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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청소년온라인백일장 예심통과 작품입니다-배송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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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2,958회 작성일 14-10-10 19:12

본문

소설/배송문

고민카페

 

 

-1-

1인 카페

-고민을 들어드립니다.

예약제 운영

시간 상담 010.8822.4858

 

-2-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기 위한 1인 카페를 개업한 지 벌써 3년이다. 카페를 운영하면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대화가 끝나면 곧장 한강으로 가서 떨어져 버리겠다는 사람도 있었고, 키우던 강아지가 죽어버렸다, 한마디 해 놓고는 남은 상담 시간 내내 울다가만 간 여자도 있었다.

나는 전문 상담가가 아니다. 손님과의 상담이 시작될 때 나는 항상 한 장의 종이를 건넨다.

저는 당신에게 해결책을 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죽겠다고 했을 때 저는 말릴 수도 없습니다. 당신이 제 앞에서 울 때, 어쩌면 저는 그 눈물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사연 끝에 한마디 코멘트도 달아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제가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묵혀 두었던 말들을 들어주는 것, 그리고 잊어버려 주는 것, 당신이 주문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같이 있어주는 것. 그것 밖에 없습니다.

전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당신 가슴에 묵혀진 응어리를 녹여낼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습니다. 여기 내려놓는다면 들어주겠습니다. 말하기 전보다 가벼워질 거라고, 저는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왔다.

 

-3-

그 저번에, 토요일 날에 예약했던 사람인데. 고민을 들어주신다고 해서요. 맞나요? 네. 아. 저는 민트초코 프라프치노로 주문할게요. 제가 쓴 커피를 못 마셔서요.

아, 감사합니다. 커피. 맛있네요. 어.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편하게 얘기. 네. 노력해 볼게요.

그러니까 일주일 전의 일이었어요. 지난 주 내내, 유난히 추웠잖아요. 겨울의 그 하늘엔 밀가루 같은 눈송이들이 바람을 타고 오르내리며 가볍게 휘날렸었죠. 벚꽃이 휘날리는 것처럼 그들은 반짝였어요. 메스컴에서는 46년 만의 혹한이 찾아왔다고 떠들어대고, 사람들은 바람이 살을 에다 못해 뼈마디 깊은 곳에 박혀오는 것 같다 불평했어요. 저는 지난 주 내내 겨울의 눈보라가 견딜만 하다고 느껴졌던 것은 올해가 처음이었다,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 날씨 속에서 저는 10년 전 집나갔던 엄마를 찾았고, 또 그 엄마를 묻었어요. 눈보라 속을 걸어가며 저는 휘청거리곤 했어요. 눈보라 때문이 아니었어요. 눈보라가 견딜만 하다고 느껴졌던 것은 정말 그 해가 처음이었어요.

인생을 책에 비유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어요. 그 때 저는 제가 그려나가야 할 책, 그 가장 첫 페이지를 장식했을 말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15살 때, 엄마가 집을 나갔어요. 그 때까지 모두 기러기 아빠인 줄로만 일고 있었던 옆집 노총각과 함께였어요.

그 남자는 옆집 이층에 세 들어 살고 있던 남자였어요. 웃기게도 그는 단 한 차례도 본인의 입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낸 적이 없었어요. 항상 덥수룩한 수염을 트레이드마크처럼 달고 있던 남자였지요. 그는 가끔 러닝셔츠 차림으로 옥상에 올라 담배를 피곤했어요. 그가 먼 하늘을 향해 담배 연기를 뿜을 때 그의 한숨이 구름이 되어 날아가는 듯한 환상이 보이곤 했어요. 그를 기러기 아빠라, 맨 처음 명명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한 번도 입 밖에 꺼내본 적 없었지만 저는 왠지 답을 이미 알고 있는 것만 같아요. 간혹 김치 같은 것들을 새로 담갔을 때, 또는 새 반찬을 만들었을 때면 엄마는 나를 시켜 그에게 반찬들을 전달하곤 했지요.

타지에 있을 가족들 혼자 부양하느라 얼마나 힘들겠니?

반찬 뒤 부록처럼 딸려 오던 엄마의 그 측은한 음성이 HD카메라로 녹화된 영상처럼 생생해요. 그들이 사라진 후 집주인의 연락을 받고 놀라서 달려왔던 그 총각의 어머니, 골목 한 구석에 오래 방치해 두어 표면이 거칠어져버린 상자 같은 사람. 그 메마른 입 껍질에서 그의 나이, 그가 미혼이었다는 사실이 처음 흘러 나왔어요.

일곱 살이나 어린놈이랑!

인류 최초의 비밀인 양 귓바퀴에 내려앉은 말들이 레버를 당겨 아빠를 미치게 만들었어요.

일곱 살이나 어린놈이랑 엄마가.

내 레버는 잠시 동요했지만 당겨지지는 않았어요. 열두 살이나 어린 엄마와 결혼한 아빠였어요. 그럼에도 아빠는 술만 마시면 엄마를 때렸어요. 한마디의 말도 없이 주먹을 내지르던 그 시간의 공기는 항상 섬찟함을 동반했어요. 그 주먹이 저를 향했던 적은 그 전은 물론 그 후에도 단 한 차례도 없었지만 그 곳에 존재할 때면 저는 언제나 이미 맞은 것만 같았어요.

그냥 이혼하라고 말했어요.

엄마는,

아빠는 불쌍한 사람이야, 라고 말했었어요. 할아버지가 그렇게 할머니를 때렸다고 그랬어요. 도박으로 그나마 없던 논, 밭 다 팔아먹고도 할머니가 품 팔아서 푼돈이나마 얻어오면 그 돈을 다 뺐어들고 술판으로 나들이 가시곤 했어요. 그 통에 아빠랑 큰아빠는 중학교도 못 갔어요.

국민학교 겨우 졸업하고 새벽 차 타고 상경했대요. 신발공장, 가방공장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세 동생을 고등학교까지 다 보냈어요. 그래서 엄마는 아빠를 불쌍한 사람이라 명명했어요. 엄마는 그런 불쌍한 아빠를 더 불쌍하게 만들 수 없다고 말했어요. 저는 엄마가 불쌍한 아빠를 더 불쌍하게 만든 나쁜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때 이미 엄마에겐 견딜 구멍이 있었을 거야,

저는 안도했어요. 안도감 끝으로 서운함이 손과 발이 작은 사생아처럼 딸려왔어요. 저는 신경 쓰지 않는 척 했어요.

미쳐버린 아빠는 그날 밤 술에 거나하게 취한 채로 운전대를 잡았어요. 도로는 휘청휘청거리며 아빠를 슬슬 위협했을 거예요. 그 위협을 놀림이라 받아들인 아빠는 약이 올라 빨개진 얼굴로 거칠게 운전대를 잡았을 거예요. 동그란 운전대가 교수형의 밧줄처럼 보이는 날이 있다고 들었어요.

이 길로 쭉 달려가면 그들이 있을 거야,

길은 고무줄처럼 늘어지고 줄어들며 아빠를 유혹했어요. 휘었다 곧아졌다. 빠른 변혁에 발맞출 수 없었던 그는 끝내 도로를 벗어나요. 도로를 벗어나 검어진 물결에 몸을 던져요. 그의 임종을 저는 보지 못했어요. 그가 남긴 육신의 마지막 손조차 저는 잡아보지 못했어요.

그런 아빠도 아빠냐고 묻는 사람이 있겠지만 제게 아빠는 엄마와 똑같은 아픔이었어요.

치밀하고도 잔인한 여자야.

저는 그 때 엄마를 그렇게 명명했어요.

저는 곧 고모집으로 보내졌어요.

작은 고모는 원래부터 저와 엄마를 싫어하던 사람이었어요.

어린년이 집에 들어와서 오빠 등골이나 빨아먹고 살아,

어느 명절에는 정말 그런 말을 내뱉은 적도 있었어요. 당신이 그렇게 사랑하는 작은 오빠 등골 빨아서 그 시절에 여고까지 졸업했던 그녀였어요. 우리 엄마에 대한 그녀의 묘한 열등감은 때론 저를 향했어요.

지현이는 참 예뻐, 채은이랑 성씨가 같은데도 왜 이렇게 다르게 예쁜지 몰라.

저와 동갑인 작은 집 딸과 대놓고 차별을 하기도 했어요. 아무도 보지 않고 있을 때, 밉다고 저를 일부로 꼬집는 일도 다반사였지요.

큰 고모는 세 번의 이혼 끝에 친가와 연을 끊고 서울이라는 큰 사막에 숨어 버린 지 오래였어요. 작은 집은 반 지하 단칸방에 식구 다섯이 살고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고, 할머니도 제가 3살 때 이미 돌아가셨어요. 엄마가 자취를 감춰버린 판국에 외갓집 식구들이 저를 받아줄 리는 만무했어요. 안 그래도 나이 많고 능력 없는 아빠를 싫어하던 외가였어요. 엄마가 집을 나간 이후 일체의 연락조차 하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그 집에 들어간 것은. 저는 거의 식모처럼 살았어요.

공부를 꽤 잘 했었어요. 그러나 인문계에 진학할 수는 없었어요. 학교가 파하면 곧장 집으로 돌아와 청소와 빨래와 식사준비를 해야 했어요. 고모는 여왕처럼 쇼파에 앉아 하인처럼 저를 부렸어요.

 

요새 세상에 조카라고 부모 잃은 고아새끼 다 받아주는 거 아니다. 먹여주고 재워주면 심부름이나 잘 해.

아빠 살아생전에는 큰 소리 한 번 못 내고 살았던 고모부는 제가 그 집에 온 첫 날 위압적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어요. 호랑이 같이 느껴지지는 않았어요. 그냥 덩치 큰 곰인 척 하는 까치발 들은 여우처럼 보였어요. 그렇게 저를 위안하고 살았어요.

제가 다니던 상업고등학교에는 컴퓨터 디자인과, 콜마케팅과와 유통정보과가 있었어요. 저는 콜마케팅과를 졸업했어요. 졸업하고 저는 보험회사에 취직해 텔레마케터가 되었어요.

꿈을 포기했었던 것은 그 때 부터였어요.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어요. 작가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도서관의 사서나, 국어선생님처럼 책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싶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꿈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겠어요? 고아에, 고모집에 얹혀살면서 인문계 진학도 포기하고 겨우 실업계 나온 20살짜리 여자애가, 어떻게 꿈에 대한 희망을 붙잡고 있을 수 있었겠어요. 그 때 너무 쉽게 포기했나 봐요. 저는 쉽게 운명에 순응했고, 소극적인 저를 운명은 쉽게 집어 삼킬 수 있었어요.

사랑합니다, 고객님,

그 다음 말이 채 흘러나오기도 전에 대부분의 수화기는 털컥, 창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끊겼어요. 수화기는 항상 벽처럼 느껴졌어요. 가끔 벽은 신세한탄을 늘여놓기도 했어요.

사랑합니다, 고객님,

했을 때, 그 다음 단어를 채 말하기도 전에

우리 아들놈이 자꾸 날 때려 그래도 어쩌겠어. 불쌍한 내 아들놈. 마흔이 넘도록 장가도 못 갔어.

말은 말에 꼬리를 물고 한참을 늘어졌어요. 그래도 끊을 수는 없었어요. 삼십분 동안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의 말을 들어주었던 날이었어요. 밉거나 귀찮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사랑합니다, 고객님,

아 거지같은 전화 또 오네. 귀찮게..

뚜뚜뚜뚜...

그런 사람들이 미웠어요. 문을 거칠게 닫는 사람들. 그 일이 있었던 날 이후 제겐 문을 조심히 닫는 버릇이 생겼어요. 소리 나게 쾅, 거칠게 문을 닫는 사람들을 증오하기 시작했어요. 싫은 소리는 그것뿐만이 아니었어요. 매일 반복 되는 부장의 똑같은 잔소리.

채은씨 실적이 안 느네? 이만큼 근무했으면 이제 프로 아니야? 근데 왜 이래? 대학도 못 나온 걸 채용해 줬으면 열심히 해야지.

하루 종일 나를 괴롭히던 수화기들은, 그 음성들은 막상 제가 그들을 필요로 할 땐 조용했어요. 독립한 이후 여덟 평짜리 원룸에서 살았어요. 주말 낮이면 사방의 벽이 침입자를 향해 조여 온다는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처럼 좁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그 방이 일을 마치고 돌아온 밤이면 사무치게 넓어 보였어요.

아무도 없는 사막에 홀로 떨어진 것처럼,

처음 지구에 상륙한 어린 왕자도 이런 기분을 느꼈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는 밤들의 반복이었어요.

제게 핸드폰이 없는 것처럼 아무도 제게 접속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던 밤이 지나면 다시 아침이 시작되었어요. 사랑합니다, 고객님. 그 지겨운 반복이 다시 또 다시 저를 옥죄여 왔어요.

엄마는 그 반복의 하나인 것처럼 돌아왔어요.

집을 떠났을 때처럼 갑작스럽게, 그녀는 세 번의 노크로 잠시 돌아왔어요. 10년을 긴 세월이라 생각 했었던 날이 있었어요. 그녀의 얼굴을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는 십년 전에 비해 조금 말랐을 뿐 전혀 달라진 게 없었어요.

나 곧 죽어.

그녀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정말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유방암 말기라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녀의 얼굴은 정말 늙었어요. 백석이 여승에서 ‘녯날 같이 늙었다’고 했었잖아요. 그녀는 정말 10년 사이에 ‘녯날’ 같이 늙어버렸어요. 통통하다는 인상을 가졌던 그녀였어요. 엄마의 가슴에 파묻힌 유방암은 젖이 이미 끊겨버린 샘을 나와 젖물 대신 살을 갉아먹으며 얼굴에 깊게 골을 새겨놓았어요. 엄마를 그렇게 만든 암이 간이나 폐에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게 저는 조금 마음에 들었어요. 제 유년이 묻어있을 엄마의 유방이 더 이상 말랑말랑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조금은 마음에 들었어요.

엄마는 항암 치료를 받지 않을 거라고 말했어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너에게 미안했다.

그녀는 말했어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고모 집에 있었던 그 시간들의 어느 곳에서도 엄마를 원망해 본 적은 없었어요. 그러나 괜찮다는 그 한마디로 제 일생의 힘듦을 놓아버리고 싶지는 않았어요.

물 같은 정적이, 우리를 흘렀어요. 그 때 우리 사이에는 카르마가 비눗방울처럼 떠다니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길었던 밤이 지났어요. 사방을 옥죄여 오는 벽도, 차가운 사막도 없었던 밤이었어요. 울음과 포옹이 있는 재회는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아침은 다시 돌아왔어요. 언제나처럼, 저는 출근을 하고 엄마는 돌아갔어요. 그 밤에 묻고 싶었던 말들이 많았어요.

엄마가 나를 버리고 선택했던 그는, 엄마가 이렇게 되도록 무얼 하고 있는지. 어쩌다가 이런 몹쓸 병에 걸리게 되었는지.

십 년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단 훨씬 더 긴 시간이었어요. 그 시간 동안 물보다 진하다던 피는 묽어지고 탁해졌어요. 자궁에 파묻혀 있었던 10개월의 시간이 무색할 만큼 멀어진 사이에는 따뜻한 양수 대신 차디찬 강물이 채워졌어요. 이승과 저승의 거리처럼 헤아릴 수 없는 그 사이를 깨달았을 때 10년의 시간의 크기를 알 수 있었어요. 엄마의 뺨에 새겨진 주름, 형편없이 말라버린 팔뚝과 배가 아니라. 그 추상적인 공간의 크기를 통해 저는 깨달았어요.

그 밤에 엄마는 구태여 말하지 않았어요. 저와 같은 이유였을 거라, 그렇게 생각했어요.

엄마의 죽음은 그 재회가 있고 이틀 후에 전화선을 통해서 알게 되었어요. 임종조차 보지 못한 죽음이었지만, 마지막 남긴 육신의 손은 잡아볼 수 있었어요. 엄마의 임종이 몌별처럼 느껴지지 않았어요. 엄마가 떠났던 그 날 밤에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어요. 순리고, 카르마다. 종교가 없는 저는 그렇게 되뇌었어요.

장례식은 저 혼자 도맡아 진행했어요. 엄마가 남겨둔 통장이 있었어요. 그 남자는 오지 않았어요. 엄마 슬하에 자식은 저 하나뿐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어요. 그 십년 사이 그녀가 성이 다른 동생을 품에 안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으니까요. 외가의 식구들은 십년을 통째로 지워버린 것처럼 굴었어요. 저도 십년을 잊은 것처럼 굴었어요.

완벽한 고아가 되었지만 삶에 끼어있는 힘듦은 아직도 남았는지. 부장은 여전히 잔소리를 재방송하고, 사랑합니다, 고객님. 하는 인사말을 받을 익명의 고객님들이 저를 대하는 태도는 여전했어요. 제 카르마는 언제쯤 저를 놓아줄 지, 유난히 무서워져요.

서른 둘이에요. 벌써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도. 아직, 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도 있는 애매한 시간이에요. 누군가는 이미 숙련된 항해사가 되어서 풍랑 없는 바다를 돛을 펴고 날듯이 유영하고 있어요. 찐득한 카르마의 늪에 빠져있는 저는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어요. 카르마, 그 지독한 카르마의 반복을 털어놓고 싶었어요.

 

-4-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이야기를 멈췄다. 그녀가 마시고 있던 민트 초코 프라푸치노 또한 이야기가 막을 내림과 함께 바닥을 보였다. 테이블의 어느 구석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눈빛이 아니라 나는 안도했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녀는 문을 나섰다. 나의 한마디 코멘트도 없이, 그렇게 상담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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