 생명체의 발견에 너도 나도 그것의 정체를 밝히려 온갖 노력을 쏟아 부었으나 결국 그것을 밝혀내는 일을 서로에게 떠밀기에 급급하게 되었다. 박사들 중 그 누구도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내지 못하였고, 사실대로 ‘최선을 다 해 연구를 하고 조사 하였지만 저것의 정체를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기에는 박사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박사들조차 그것에 대해 알아내지 못할 만큼, 그것은 참으로 기이한 생명체이다. 현재 존재하는 모든 채집기구를 동원해 그것을 잡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것은 현재 기술로는 잡을 수 없는, 인간보다도 한층 앞선 진보된 신생명체인 것이다. 눈에 보이나 손에 잡을 수가 없으며, 유유히 흘러가다 누가 잡으려하면 바로 미끄러져 빠져나와버리고 입체감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움직이는 것도 확실하나, 마치 기체인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구멍이라도 빠져나오기 때문에 한곳에 머물게 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 그것이 지렁이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하여서 이후 많은 사람들도 ‘지렁이’라고 불렀다.

항간에는 정부에서 지렁이를 잡기 위한 기구를 만들기 위해 온갖 인력과 예산을 투자하고 있다는 소문도 떠돌아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으나 그게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언제 개발될지 장담하지 못하므로,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으나 모든 ‘핫’한 이슈들이 그렇듯 그것도 사람들에게서 점점 잊혀져갔다.

 

*

 

세계화, 지구촌 시대에 걸맞는 인재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미 알맹이 빠진 쪼그라든 포도껍질 같은 구인력을 교육시키느니 당도 높은 알맹이로 꽉 찬 신인력을 데려오겠다는 회사의 취지 때문에, 실적이 가장 낮았던 나는, 실직자가 되었다.

 

“2100원요.”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계산대 구석에 펼쳐놓은 영어 단어장을 보며 무신경하게 말했다. 뭐 이런 무례한 알바자식이 다 있냐며 화가 났지만 이것도 일종의 지구촌, 세계화 시대에서 앞서나가기 위한 편의점의 전략인가 싶어 울적한 마음을 숨긴 채로 지갑을 꺼냈다. 지갑에는 천 원짜리 한 장과 백 원짜리 동전이 여덟 개 있었다. 300원이 모자랐다. 어쩔 수 없이 신용카드를 내밀었는데 카드를 기계에 긁자마자 삐삐삐 소리와 함께 ‘사용 할 수 없는 카드입니다.’ 하는 소리가 났다. 다른 카드들도 마찬가지였다. 편의점 안은 계속해서 삐삐삐 소리와 ‘사용할 수 없는 카드입니다.’ 하는 소리가 냉정하게 메아리쳤다. 내가 결제서류를 내밀 때마다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해오라던 과장의 얼굴이 떠올라 기계를 한 대 치고 싶었지만 슬슬 짜증이 난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알바생의 시선이 따가워 서둘러 바지주머니를 뒤적였다. 하지만 아무리 손을 휘저어보아도 손에 잡히는 거라곤 빈 담뱃갑과 성가시게 손톱에 끼는 보푸라기뿐이었다.

신라면 800원, 참치마요 삼각김밥 800원, 그리고 참치마요를 구입하면 단돈 500원에 살 수 있는 행사상품 써니텐. 이 세 가지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라면은 절대 안 된다. 신라면을 포기하자니 아무래도 오늘처럼 외로운 가슴에 시린 바람까지 불어대는 날엔 라면국물만큼 따뜻한 위로도 없다 싶었다. 그리고 사실 삼각김밥은 써니텐을 500원에 살 수 있는데다가 조금 모자란 듯한 신라면의 양을 채워줄 수 있기 때문에 계산대에 올려진 것이라 별 미련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삼각김밥을 포기하자니 써니텐을 500원에 구입할 수 있는 기회를 함께 버려야해 아쉽고 또 탄산 없는 라면은 다음날까지 속을 더부룩하게 하기 때문에 꼭 필요한데 행사가격에 가져갈 수 있는 물건을 제값을 내고 사자니 손해 보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겨우 이따위 것들 때문에 딜레마에 빠져 고민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한데 알바생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나를 비웃기까지 하는구나 싶어 알바생을 봤는데 이제는 알바생의 시선이 단어장이 아닌 스마트폰으로 옮겨가 있었다.

‘뭘 보길래 저렇게 히죽대는 거야. 살짝 서러워질 뻔 했잖아.’

결국 배가 많이 고픈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되어 써니텐을 빼고 라면과 삼각김밥만 계산했다. 참치마요를 사면 써니텐은 거저인 셈인데 고작 삼백 원 때문에 ‘거저’를 포기해야 했다는 사실에 비참해지는 느낌이었다. 알바생은 바코드를 찍을 때도, 내게 200원을 거슬러 줄 때도, 내가 가게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도 스마트폰을 보며 연신 히죽거렸는데 그 비웃음이 꼭 나를 향한 것 같았다.

터덜터덜 다 헤어진 슬리퍼를 끌며 힘없이 집을 향해 걷고 있는데 놀이터 그네에 어린 남자아이가 혼자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늦은 밤에, 늦가을의 차가운 바람을 막아줄 바람막이도 없는 뻥 뚤린 공간에, 그것도 요즘 한창 괴생명체니 뭐니 떠들어대는 흉흉한 시기에 어린 아이가 혼자 있다니. 잘 굴러가지 않는 내 머리도 이게 어떤 상황인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집에서 도망 나온 것이라던가 엄마가 잠깐만 있으라며 어딘가로 갔는데 그 잠깐이 어쩌다보니 이렇게 길어진 것이라던가. 혼자 앉아있는 아이가 너무나도 외롭게 느껴졌다. 아이의 또래 친구들은 모두 가족의 품 안에서 잠들었을 이 시간에 혼자 찬바람을 맞으며 앉아있는 모습이 꼭 나를 보는 것만 같아 갑자기 아이를 못 본 채 지나가면 안 될 것 같았다. 혼자 사는 집에 가봤자 할 것도 없고 마침 심심할 예정이던 차에 아이가 걱정도 되고 해서 아이에게 다가갔다.

“얘, 꼬마야. 왜 아직까지 집에 안가고 있는 거니?”

아이가 듣지 못한 건지 못 들은 척 하는 건지 계속 앞만 응시하며 내 말에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꼬마야, 아직 몸이 어려서 잘 못 느끼나본데 추운데서 이러고 있으면 감기 들어요. 감기 들면 콧물나지, 콧물 나면 여자친구들이 다 너 싫어한다, 응?”

여전히 나를 보지 않고 앞만 보았다. 혹시 겁을 먹은 건 아닐까.

“저기, 이 아저씨가 사정이 조금 생겨서 깔끔한 얼굴은 아니지만 말이야, 그래도 이 아저씨가 어린이를 정말 사랑하는, 그런 착한 아저씨에요. 써니텐 하나에 마음 아파하는 여린 사람이란다, 꼬마야.”

써니텐 생각에 다시 살짝 울적해지려는데 아이가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몇 시냐고? 지금 열두 시 넘었지. 벌써 동대문도 문 닫고 남대문도 문 닫았어. 그러니까 너도 현관문 잠기기 전에 얼른 집에 들어가거라.”

“시간이에요. 시간. 내 시간들이에요.”

무슨 생뚱맞은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며 소년의 눈을 봤는데 순간,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소년의 눈은 앞을 보고 있지만 초점은 머리 뒤로 맺혀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섬뜩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이내 소년의 눈이 굉장히 맑고 깨끗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그 어떤 것에도 오염되지 않은 물처럼 깨끗한 소년의 눈에 매료되어 한참을 보는데 발에 한기가 들었다. 뭔가 싸한 느낌이 들어 발을 내려다봤더니 ‘지렁이’가 흘러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지렁이는 소년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렁이 노트#2

지렁이는 사람의 몸에서, 그것도 평범한 어린 남자아이의 몸에서 나왔다. 발견 당시 아이는 초등학교 저학년생으로 몸에 어떤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렁이가 소년의 몸에서 톡 하고 튀어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바람이 부는 것처럼 느낄 수는 있으나 눈에 보이지는 않게 흘러나와서, 흘러다녔다. 그래서 그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더 징그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렁이가 사람의 몸에서 나온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식었던 지렁이는 다시 ‘핫’해졌고 지렁이의 공급원인 소년은 지렁이보다도 더 관심을 받게 되었다. 사람들은 소년이 혹시 외계인인 것은 아닐까하고 의심했다. 하지만 소년은 그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평범한 소년이었다. 게다가 지구를 침략하러 온 외계인이라면 불시착의 충격으로 어딘가에 고장이 나지 않은 이상 이렇게 대놓고 자신의 개성을 뽐내고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특히 박사들이 이 소년의 출현을 매우 반겼는데, 드디어 지렁이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소년은 박사들에게 저번에 구겨진 자존심과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박사들은 자존심을 회복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의 생물학 연구 인생에 큰 회의감을 느끼게 되었고 일부 늙은 박사들은 퇴임을 조금 앞당기기도 하였다. 소년을 데려가 연구도 하고 조사도 하였지만 현재 기술로 얻을 수 있는 자료라곤 소년이 그저 아무문제도 없는 건강한 어린이라는 사실 뿐이었기 때문이다. 소년에게서는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또 다시 지렁이의 ‘핫’한 열기는 식어갔고 소년을 향한 관심도 차츰 가라앉았다. 가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케이블 방송에서 소년을 취재하러 오긴 했지만 그들이 얻어간 장면도 소년이 그네에 가만히 앉아만 있는 모습이 대부분이라 방송에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소년도 잊혀져갔다. 하지만 지렁이는 소년의 몸에서 끊임없이 계속 흘러나왔고 소년은 항상 멍하게 어딘가를 보는 듯 했는데, 그 시선은 마치 심연을 향해있는 것 같았다.

 

*

 

라면에 물을 부어놓고 삼각김밥을 뜯으며 놀이터 소년에 대해 생각했다. 회사도 잘리고 마땅히 당장 얻을 직장도 없는데 저 특별한 아이를 활용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날이 창창한 어린 아이를 팔아먹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지만, 잘만 하면 큰 돈을 벌 수도 있는 거였다.

라면을 먹으면서도 놀이터 소년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래도 써니텐 없이 먹는 라면은 느끼하다는 생각과 함께, 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잘만 쓰면 작가 데뷔라는, 팍팍한 삶에 치여 잊고 있던 꿈도 이룰 수 있는 거였다. 마침 아까 거슬러받은 200원이 굴러다니는 게 눈에 보였다.

 

“꼬마야, 다시 말하지만 이 아저씨가 당장 눈으로 보기에는 좀 그럴지 몰라도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떡진 머리 때문에 아무렇게나 눌러쓴 낡은 모자, 목 끝까지 채운 트레이닝복, 그리고 아이 앞에서 막대사탕을 달랑달랑 흔들며 아이의 환심을 사려는 모습은 누가봐도 수상할 것 같긴 했다.

“너 혹시 포도맛이 싫으니? 내가 그래도 오렌지맛 살려다가 오렌지맛은 잘 안팔리는지 빽빽하게 꽂혀 있길래 하나 남은 걸로다가 골라 온건데. 넌 오렌지가 더 좋으냐? 어떻게 된 게 넌 요즘 애가 트렌드를 따를 줄을 모르니, 트렌드를.”

아이는 여전히 앞만 응시하고 있다.

“꼬마야, 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본데, 이 빌어먹을 세상이란 데가, 다른 사람들한테 맞춰서 살아야하는 그런 데야. 너 편의점 가서 오렌지맛 뽑아 내밀면 알바생이 비웃는다, 너?”

아이가 또 중얼거린다. 시간이야, 시간. 영혼 없이 중얼거리는 아이 옆에는 아무래도 유괴범이라기에는 뭔가 어색해 보이는 내가 한쪽 겨드랑이에는 수첩을 끼고, 한쪽 손으로는 추파춥스를 흔들고 있었다. 이 아이를 소재로 소설을 한 번 써보겠닾시고 아이를 인터뷰하러 나온 것이었다.

“그래, 좋아. 아저씨가 다음엔 오렌지 맛으로다가 사서 올게. 취향 참 독특하네. 그리고 넌 그 흔한 폰도 없냐? 시간은 자꾸 왜 물어, 시간은.”

오늘은 그만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등 뒤에서 아이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저씨는 제 시간이 필요하신 것 같진 않네요.”

시간을 돈처럼 빌려주고 이자놀이라도 하는 건가. 취미도 특이한 아이다. 처음으로 제대로 말을 해준 아이가 반갑기도 하고 내 속셈을 알아차린 것 같아 뜨끔하기도 했지만 아이가 자꾸 시간타령을 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다시 아이에게 갔다.

“남아도는 게 시간인데 어린애 시간까지 가져서 뭐하겠냐. 근데, 필요하면 주는 거니, 네 시간?”

아이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얘네들이 다 제 시간이에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들어갔어요.”

 

지렁이 노트#3

지렁이는 계속해서 공급원인 소년에게서 흘러나오는데, 그 많은 지렁이는 다 어디로 가는 걸까. 이 물음의 답은 또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들어간다이다. 소년은 당시 지렁이를 자신의 시간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괴생명체를 쏟아내는 괴상한 소년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고 자꾸 지렁이를 쏟아내다 보니 아이의 기가 허해져서 헛소리를 해대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소년의 지렁이가 들어온 몇몇 사람들이 변화를 겪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사람들은 다시 소년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

 

소년이 한 말이 한동안 쓸 일이 없어 조용하던 머릿속을 간만에 시끄럽게 만들었다. 소년의 말에 의하면, 소년이 쏟아내는 정체불명의 지렁이는 소년의 시간이고, 소년은 그런 지렁이를 다른 사람에게 아무 조건 없이 나눠준다고 했다. 신기부천사의 등장인가. 아무래도 오늘 다시 소년에게 가봐야겠다.

 

“근데 한수엄마, 쟤 어느 집 아인지도 모른데요?”

“형서엄마네 옆집 사는 애라는데, 아무도 그 집 사정을 모르나 봐요.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그 집에서 사람 소리 들린 적이 한 번도 없다나 봐요.”

한 손에는 수첩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추파춥스 오렌지맛을 두 개나 들고 아이에게로 가는데 소년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 멈춰 섰다.

“이러다가 집 값 떨어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긴 머리를 한 갈래로 높게 올려 묶은 여자가 말했다.

“그럴 일은 없을걸. 내가 형서 엄마한테 들었는데 쟤가 무슨 새로운 자원인가로 주목받고 있어서 여기에 지하자원이 묻혀있을지도 모른다, 뭐 이런 얘기 때문에 오히려 오를거라던데?”

긴 머리의 우려스러운 말에 짧은 커트머리에 썬글라스를 낀 여자가 말했다. 그때 노란색 유치원 승합차에서 노란옷을 입고 노란가방을 멘-아이가 가방을 메었다기보다 가방이 아이를 멨다고 하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았다-아이 두 명이 내렸다.

“민경이, 한수, 배꼽에 손! 안녕히 가세요, 사랑합니다!”

엎드려 절 받기로 아이들에게 깜찍한 하트인사를 받은 유치원 선생은 흡족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엄마들에게 눈인사를 한 후 노란 승합차에 다시 올라탔다. 아이의 손을 잡은 긴 머리와 썬글라스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계속 이야기했다.

엄마들의 이야기가 길어질 거라는 걸 예상했는지 여자아이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풍선껌을 꺼내 씹었다. 남자아이가 그 모습을 부럽다는 듯 뚫어져라 쳐다봐서 마지못해 남자아이에게 풍선껌을 주자 남자아이는 얼른 껍질을 까서 바닥에 버리고 껌을 입에 넣었다. 처음에는 얌전히 껌을 씹더니 단물이 빠질 때까지 엄마가 수다삼매경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자 이번에는 껌을 뱉어 손가락으로 늘렸다 줄였다 하며 껌을 가지고 놀았다. 이내 껌을 가지고 노는 것도 재미가 없어졌는지 남자아이는 엄마의 옷을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엄마, 수술해서 밖에 오래 있으면 안 좋댔잖아. 얼른 집에 가자아.”

“한수엄마, 수술이라니, 어디 아팠어요?

당황한 썬글라스가 무슨 소리하는 거냐며 남자아이의 머리에 꿀밤을 주려하자 남자아이가 여자아이 쪽으로 도망쳤다. 그때 남자아이의 손에 있던 껌이 여자아이의 머리카락에 붙어버렸고, 여자아이가 울음을 터뜨려버리자 안 그래도 당황했던 썬글라스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그 상황을 계속 보고 있기가 좀 민망해서 아이에게로 갔다. 아이는 여전히 혼자 그네에 앉아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근데, 너 이름은 뭐니?”

아이는 대답을 하기가 싫은 건지 계속 앞만 봤다.

“그래, 뭐 요새는 개인정보다 뭐다 말이 많아서 말이지. 다 이해한다. 그나저나 이 아저씨가 오늘은 오렌지 맛으로 두 개나 뽑아왔다는 거 아니냐! 하나는 꼬마 네 꺼, 하나는 내 꺼.”

막대사탕 두 개를 내밀자 아이가 힐끔 쳐다봤다. 하지만 이내 다시 앞을 쳐다봤다. 거 참 비싸게 구는 꼬마다. 주황색 껍질을 까서 알맹이를 입에 넣어 돌돌 돌리며 아이에게 말했다.

“근데 아저씨가 시간이 좀 궁해져서 그러는데, 시간을 어떻게 준다는 거야?”

사실 저 이상한 지렁이들을 내 몸에 넣을 생각은 없다. 시간이 모자라지도 않을 뿐더러 검증되지 않은 이상한 것을 몸에 함부로 넣었다가 무슨 부작용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관심이 있는 것처럼 말해야 아이가 말해줄 것 같아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저절로 가는 거예요.”

아이가 여전히 앞을 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저절로 간다니?”

 

지렁이 노트#4

지렁이는 소년의 몸에서 소년이 의도치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온다. 마치 사람의 몸에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땀이 흘러나오듯. 지렁이, 즉 소년의 시간은 넘쳐나기 때문에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그것들은 그것들이 부족해 안달이 난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간다.

 

*

 

“사람들은 모두 시간에 미련이 많아요. 하지만 모두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같지요.”

“너는 시간에 미련이 없니?”

“저는 시간이 너무 많아서 시간들을 몽땅 다 버려버리고 싶어요. 마치 저렇게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시간이 다 제 몸으로 들어와 버린 것 같아요.”

“누가 들으면 욕한다, 너? 당연히 시간이 많으면 좋은 거지.”

아이가 원망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여전히 고개는 정면을 향한 채로.

“아저씬, 하루 종일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그 하루가, 하루가 이미 지났는데도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면 그래도 시간이 좋을 것 같아요?”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아이가 드디어 마음을 열었나 싶어 좋아했는데, 알 듯 모르겠는 말을 끝으로 다시 앞만 보며 입을 다물었다. 집에 돌아와 할 일이 없어 텔레비전을 켰는데 ‘궁금한 이야기 how’가 방송되고 있었다. 오늘의 소제목은 ‘시간을 달리는 소년’. 뭐 저런 촌스러운 제목으로 시청률을 끌려는지 한심하다고 생각하며 채널을 돌리려는데, 소년의 뒷모습이 나왔다. 그리고 제보자와 몇몇 ‘지렁이 경험자’의 인터뷰 장면이 나왔다.

 

*

 

저도 처음에는 이상했죠. 무슨 병에 걸리는 건 아닐까, 병원에 가봐야 하나. 그런데 정말로 시간이 늘어나는 느낌이었어요. 전보다 여유로워진 것 같고. 근데 이것도 내성 같은 게 있는지 시간이 늘어난 것 같기는 한데 다시 처음처럼 시간이 빠듯해지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게 되었어요. 왜 그런지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지금은 저 지렁이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시간 동안 스트레스 받아야 하는 지경이에요. 이거 뭐 어디서 사온 것도 아니라, 어디 가서 하소연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해서 피디님 프로그램에 제보 드린 거에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밝혀주세요. 네?

 

아 XX. 진짜 저 소름 돋는 XX 때문에 내가 아주 하루하루 죽을 맛이에요. 아직 어린애라서 감방에 못 넣는 게 XX, X나게 화가 난다고요, 네? 저 XX어떻게 좀 해주세요, 피디님.

 

시간이 필요하냐고 묻더라구요. 제가 진짜 바빴는데 그게 얼굴에 쓰여 있나 싶어서 좀 창피하기도 하고, 어린애가 신기한 말을 하니까 귀엽기도 하고 해서 그 아이한테로 다가갔는데 인터넷에서 본 그 지렁이가 놀이터 흙에 쫙 깔려 있는 거예요. 처음엔 좀 놀랐는데 그래도 그 지렁이 때문에 피해 입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일단 폰부터 꺼냈죠. 사진 찍으려구요. 제 얼굴이랑 지렁이랑 카메라에 잘 안 잡혀서 자세랑 카메라 각도를 조절하고 있는데, 갑자기 몸이 싸한 거에요.

 

그기. 지렁이가 막 내 몸에 들어와뿠다고. 응 그래그래. 그기 막 쑤시고 들어오는 게 아이라, 그냥 뭐 스프레이 뿌린 거마냥 확 스며든다카이. 아니아니, 아무 느낌도 안 든다니까? 그냥 흘러 들어와뿌요, 금마들이.

 

*

 

방송이 나오자마자 인터넷은 몇 번 뜨거워지고 식고 했던 소년과 지렁이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핫’해지고 있었다. 이번의 열기는 저번과는 조금 달랐다. 내일쯤이면 기자들이 놀이터를 가득 채울 것이다. 예상치 못했던 방송 때문에 내 소설 계획도 무산되어버렸다.

 

소년은 방송에서, 그것도 시청률 잘 나오는 공중파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허락도 없이 마구 떠들어댔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앞을 응시하며 지렁이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아저씨가 오늘은 사탕 안 사왔다. 별 맛도 없더구만, 오렌지맛.”

사실 내 마지막 희망이었던 너를 누군가가 먼저 가로채가서 속상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저씨.”

아이가 나를 먼저 부른 것은 처음이어서 조금 반가운 마음이 들어 얼른 대답했다.

“응? 왜 그러냐. 니가 날 먼저 부르기도 하고.”

“사람들은 어느 순간 정신 차려보니 갑자기 너무 많은 시간이 들어와 있어 어디서 째깍여야 할지 혼란스러워 해요. 결국 그 시간들을 끌어들인 건 자기 자신인데,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할 만큼 정신이 없나 봐요. 사람들은 너무 많은 시간 속에 살아가고 있고, 또 너무 많은 시간들을 놓치고 살아가요.”

무슨 말인가 생각하고 있는데 생각을 다 하기도 전에 다시 말을 이었다.

“시간이에요. 시간. 저는 시간이에요. 저들이 놓쳐버린 시간이에요.”

 

지렁이 노트#5

소년의 이야기가 방송에 나간 뒤로 소년은 모습을 감춰버렸다. 아직 연구의 마침표를 찍으려면 멀었는데 갑자기 소년이 행방불명되자 일부 박사들은 안타깝다기보다는 차라리 잘 되었다는 반응이었다. 소년이 갑자기 사라지자 ‘지렁이 소년 외계인설’은 다시 큰 지지를 얻기 시작했고, ‘지렁이 소년’을 그리워하고 응원하는 팬카페도 생겨났다. 전하고자 한 메시지를 남기는 것에 성공하자 ‘공익 외계인’ 소년이 지구를 떠난 것이라는 거였다.

하지만 이 노트의 집필자인 나는 소년이 외계인이다 뭐다 하는 이야기가 다 헛소리임을 안다. 소년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넘쳐나는 시간들을 증오하며, 또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는 시간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며 지렁이를 흘려보내고 있을 것이다. 어딘가, 저 너머를 바라보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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