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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서평/정령/한 발 한 발 내딛듯이 걷는 시적 성찰의 길


한 발 한 발 내딛듯이 걷는 시적 성찰의 길
― 이성필 시집 『한밤의 넌픽션』에 대하여


정령



1. 시는 안녕하십니까
걸음으로 인사를 건네는 시인이 있다. 시집 『한 밤의 넌픽션』을 수년 만에 냈다는 자연적 언어의 소유자 이성필 시인이다.


강물에 귀를 대고 누워 있으면 강물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강물 속의 것들의 소리가 들린다.
잡다한 소리 살아있음의 소리들 소리는 아아아 어어어로,
와와로 희야아로, 식사는 하셨습니까로 들린다.
내 시도 아아아에서 어버버를 지나쳐 안녕하십니까 라고,
이제 그나마 또박또박 몇 마디씩을 한다.


―「시인의 말」부분


시인은 걷기를 좋아하여 가까운 산을 산책하듯이 매일 걷는 사람이다. 늘 자연과 함께하는 시인의 심상이 드러나는 「시인의 말」을 먼저 들여다본다. 늘 새롭게 느끼며 인사했을 시인의 마음에 바람이 구부러진 길을 따라오며 꽃이 피고 흘러가는 강물에게도 몇 마디씩을 건네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의 시도 그러하다. 또박또박 한 자 한 자 정성을 담고 신중하게 담아 정중하게 내어놓은 표가 난다.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예찬』이란 책에는 ‘걷기는 몸놀림인 동시에 일종의 글쓰기가 된다’고 하였고, ‘걷는다는 것은 침묵을 횡단하는 것이며, 주위에서 울려오는 소리들을 음미하고 즐기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혼자 걷는 것에 대하여 많은 작가들의 걸음걸이에 소중한 인문학과 문학에의 길을 적어놓았다. 그러면서, 그들의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걷기행보에 대한 일화나 예를 들어 걷는다는 것이 단순히 걸음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닐 뿐더러 걸음으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사색의 일환은 글쓰기에 좋은 글감과 소재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놓았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성필 시인의 시편들은 저절로 글쓰기가 몸에 베인 듯 물 흐르듯이 심상을 자연과 함께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는 같이 움직이듯이 걸으며 친숙하게 다가온다. 마치 『걷기예찬』 속의 걷기를 즐긴 사람들―헨리 데이빗 소로, 장 자크 루소, 빅토르 세갈렌, 피에르 쌍소, 랭보, 스티븐슨, 그리고 일본 하이쿠 시인 바쇼―처럼 걷는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사랑했던 그들처럼 이성필 시인과 보행을 맞추어 걸어보려 한다.


내 마음이 시일 때
나는 출렁였다


내 마음이 출렁일 때
나는 시였다


그래서 어두운 날이
밝은 날보다 많았지


슬플 땐
기차가 지나간다


기차가 지나가서
슬프다


차단기가 내려진 철길
그 길에 내가


그런 길에
나는 늘 걸린다


 ―「기찻길 」 전문


시인은 늘 걷는다. 차단기가 내려져 걸리면 걸리는 대로 시인은 쉬지 않고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어두운 길을 헤쳐 나오며 시와 가까이 지내고 있는 일면을 보여주는 시다. 기찻길은 차단기가 내려지면 건널 수 없다. 시와 가까이 지내고 싶은데‘차단기가 내려져’건 널 수 없을 때 우리는 슬픈 것이다. 시인은 무덤덤하게 시가 안 써질 때의 자신의 슬픈 심정을 차단기가 내려진 이야기로 그리고 있다. 솔직하게 너무 솔직해서 한눈에도 슬픈 차단기를 빨리 걷어 올리고 싶게 만든다. 걸으면서 늘 시와 가깝게 지내려는 시인의 굳은 의지의 표현이다. 시를 한시도 놓지 않고 삶 속에서 몸에 베인 듯이 쏟아놓는 시인의 시에 대한 열정은 다음 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나른한 식당 오후 세시
잠시 누우려는 자세를 들킨다
유모차 발로 온 기역자 노인
순대국밥 일인분이 얼마냐고 묻는다
삼천 원어치만 먹을 수 없겠냐고
인정과 장사의 경계에서 오늘만 드린다 한다


유모차 발로 오신 앞니 두 개 노인
어기적 우걱 국밥 드시고 가고
식탁을 치우며 생각한다
저 노인 혹 돌아가신 엄마 환생 아닐까?


괜한 군소리를 달았구나


 ―「환상 같은」 전문


누구나 선행하기란 의외로 쉽지가 않다. 선한 마음을 곡해로 시작하여 오해하기까지 순간의 만감이 흐르는 감정경험을 해본 사람으로서는 제목처럼 환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의 삶 속에 들어온 ‘기역자 노인’은 시인의 마음속에 늘 자리한 노모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베풀 수밖에 없는 국밥 한 그릇. 일본작가 쿠리 료헤이의 『우동 한 그릇』의 한 토막이 떠오르고, 참 아득한 일이지만 문경 산 속 어디쯤 여행하던 중에 걸식했던 기억도 되살아난다. 누구나 쉽게 인정이라고는 말하지만 몸으로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말로는 할 수 있다 해도 맞닥뜨리면 아무도 선뜻 나서서 할 수 없는 일, 바로 그런 순수의 마음으로 선함을 베푸는 사람임을 환상같이 펼쳐내는 시인이다. 그러면서 부모에 대한 애틋한 시인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은 시도 있다.


#4. 오후 3시 순대국밥집 한적한 실내, 중년의 며느리와 늙은 시아버지 국밥을 앞에 놓고 대화를 나눈다.
 며느리 : “아버님, 아버님이 건강하시고 돈 잘 버실 땐 고모가 맏며느리인 제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모셔 가시더니 이제 아버님 기운 없다고 저한테 모시라 하는 건 너무 하는 거 아닌가요?”
 시아버지 : “얘야, 인영어멈아 내가 요즘 나이를 많이 먹어선지 귀가 잘 안 들린다. 그래도 고모는 할 만큼 했다.”
 며느리 : “뭘 할 만큼 해요! 아버님. 이제 와 제게 아버님 떠넘기면서… 암튼요, 아버님이 섭섭하셔도 전 아버님 못 모셔요 고모 하는 게 기분 나빠서도 못 모셔요.”
 시아버지 : “인영아범이 올해 환갑이지?”
 며느리 : “환갑은 내년이고요... 그렇게 아시고요 여기 국밥에 밥 좀 더 말아 드세요. 아버님도 잘 아시겠지만 부모도 돈이 있어야 자식들이 함부로 못해요 그리고 요새는요 멀쩡한 부모도 외국에 갖다 버리는 세상이에요.”
 시아버지 : “뭐라고 그랬냐? 인영어멈아 내가 귀가 어두워서”
 며느리 : ……
 시아버지 :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늙으면 빨리 가야하는데…… 산목숨 끊을 수도 없고”
 며느리 : “아버님 그런 생각하지 마시고요 사시는 날까지 마음 편하게 사세요. 제가 반찬은 떨어지지 않게 해다 드릴 수 있어요.”
 시아버지 : “너도 자식 키워서 알겠지만 세상은 그런 게 아니다.”
 며느리 : “아버님 인영인요 지 시집 갈 밑천은 다 모아놨고요”
 시아버지 : “인영이가 벌써 시집 가냐? 너도 이제 쓸쓸하겠다”
 며느리 : “전 그런 거 없어요. 저는요, 나중에 늙으면 지금 있는 빌라 팔아서 양로원이나 들어가려고요.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아버님 일이나 신경 쓰세요”
 시아버지 국밥을 말없이 먹는다. 며느리 눈물을 찔끔 손가락으로 찍어낸다.

FO


 ―「안 읽히는 시」 전문


어찌 보면 시가 아니고 하나의 넉픽션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의 시다. 옆에 앉아 듣고 있는 듯 실감나는 국밥집의 풍경 같으면서도 막장드라마 같은 시여서 눈여겨보게 된다. 왜 하필이면 #4에서 상황이 시작될까. 그러나 읽다보면 전후사정이 대사 안에 집결되어 있어 앞뒤가 연결되어 전후 상황이 이해가 되고, 상황전개가 눈에 들어오고 어떤 상황인지 읽혀진다. 신기하게도 「안 읽히는 시」가 아니라 너무도 잘 읽혀져서 오히려 마음이 불편한 시다. 시인은 제삼자의 입장에서 며느리와 시아버지가 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드라마를 보듯이. 하지만 현대적인 가정생활에서 흔히들 늙으신 부모님을 안모시기 위한 핑계를 대는 이야기라 마음이 아프고 씁쓸하다. 귀가 어두워서 안 들리는 시아버지와 자신의 입장만 늘어놓는 며느리의 이야기가 페이드아웃fade out(음량을 서서히 줄여 음을 없애는 것) 되는 드라마연출상의 한 수법을 사용하여 드라마의 한 씬을 옮겨놓은 듯하다.
시인은 현재의 사회상을 여실히 드러내면서 시인 자신과 부모님의 모습이 얼비치는 오묘한 장면을 연출한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의 모습뿐 아니라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 현재의 모든 자식들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여 좀 더 바람직한 효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바로 「환상 같은」시에서도 보아온 시인의 부모를 생각하는 애틋함이 전해지는 이유와 맞먹는 조심스러운 바람이 담겼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시는, 스스로 반성하고 깨달음과 동시에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잃고 사는 며느리 같은 이기적인 모습에 조금은 씁쓸하면서도 큰 울림으로 다가와 묻는다. 효는 안녕하신가 하고.
시인은 특별히 효란 이런 거야라고 표하지 않고도 효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모든 부모님에게 안녕을 확인하며 인사를 건네는 시인의 독특하고 이색적인 수법은 시를 읽을 때보다 더 확실한 뭔가를 느끼게 하는 시, 「안 읽히는 시」가 아니라 새롭게 읽혀지는 시를 자주 보여준다.


2. 잡초처럼 걷는 시
이성필 시인은 늘 시와 함께 하며 걷는 걸 멈추지 않는다. 그의 발걸음은 늘 주위를 향해 걷고 있으며 그의 눈과 귀는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언제나 열려 있다. 그가 가고자 하는 미래의 길은 시의 길이어서 그는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적인 언어의 맑고 순수한 이미지를 그대로 화선지에 담아 내놓는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다보면 많은 수식어와 미사여구들은 살펴볼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시에서는 국밥집의 투박한 뚝배기와 깍두기 같은 감칠맛이 나고 정감이 흐른다.


아내의 화장대 거울에
메모지가 붙어있다
38누####
새로 산 차번호다
외우려고 적었나 보다
그 밑에 내가 적었다
51두####
근 8년을 타고 다닌 차다
팔아버린 차다
고생했고
정들었는데
새로움에 밀려서
이별을 했다

나는 잊지 않으려고 적었다


 ―「동병상련」 전문


이성필 시인의 꾸미지 않은 자연적인 감성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보내는 자동차와 다시 오는 자동차의 외워야 하는 차번호와 기억의 장치 속에 넣어두어야 하는 뇌 활동의 순간은 모두 동병상련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숱한 시간들을 함께 나눈 애마나 다름없는 자동차와 새롭게 정을 붙여야하는 자동차, 둘 사이의 관계는 모호하지만 오묘한 상관관계를 성립하고 가능한 머릿속에 박힌다. ‘근 8년을 타고 다닌 차다/팔아버린 차다/고생했고/정 들었는데’ 잊지 않으려는 이 부분은 시인의 의식 속에 가득한 정이 되살아나는 부분이다. 시인의 마음에 공감하면서 미소를 짓게 된다.


오늘도 발길 익숙한 길로 올라가
새로운 길 호기심으로 내려오면서
처음 만나 곤란한 두 갈래 길 앞에서
나를 모르는 나 같은 산객에게 물었다
“여기서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요?”
정확히 산객은 말한다 “나도 모르지요!”


선택은 끝이 없다 알고 보면 가벼운 바람 같은 거
비움도 한이 없다 땀방울처럼 똑똑 떨어지는 거
나는 멀고 긴 오른쪽 길을 택해 걸으며
완만하고 부드러운 걸 생각하는데
길은 계속 갈라지고 다시 만난다 두 갈래 세 갈래
살면서 문득문득 남모르게 찢어지던 가슴처럼


사람들의 발자국들이 놓여 생겼을 좁은 길 넓은 길
유한의 끝에서 오직 하나의 묵념으로 만나는 길
비가 내리고 꽃이 피고 초록이 온통인 지금과
붉은 단풍에 노랑 노을이 걸리고 흰 눈이 쌓이던 길
언젠가는 오래된 창문처럼 덜컹대고 후들거릴
아직은 튼튼한 두 다리로 잡초처럼 나는 걷는다


 ―「산을 걸으며」 전문


시인은 늘 걷는다. 걸으면서 시인은 자연의 언어로 고독을 떠올리기도 하고 사람을 떠올리기도 하며, 모든 자연물과 하늘을 그리며 거기서 생성되는 모든 이미지들을 합하여 시에 고스란히 심어놓는 농사꾼이다. 그러면서 쉬지 않고 앞으로도 걸으며 시를 떠올리고 화선지를 채울 것이다. 잡초처럼, 그러나 ‘비가 내리고 꽃이 피고’ 하는 자연의 순환처럼 함께 걸을 것이고 그것을 노래하는 시로 걸을 것이다. 언제나 걷는 것을 시처럼, 시로 걷듯이 걸음을 노래하듯 읊조릴 것이라 믿는다. ‘선택은 끝이 없다 알고 보면 가벼운 바람 같은 거/비움도 한이 없다 땀방울처럼 똑똑 떨어지는 거’ 시인은 비우기를 실천하며 끊임없는 선택의 길을 가려 한다. ‘비가 내리고 꽃이 피고 초록이 온통인’ 지금도 시인은 ‘잡초처럼 나는 걷는다’ 시를 지으며 자연에서 약동하는 잡초처럼 끊임없이 돋아나는 시로 다가올 것이다. 이성필 시인은 그렇다.


3. 자아를 형성해 가는 경계의 언어
시인은 사유의 폭을 넓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독특한 자아의 세계를 펼친다. 그리하여 시인은 유한의 존재를 만들어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을 자아낸다. 문턱을 넘나들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들여다보는 시인의 심미안은 늘 죽음을 준비하는 웰다잉well dying의 자세로 관철되어진다.


삶에 문턱이 있다면
죽음에도 문턱이 있겠지

생의 문턱은 넘나들며
닳고 닳는 거지만

죽음의 문턱은 한 번 넘으면
돌아올 수 없겠지

오늘처럼 가슴에 돌멩이가 얹힐 때
죽음의 문턱을 미련 없이 넘고 싶다
 

―「문턱」 전문


이성필 시인은 걸으면서 그만의 자연적인 언어들로 견고하게 자리 잡은 화두를 때로는 강렬하게 때로는 엄격하게 때로는 단호하게 분출하기도 한다. 어려움을 딛고 가까스로 일으킨 그만의 사유가 삶의 문턱을 넘을 때는 비장함을 드러내면서도 절제된 감정의 돌출을 ‘오늘처럼 가슴에 돌멩이가 얹힐 때’ 죽음의 문턱까지도 넘고 싶어질 때가 있는 것이다. 시인은 자연스럽게 그런 상황을 자연과 함께 하면서 자아를 한층 단련하였을 것이다. 강력한 생명의 에너지를 포기하고 싶을 때 ‘잡초처럼 나는 걷는다(「산을 걸으며」)’로 자신의 확고한 신념으로 버티어 왔다. 그래서 오롯한 시인의 생명력은 강한 뿌리를 내렸을 것이고 그에게 넘치는 정열로 삶의 문턱을 가볍게 넘어섰을 것이다.
시인은 누구나 한 번은 망설였을 삶의 문턱을 넘으면서 생동하는 자연과 더불어 깊은 사유의 틀을 벗어나 달관한 주체로서 당당하게 걸어간다. 그런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 이토록 문턱을 넘는 것도 자연적인 언어로 승화하여 시인은 덤덤하게 너무도 담백하게 자아를 상승시켜 놓았다. 인간 최하위의 감정까지 오르내리는 삶의 문턱을 넘어본 사람은 그 기분과 감정을 알고 있다. 시인의 그런 심상이 스스로 자아를 만들며 개척해나가는 경계의 언어로 시를 쓰는 자아와 일체를 이루는 시인이다.
이성필 시인은 시인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해가며 단정하게 다듬는 손질을 멈추지 않음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은 인생전반에 걸쳐 ‘죽음의 문턱은 한 번 넘으면/돌아올 수 없겠지’ 하고 깊이 고뇌하고 웰다잉well dying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백세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누구나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기도처럼 가만히 눈 감으니/땅에서 올라오는 흙냄새/주름지고 구부러지는 길에/바람 불고 불어가고(「목소리ㆍ2」)’하듯이 자연스럽게 물들어가는 시인의 자연적인 언어들은 점점 더 들판을 채우고 심상을 채워 시인의 자아를 형성해가고 있다.


4. 아직도 모르는 남은 날들을 위하여
시인의 행보는 쉬지 않고 걷는 데에 있다. 걸으면서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시인은 수많은 선택의 길을 걸어왔다. 이 한 편에 시인이 걸어온 삶의 여정이 담겨 있다.


가끔씩 책을 뒤적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우연히 살아왔다


일상의 날들을 신작로 먼지나 뒤집어쓰면서도
남의 집 대문을 경망하게 두드리진 않았지만


생각해보니 은근히 운명을 기대하면서
차가운 현실 앞에 나는 매번 오그라들었다


두 손을 만지작거리며 때론 머리를 쓸어 올리며
술이 술을 마신 날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다 아주 드물게 튼튼한 표지表紙 위의 먼지를 털면서
빈방 조용한 구석에서 뒤척이며 울었다


바람의 깃발로서 언제나 펄럭이고 싶었던
가여운 한 여자와 두 아이의 허술한 지붕인 남자가


다시금 우연으로 떠내려가면서 몰래 뒤척인다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의 우아한 죽음을 본다


 ―「뒤척이며」 전문


시인의 언어는 늘 이타적이다. 인간의 삶 속에서 우리는 모두 우연한 인연을 맺고 그 인연 속에서 연관을 지어 살아간다. 시인이 겪어온 삶의 배경 내지는 앞으로 살아온 날들이 고스란히 담긴 듯한 ‘바람의 깃발로서 언제나 펄럭이고 싶었던/가여운 한 여자와 두 아이의 허술한 지붕인 남자’가 모든 것을 내어주듯 말하고 있다. 이성필 시인만이 지닌 특유의 살신성인의 자세로서 ‘다시금 우연으로 떠내려가면서 몰래 뒤척이며’ 내어주는 삶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그만큼 순수한 열정의 소유자이며 내줄 줄 알고 포용할 줄 아는 정이 많은 보편적인 정서의 일관된 자연 같은 시인이다. 아낌없이 스미듯이 자연과 하나 되는 시인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스며든다.


친구 덕분에 물때를 배운다
내 생전에는 관심도 없이 지나갔을 일
늘그막에 친구는 어부가 되고
나는 어부의 친구가 됐다
젊어서 윗물에서만 살던 사람이
아랫물 해남까지 내려가서
낙지를 잡는단다
밤낮 없이 바다 물살은 들어오고
나가고 할 것이다
조차가 큰 사리의 삶
그럭저럭 조금의 삶
한때는 만조였던 사람
늘 그러리라 사는 나의 일상에도
물이 빠져 나간다
천천히 그러다가 순식간에
텅 비는 바다
검푸른 갯벌에 배를 걸었다


 ―「걸었다」 전문


우리의 인생은 매순간 물때를 맞추어 살수는 없는 것이다. 누구나 만조일 때도 있고 간조일 때도 있기 마련인 것처럼 ‘한때는 만조였던 사람/늘 그러리라 사는 나의 일상에도/물이 빠져 나간다’고 시인은 말한다. 하지만 자연은 가만히 있는 사람보다 늘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며 노력하는 사람에게 열매를 맺게 해준다. 이성필 시인은 가만히 있는 사람이 아니다. 늘 무언가를 탐색하고 탐색이 끝난 후에는 언어를 조합하고 주무르고 매만지고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자연적인 언어의 발현을 통하여 술술 풀어내놓는다. 그래서 시인의 시를 읽으면 마음이 읽혀지고 시인의 눈으로 사물을 따라가고 산길을 걷고 하다가 인생을 바라보며 반성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시인의 마음은 ‘결과에 굴복하여 사는 미지근한/삶의 자세를 부끄러워한다(「낡은 반성」)’처럼 순수하고, 사물과 가까이 천진한 마음의 눈으로 인사하듯‘꽃잎이 지던 그 순간을/함께 하지 못했음을 미안해’ 하는 소년 같은 심성의 소유자다. 소년 같은 마음으로 걷는 산, 그 길에 시인 인생의 길도 함께 걸으며 생각해 본다.


어제는 비가 내렸던 산
오늘은 맑고 고요한 길에
손녀 태어날 기념으로 심은 나무에
푸르게 잎이 올랐다
소멸과 탄생
문득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직 나는 살아 있음으로
나무가 되신 아버지를 생각한다
인하대병원 중환자실
심폐소생술을 포기합니다에
서명하던 일을 생각한다
나의 아들을 생각한다
너도 이 길을 걷겠구나를 생각한다
네 딸의손을 잡고 아버지를
추억하면서 언젠가 이길을 걷겠구나를
생각한다
나처럼 심폐소생술을 포기합니다에
서명하게 될지도 모르겠구나를
생각한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더흘러
다시 이 자리에 서서
나처럼 하염없이 서럽겠구나를
생각한다
그것 또한 나는 아픈 일
그러나 봄이 피고 가을이 지는 일임을
생각한다
어쩔 수 없다
돌이킬 수 없음을 생각한다
아직도 모르는 남은 날들을 생각한다
오늘 나의 산길 손녀나무에
푸르게 잎이 올랐다


―「손녀나무」 전문


시인은 걸을 때 가장 사유가 많아진다. 나와 연관된 가족, 가족을 돌보아야할 가장으로서 나 이전의 내 아버지의 삶과 지금 현재 내가 가고 있는 삶의 길에서도 시인은 ‘아직도 모르는 남은 날들을 생각한다’며 여전히 걷고 있다. 나 이전에 살았던 아버지의 길도 나 이후에 걸을 아들의 길도 결국 같은 이 자연의 길을 걸어갈 것이라는 섭리를 깨닫는 오늘이다. 시인은 쉬지 않고 걸어가며 ‘오늘 나의 산길 손녀나무에/푸르게 잎이 올랐’다고 시인 자신의 삶의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을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가고 있다. 한 길을 가고 있는 시인 자신의 길을 담담하고 진솔하게 그려 내었다.
이성필 시인은 앞으로도 걸을 것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봄이 피고 가을이 지는 일임을’ 걸으며 몸소 체득해갈 것이다. 시인이 한 발 한 발 내딛듯이 걷는 그 길에 삶을 성찰하고, 성찰하는 과정에서 시인은 ‘아직도 모르는 남은 날들을 생각하’며 서정적이고 자연적인 언어의 모든 걸음을 재촉할 것이라 기대한다.





*정 령 2014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연꽃홍수』, 『크크라는 갑』. 전국계간문예지 작품상 수상. 막비시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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