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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청소년온라인백일장 예심통과 작품입니다-김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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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2,684회 작성일 14-10-10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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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도망자들

김예나

 

 

내가 낯선 주소가 적힌 구깃거리는 종이를 받은 것은 오늘 정오였다. 선배 특유의 아이 같은 또박또박한 글씨가 아닌 급하게 쓴 티가 역력한 날림체였다. 중간에 펜이 잘 나오지 않아 애를 먹었는지 종이 구석엔 펜을 그어댄 흔적도 볼 수 있었다. 이 종이 한 장만 봐도 내가 얼마나 대단한 아이를 맡게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종이를 반으로 접고 다시 반으로 접어 지갑 속에 반듯하게 넣어 두었다.

내가 낯선 주소에 대한 전화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4시간 쯤 지난 오후였다.

“종이 잘 받았냐?”

나는 여자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전화기를 어깨와 얼굴 사이에 끼우고 통화하며 지갑에서 종이를 꺼냈다.

“네, ○○빌라 105동 202호 맞죠?”

선배는 그래, 잘 받았네. 라는 의미 없는 대답 후 그저 입만 쩝쩝거렸다. 불안할 때 나오는 선배의 버릇이었다. 한참을 쩝쩝거리던 선배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정운이 너, △△건축회사 알지?”

 

나는 버스에서 내려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았다. 5층짜리 낮은 빌라들만 모인 작은 마을. 하늘을 메운 빽빽한 전깃줄. 듬성듬성 깔린 보도블록 옆으로 방치된 채 쌓여있는 흙들. 때문에 바람이 불면 자연스레 주위가 누렇게 변했다. 나는 어릴 적 보았던 서부영화를 떠올렸다. 황야의 두 남자가 전면대결을 할 때면 어김없이 모래바람이 둘 사이에서 불곤 했었다. 나는 누런 흙바람에서 서부영화 속 그 장면과 같은 비장함을 느꼈다. 아까 선배와 했던 통화가 내 머릿속을 어지럽게 수놓았다.

-그 회사 사장한테 보민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나 봐. 근데, 그 아들을 거기다 방치해놓고 돈만 보내준다는 거야. 이거 완전 대박사건이지.

그렇죠, 대박사건이긴 대박사건이죠. 대박 위험한 사건. 나는 삐거덕거리는 블록을 밟으며 어두운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이번엔 좀 더 예전에 선배와 했던 통화를 떠올리며.

-이번에 내가 큰 걸로 물어다 줄게.

-큰 거요? 그게 뭔데요?

-왜, 무슨 큰 기업이라든지 고위 정치인이라든지 하는 사람의 아들딸을 조사하는 거야. 분명 걸리는 사람 있다고.

나는 사실 그 통화를 하며 집중하지 못했었다. 선배의 말을 듣자마자 아버지 생각이 났고, 아버지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느린 듯하지만 결코 느리지 않은 속도로 내 생각을 지배하셨다. 결국 선배의 말에 영혼 없이 대답하다 전화는 끊겼고, 나는 전화가 끊길 줄도 모르고 한참을 서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미 어두운 계단 앞에 도착해 있었다. 보통의 계단보다 조금 더 가파른 계단을 올라 마주보고 있는 두 집 앞에 섰다. 나는 터덜터덜 오른쪽 집 앞으로 갔다. 그나저나, 나보고 누구냐고 물으면 뭐라 대답하지? 사회복지사… 라고 하기엔 아직 대학교도 졸업 못했고. 너희같이 불쌍한 아이들을 돕는 천사 같은 대학생이지. 라고 하기엔 이 아이나 나나 비슷한 처지 같고. 나는 괜히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문을 두드리려 했다. 하지만, 옆에서 소리 없이 튀어나온 새하얀 손이 더 빨랐다. 놀라서 돌아 본 곳엔 새하얀 아이 한 명이 서 있었다. ○○빌라 105동 202호. 선배가 준 주소가 틀릴 리는 없었다. 남자아이치고 곱게 생기기는 했지만, 이 아이가 분명 보민이었다.

“네가, 보민이니?”

그래도 예의상 처음 봤으니 물었고, 아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응?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보연인데요.”

나는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서 있었고, 새하얀 아이는 나를 지나쳐 집으로 들어갔다.

 

그 날, 집으로 돌아가며 다음 날 날이 밝으면 바로 선배한테 따지리라! 하고 열을 냈지만, 막상 그 다음날이 되어 강의를 듣고 앉아있으니 선배에게 굳이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나 혼자 해결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연속으로 전공 강의를 6시간 듣고도 6초 만에 정신을 수습한 뒤, 씩씩하게 작은 빌라마을로 향했다.

하루 만에 다시 찾은 마을은 그곳만의 어둠이 더 짙어진 것 같았다.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이른 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덕분에 5분정도 일찍 도착할 수 있었고, 문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작은 빌라 창문 사이로 해가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주변이 적막으로 가득 찼고, 나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그러자, 남들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보민이는 없어요.”

나는 어둠 속에서 홀로 새하얗게 빛나고 있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의외로 아이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서서히 몸을 일으켜 아이가 문을 열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문은 열려 있었고 아이는 불쾌한 소리를 내는 문을 천천히 열었다. 나는 어제처럼 나를 지나쳐 사라지는 아이를 붙잡으려는 듯 말했다.

“나는 너를 만나고 싶어, 보연아.”

문을 열던 아이의 손이 멈췄다. 하지만, 순간이었고 아이는 다시 문을 열기 시작했다.

“들어가도 될까?”

아이는 자신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나를 굳이 막지 않았다.

집 안은 딱 두 가지뿐이었다. 침대와 쓰레기. 흡사 모세의 기적처럼 쓰레기 사이로 길이 보였다. 좁은 길을 따라간 곳엔 커다란 침대만 덩그러니 있었다. 전등은 나갔는지 집안은 온통 어두웠다. 아이는 침대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쓰레기더미에서 영어책을 꺼냈다. 그리고는 침대에 등을 기대고 쓰레기 사이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더럽고, 이렇게 춥고, 이렇게 어두운데. 나는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불을 켰다. 순간 아이가 비명을 질렀고 나는 놀라서 라이터불을 꺼버렸다. 아이는 커다란 침대 뒤로 숨었다. 아이가 공부하던 책에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더러운 필기와 그와는 반대되는 반듯한 밑줄이 가득했다. 나는 몸을 쪼그리고 앉아 침대 뒤에 숨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불은, 안, 돼. 불은, 다, 없애. 불이, 다, 가져, 갔어. 엄마도, 오빠도.”

부자연스럽게 툭툭 끊기는 문장이었지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쪼그리고 있던 다리를 펴고 바닥에 앉았다. 그랬구나. 작게 대답하며 아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이는 펜을 쥔 오른손으로 눈가를 슥 훔쳤다.

“우리, 집에, 불이, 났, 는데, 엄, 마가, 오빠, 대신에, 나를, 살, 렸어. 그래서, 아빠가, 엄마랑, 나를, 싫, 어해. 엄, 마는, 멀, 리, 보내, 버리고, 나, 보고는, 이, 제, 오빠로, 살랬어. 남, 보연, 이, 아닌, 남보, 민으로.”

아이는 소리 없이 울었다. 이제는 펜을 쥔 오른손과 자를 쥔 왼손까지도 눈가를 비비며 눈물을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이는 펜과 자를 놓고 두 손으로 아예 얼굴을 가렸다. 나는 이를 갈았다. 아버지가 생각났다. 내가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다 했을 때,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네가 가진 장점은, 네가 사내놈이라는 것 밖에 없어.

아버지도 만약 내가 딸이었으면, 사내놈처럼 살라고 이름마저 바꿔버리셨을까. 여전히 소리 없이 훌쩍이는 아이를 달래주고 싶어 손이 허공을 향해 뻗었다. 하지만, 이내 허무하게 내려져 대신 침대 시트를 쥐었다. 내가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저, 아이가 했던 것처럼, 담담하게 내 이야기를 해 주는 것뿐이었다.

“우리 아버진 교수셨어.”

아이는 시작되는 이야기에 몸을 흠칫 떨며 더 작게 웅크렸다. 커다란 침대의 그림자 속으로 자꾸 숨어 들어갔다.

“그래서 아버지는 나도 교수가 되길 원하셨어.”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이미 유명하셨고, tv에도 여러 번 나오셨다. 나는 매일같이 들어 지겨운 이야기를 아버지는 tv에서 또 하셨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거나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본인의 삶과 직업을 만족스러워 하셨고 장남인 나에게도 그런 삶을 강요하셨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이러고 있지.”

어느 새 두둥실 떠오른 달을 창 너머로 바라보며 비웃었다. 그 비웃음은 나를 향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갑갑한 품에서 벗어나 떳떳하게 잘 살겠다. 라고 소리치던 나는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도련님이었다. 아버지 말대로 만약 내가 사지 멀쩡한 사내놈이 아니었다면, 밤늦게까지 낡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봐 줘야 하는 이런 일을 할 수나 있었을까. 나는 담배 연기를 빨았다 뱉어내듯 깊게 숨을 들이마시었다 뱉어냈다.

“나는 집을 나왔거든.”

솔직히 말하면 도망쳐 나왔거든. 나는 차마 지우지도 못한 부재중 전화 알람을 떠올렸다. 하루도 잊지 않고 내게 전화하는 어린 동생을 버려두고 나 혼자 비겁하게 나왔거든.

“근데, 나도 버려진 거나 똑같아. 우리 아버지는 나를 때 되면 들어오겠지. 하고 방치해두고 계시거든. 아마도 아직 고등학생인 내 동생이 어른이 되면 완벽하게 버려지겠지만.”

나는 사실 변명을 하고 있었다. 쓰레기더미에 갇혀 학대받는 어린 아이에게 사실은 나도 너만큼이나 아파. 라며 도리어 네가 나를 알아주길 바라고 있었다. 아이는 침대의 그림자에서 조용히 벗어나 내게 살짝 다가왔다. 얼핏 보이는 왼손이 붉었다. 어찌나 자를 세게 쥐고 있었는지 손바닥은 빨갰고 손등에는 어딘가에 긁혔는지 피부가 까져 피가 맺혀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새하얀 손을 마주잡았다.

“아프지 않아? 아빠가 손 다친 건 알고 계시니? 자를 이렇게나 세게 쥐는데 말리지도 않으시고?”

아이는 오른손을 뻗어 펜과 자를 주우며 말했다.

“아빠는 제가 손 다친 거 꿈에도 모르실 거예요.”

많이 진정이 되었는지 이젠 울지도 않았고, 말도 더듬지 않았다. 나는 가방에서 밴드를 찾았다.

“아빠는 저희 집에 불 난 것도, 그래서 오빠가 죽은 것도 며칠이 지난 후에야 알았어요. 그런데 이런 작은 상처를 어떻게 알아요.”

나는 아이의 담담한 이야기에 대답 대신 손에 밴드를 붙여주었다. 이렇게 쉬운 건데. 아이는 내가 붙여준 밴드를 손으로 쓸었다. 그러면서도 손에서 놓지 않는 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렇게 자에 집착하는 거야?”

나는 자를 바라보던 시선을 천천히 영어 문제집으로 옮겼다. 정확하게 자로 그은 밑줄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아빠가 자로 밑줄을 긋지 않으면 필기가 더러워진다고 때렸어요. 아빠는 그것 때문에 제가 아프단 것도 몰랐을 거예요.”

나는 아이의 말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침착하게 펜을 빌렸다. 그리고는 문제집의 한 귀퉁이를 찢어 열한 자리 숫자를 적어 건넸다.

“내 번호야. 최대한 빨리 다시 널 찾을 거지만, 혹시라도 급한 일 있으면 먼저 연락해.” 아이는 자를 쥐지 않은 손으로 종이를 받아들었다. 세게 쥔 자에 다시 빨갛게 물드는 왼손이 안쓰러웠다.

 

아이는 불쾌한 소리를 내는 현관문을 직접 열어주며 나를 배웅했다. 나는 어두운 현관을 나와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며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도 역시 부재중 전화 한 통. 문득 웃음이 나왔다. 아이에게 밴드를 붙여주며 이렇게 쉬운 건데. 하며 이해하지 못했던 내가 참 어이없어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눈 딱 감고 동생한테 전화 거는 거. 그것도 참 쉬운 일인데. 나는 그 쉬운 일을 오늘도 내일로 미루려 화면을 까맣게 꺼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가파른 계단을 내려갔다.

밤늦게까지 과제를 한 뒤, 새벽을 달려 선배와 아이를 도울 계획을 짜고 잠시 눈을 붙였다. 잠이라기보단 기절을 하고 시체처럼 누운 지 1시간도 되지 않아 전화가 시끄럽게 울렸다. 처음엔 온몸을 비틀며 전화를 무시하려 했지만, 이에 반항이라도 하듯 끝까지 울리는 전화에 결국 몸을 일으켰는데 그 순간 전화가 끊겼다. 극도의 짜증을 느끼며 발신자를 확인하는데 요상한 번호가 찍혀 있었다. 공중전화? 순간 머리털이 빳빳이 서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내 주위에 공중전화를 쓸 만한 사람은 없다. 며칠 전 만난 새하얀 아이를 제외하고는. 나는 얇은 잠바 하나만을 대충 걸치고 서늘한 새벽 거리를 내달렸다.

가까스로 버스에 올라 타 자리에 앉으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마을을 전부 둘러 본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의 집까지 가는 길에는 공중전화를 보지 못했다. 그랬다는 건 마을 밖으로 멀리 나왔다는 얘기인데. 아무도 받지 않는 전화에 속이 타들어갔다. 그리고 순간 동생 생각이 났다. 아직 동생도 어린데, 무슨 일로 매일 나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나는 단순한 죄책감으로 전화를 피한 것인데, 동생에게는 정말로 내가 필요했던 건 아닌가.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던 건가. 복잡하게 얽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증식하는 생각에 비틀대며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가 바퀴를 굴리며 떠나자, 누런 흙바람이 일었다. 그리고 저번엔 차마 보지 못했던 공중전화가 건너편에 보였다. 나는 주위를 메운 누런 흙바람에게서 또 다른 비장함을 느꼈다. 횡단보도도 없는 도로를 건너 공중전화로 가 보았지만, 누렇게 흙이 낀 창문 너머로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급하게 도로를 건너 작은 빌라 마을로 달렸다.

새파랗게 물든 새벽의 서늘함도 느끼지 못할 만큼 달렸다. 성한 가로등을 찾기 어려운 어두운 마을을 가로질러 105동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겨우 숨을 몰아 쉴 수 있었다. 나는 가파른 계단을 두 칸씩 뛰어 올라 202호 앞에 다시 섰다. 노크할 새도 없이 문고리를 잡아당겼고, 여전히 어두운 집 안에는 여전히 소리 없이 울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무너져 길이 사라진 쓰레기 더미에 몸을 기대고는 울고 있었다. 이번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있었다. 그저 입술이 찢어지도록 깨물고 있을 뿐. 아이는 왼손엔 여전히 자를 오른손엔 내가 번호를 적어 준 종이를 쥐고 있었다. 나는 밀려오는 안도감에 미안함에 쓰러지듯 아이 앞에 무릎 꿇었다.

-쨍

쇠로 만든 자가 바닥에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이는 소리 내어 울며 나를 안았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아이가 자와 종이를 버리고 나를 안았다는 사실을 현관에 널브러진 자와 사뿐히 내려앉는 종이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 늦게,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내가 아이의 등을 살살 쓰다듬으며 달래기 시작하자 아이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오늘, 아, 빠가, 온대, 서, 무서, 워서, 전, 화 했, 어요.”

나는 몸을 떠는 아이에게 얇은 잠바를 걸쳐주고는 아이의 손을 잡고 낡은 빌라를 나섰다. 듬성듬성 박힌 보도블록을 따라 어두운 마을을 벗어나고 흙바람이 이는 정류장에 도착해서야 아이는 진정한 듯 울음을 그쳤다. 나는 아이와 나란히 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나는 사회 복지사가 되고 싶었는데, 아버지는 당연히 반대하셨어.”

내가 담담히 말을 꺼내자, 아이는 그저 내 손을 더 세게 잡아왔다.

“다른 건 다 참아도 그건 못 참겠더라. 그래서 도망쳤어. 집을 나왔다라기 보단. 도망이었어. 하지만, 나는 그건 정당한 도망이라 생각해.”

이번엔 내가 아이의 손을 더 단단히 쥐었다.

“그러니까 우리도 정당한 도망을 한 거야. 이건 잘 한 거야.”

혼자 두면 안 되는 아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혼자 가파른 계단을 내려와 버렸었다. 동생도, 이 아이도. 무서워하는 아이의 손을 잡고 같이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고, 같이 도망쳐주는 것은 절대로 어려운 일이 아닌데. 이렇게 쉬운 건데. 마침 집으로 가는 버스가 누런 흙바람을 일으키며 다가왔다. 역시 또 다른 느낌의 비장함이 나를 감쌌다. 약간 설레면서도 이제는 정말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비장함이었다. 나는 아이를 먼저 버스에 안전하게 태우고 뒤이어 올라타면서 어제 역시 지우지 못한 부재중 전화의 발신지로 전화를 걸었다. 역시 혼자라는 두려움 속에 소리 없이 울고 있을 또 한 명의 아이와 도망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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