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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아라작품상 수상자/김설희 시인

<심사평>



<수상소감>




<수상작>

가시 끝도 자라면 둥글어진다

 

탱자나무

꽃 진 자리가 가시 끝이다

계단 끝에 걸쳐진, 막 시작한 아이의 걸음처럼 배꼽 하나 맺힌다

 

무시로 바람이 다녀가는데 배꼽이 커진다

이따금 비가 놀다 가고

해의 콧노래가 자박거리는데

떨어진 꽃을 찾아가는 길처럼 부푼다

 

그럴수록

탯줄과는 멀어진다

 

멀어진다는 것은 자란다는 것

 

자란다는 것은

장벽이 많아진다는 말인가

보호해야 할 것들이 늘어난다는 말인가

 

커진 배꼽의 기원을 생각하는데

황금빛 탱자 향이 부르터 올라

가시 끝이 그만 둥글어진다

 

 

2018년 겨울호 시와소금

 

 

 

 

 

 

 

 

 

 

 

 

 

 

냉장고 수리하는 날

 

 

지상의 코드 하나를 물고

날마다 몸속을 휘저었어

 

온 몸은 뜨거운데 뭔가 허전했어

김치 된장 마늘 배추 무...

거침없이 먹었어

먹을수록 훈기는 감돌지 않고 오히려 차가워져

 

막 벌어지려는 장미꽃처럼

뜨겁게 불타오르고 싶어

뜨거워지고 싶어

막무가내 차게 하는 것이

탯줄 같은 끈 하나를 잡고 있는

이유일까

 

시린 손으로

무의 성질 병속 내용물 수박의 질량...

 

어루만지던 시간이 얼마인가

 

전신인

냉매가 사라지고

구리선마저 삭는 줄도 모르고

 

2018년 겨울호 시와소금

 

 

 

 

 

 

 

 

 

 

 

 

꽁지

 

 

가지에 앉고서도

저렇게 꽁지를 흔드는 것은

새로 앉은 가지의 무게를 재는 것일까

가고자 하는 다른 방향을 재는 것일까

 

몸의 가장자리

그러나

몸의 중심

 

어둠 한 벌 털어내고 햇살자리에 앉는 순간

바닥을 가리키는 꽁지

드디어 흔들리는 가지와 새가

균형을 잡는다

 

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린다는 것은

비로소 평안해진다는 것인가

 

그 자리에서 한참 가장자리를 털다가

하늘 한 번 보고

다시 꽁지를 아래로 내리는

 

 

2018년 여름호 시와문학()

 

 

 

 

 

 

 

 

 

 

 

 

 

 

견고한 유리

 

 

호텔 온탕에서 유리 밖을 본다

먹구름이 하늘을 덮은 채 어디론가 떠간다

시커먼 바람에 소나무 대나무 가지 채 흔들린다

대나무 밑에 작은 풀들도 몸서리친다

비마저 뜀박질이다

초롱꽃도 불안한 종소리를 낸다

 

구름이 검은 한 바람은 멎지 않는다

 

유리 밖의 일이다

아니 유리 안의 일이다

 

수증기가 낮게 피고

늘어지게 피로를 푸는 사람들이 눈을 감고 있다

 

물속은 봄날처럼 늘 푸근하다

 

눈은 감을수록 이기적이다

 

차가운 비가 서로 엇갈리거나 마주치거나

구름이 어디로 흐르거나 사라지거나

낮은 풀들이 소문 쪽으로 눕거나 쓰러지거나

 

감은 눈을 뜨고 싶어 하지 않는다

 

쏠리는 바람은

빨간 파란 녹색 현수막을 흔든다

0000당들도 같이 능청거린다

 

저 먹구름이 언제쯤 벗어나려는지

바람은 언제쯤 잦아질지

감은 눈은 언제쯤 뜨려는지

 

곧 선거일이 다가온다는데

 

 

 

2018년 여름호 시와문학()

너에게 가는 길

 

 

벌어진 입술 속,

혀의 길이를 측정하고

발음을 고르는 혀의 움직임을

번져가는 겨울바람이 주시한다

 

너의 발은 눈 속에 묻혀있다

 

눈물 흘리지 않는 너의 깊이에다

내 무릎을 대고 너와 키를 맞추고 싶다

무릎이 시리도록 너의 주위를 맴돌다

너의 명암을 내 맘대로 조절하고 싶다

 

너의 사방을 따라 나도 사방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싶다

잘 헹구어진 햇살이 너의 얼굴에 얹힐 때

문득 살아나는 너의 얼굴 속에 갇히고 싶다

 

그 때 너는

차가움 속에서 삶을 끌어올리는 하나의 심지로

나의 꽃으로 살아난다

 

내가 너라는 우주 한포기 가만히 보듬어 온 날

손이 얼고

발이 얼고

입이 얼어붙었다

 

 

2018.1.영남투데이

 

 

 

 

 

 

 

 

 

 

 

허공에서

 

 

탯줄이 어디 있는 줄도 모르는 잎 하나가

끊어진 거미줄 한 올을 잡고 달랑거린다

 

공중이다

사방이 바람이다

 

어느 틈 기척만으로도 움츠러지는

바싹 오그린 몸이 매달려 있긴 땅이 멀다

하늘도

구름도 아득히 멀다

 

삶 한 장이

보일 듯 말 듯 한 오라기를 부여잡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깊이 흔들리는 허공

 

저 허공을 할퀴는 것이

내 놓지 못한 목숨일까

가느다란 숨을 죄는 바람일까

 

언제 녹아내릴지 모르는

한 생이

 

 

 

 

 

 

 

 

2018년 시와경계 여름호

 

 

 

 

 

 

 

구멍

 

 

닫힌 곳에서 산다

막힌 빛을 통과시킨다

깜깜한 것들의 껍질을 벗긴다

공기가 살아있는 거기,

말랑말랑한 것들이 드나든다

뭇 생명을 기르는 긴 복도다

단절이 굴절되며 꺾이는 곳이다

보이지 않은 것을 보이게 한다

그 샅에서

오므린 것들이 살살거리며 화알짝 핀다

 

뚫린 곳으로 흐르는 에너지

시린 몸들이 녹는다

 

매파 같은 구멍은 왜 둥근가

 

2018 시와경계 여름호

 

 

 

 

 

 

 

 

 

 

 

 

 

 

 

 

 

 

 

 

 

바람의 특성

 

 

날개를 가진 것들은

바람이 가득 찬 것들이야

 

팽팽한 것들의 껍데기는 얄팍해

터지기 전

양을 줄이려면 날개를 저어야해

 

날갯짓은

부풀어 오른 몸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거야

 

바람이 날개 등을 타고 훠이훠이 길을 나서는데

길에는 아롱아롱 빛나는 것들이 많아

유흥시설처럼 꽃들이 열려있어

어딜 가도 오락 같은 시간이야

 

날개를 저을수록

탱글탱글한 바람이 수그러드는 것 같아도

사실은 새 바람이 자꾸자꾸 생성되고 있어

멀리 날아가려는 속성이 더 키를 세웠는지

하늘 높이 허공을 젖더니

느닷없이 풀들이 살아있는 땅 쪽으로 내려오는 거야

 

바람의 본능은 방향을 바꾸는 일이야

 

 

 

2018년 아라문학 여름호

 

 

 

 

 

 

 

 

 

 

 

궁리

 

나침반을 만들까

하얀 티슈 한 장을 깔고

그 위에 꽃잎을 붙여 꽃을 만들까

 

백지가 꽃길이 될까

길이 길어질수록 뜯겨진 꽃잎이 많아질까

가지런히 꽃잎이 배열되고 흩어질까

붙이고 흩고 또 붙이고

꽃의 길이 삶의 무늬로 얼룩질까

 

해 지는 쪽으로

손뼉과 노래가 들썩일까

돌 위를 흐르는 물소리

아릿한 플롯의 울음이 흐를까

 

어둑어둑해지는 황혼 쪽으로

환하게 제목처럼

 

 

2018 아라문학 여름호

 

 

 

 

 

 

 

 

 

 

 

 

 

 

 

 

 

 

 

어느 연주회

 

 

 

손가락 지문이

건반을 부지런히 건너다닌다

지문의 흔적 따라 운율처럼 돋는 소리

 

눌린 건반들

웃음이 자지러진다

울음이 까무러친다

 

저렇게 기절하는 것들

한 땀 한 땀 잇대가며 생의 긴 끈을 만들다

 

웃는다

운다

 

음악은 끊임없이 연주되고...

 

 

2018 시와반시 겨울호

 

 

 

 

 

 

 

 

 

 

 

 

 

 

 

 

 

 

 

우리 거기 가볼까

 

 

긴 생머리 풀고 분홍 티에 청바지입고

산과 산이 열어놓은 곳

맑은 물이 돌들을 품으며 자갈자갈 흘러가는 거기

우리 한번 가볼래

 

한더위 가리려 텐트 치는 동안도

그냥 낮은 데로 흐르는 물

골뱅이들 저들끼리 입 맞추며 사랑 나누는 거기

 

하늘도 구름도

물 속도에 발맞춰 흐르고

음식물 비운 잔 그릇들 모래로 살살 씻어도 좋은 거기

우리 한번 가볼래

 

서로 바라보는 눈동자도

어머니 목소리처럼 순해져서

물결 위 빛처럼 영롱해지는 거기

 

우리 한번 가보자

 

 

2018년 낙강시제

 

 

 

 

 

 

 

 

 

 

 

 

 

 

 

 

스프링일까

 

 

당신이 침대를 고를 때 나는 기다리죠

치마를 입은 당신은

잠에 필요한 스프링의 촘촘한 구조를 살피죠

매트리스 종류마다 앉아보고 누워보고

그러니까 바닥을 관찰하죠

그럴 동안 나는

밤을, 휴식을 눕힐 가장 안락한 무엇을 찾는 당신만 생각하죠

 

스프링일까

폼일까

고무나무일까

캥거루가 먹는 나뭇잎일까

 

당신이 찾는 것이 무엇인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당신만 따라다니죠

당신이 나에게 선택되듯

당신에게 마땅한 것이 선택될 때까지

그냥 기다리죠

 

지금 내가 기다리는 것은

당신이 고른 침대에서

매일 밤 사랑을 위한 침묵이라는 것을

당신은...

 

 

2017 애지 겨울호

 

 

 

 

 

 

 

 

 

 

 

 

우물

 

 

 

이끼 돋은 원시의 우물 하나 있어

 

울타리가 우물의 어깨를 반쯤 덮을 때

제 키보다 몇 배 긴 두레박 끈을 슬슬 사리더니

우물로 확 풀어내는 여자

 

두레박 같은 편지가 웅숭깊은 우물에 닿기까지

무한히 비틀거렸어

비밀한 낱말들이 부딪히며 어긋났어

 

깊이 고인 물까지의 거리에

바람이 일고 천둥 치고

한 동네가 우울해졌어

 

우물에 꽃이 피었어

겹겹 퍼지는 꽃잎이 파랗게 질렸어

우물은 아득해져 그만 눈을 감아버렸어

 

빈 듯 꽉 찬 편지 한 장 다녀갈 때마다

우묵한 동네는 파리하게 슬펐어

 

깊이도 넓이도 모르는 이들이

갈증이 나거나

더러운 때가 묻거나 서러운 사랑이 돋아날 때

 

시시로 거기 편지를 던졌어

그러면 우물은 새로 돋은 꽃잎을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히고

 

 

 

2017.애지 겨울호

 

 

 

 

 

가장 가벼운 날

 

 

찻물을 끓여요

찬물이 끓는점을 찾아 가는 동안

화장실을 거처 뒷문으로 들어오는 가을을 잠깐 만나고

돌아온 사이

탁자위에 얹어 둔 가방이 사라졌어요

 

악어가 끈덕지게 물고 있던

볼펜 두 자루

카드 두 장이 든 지갑

해 넘긴 수첩 한권 올해 수첩 한권

자동차 면허증 단발머리사진 주민번호

시집 한권 안경 선글라스 USB 두 개

......

 

악어 한 마리가 나에게서 멀어졌는데

 

달아오른 물이 화끈거리고

뜨거운 수증기를 뿜는 주전자는 덜컹거리고

녹차를 기다리던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없는 가방을 찾는데

닫힌 문마다 끓는 물소리처럼 들썩거리고

 

나의 눈과 손

나의 재산

나의 역사가

나를 두고 나를 벗어났는데

 

() 대신 가방을 들고 나간 앞니 하나 빠졌던 사나이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어디까지 나를 데리고 갈까

 

내가 지배해온 악어 한 마리가 나를 떠난 날

 

나를 그물처럼 옭아매고 있었던 악어 한 마리

에서 내가 벗어난 날

 

 

2017 낙강시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