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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문학 수록작품(전체)

계간평

백인덕





시적 ‘공감共感’이 열리는 ‘경계境界’에 대하여
―지난호 다시 읽기



1.
   인간은 정보취득의 75%(학자마다 견해가 다른데, 많게는 85% 이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상을 시각에 의존한다. 레스터Lester에 따르면 인간의 두뇌는 분리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눈에 빛을 집약시키고 초점을 모으며, 바라볼 대상을 고르고 선택된 대상에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이것은 ‘선택의 과정’이다. ‘지각’은 선택된 것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며, 지각된 것은 ‘기억’되고, ‘학습’되며, ‘이해’의 과정을 거친다. 즉 ‘감각→지각→기억→학습→이해’의 과정을 거쳐 ‘날raw’정보가 ‘육화肉化’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선형적으로 끝나지 않으며 순환적 고리로 계속해서 되감긴다. 이 차이를 내포한 반복이 시간의 축軸에서 지속되면서 우리의 이해를 확장, 심화해 ‘의미meaning’를 발생시킨다.
시 작품을 이해하는 경로도 이와 같다. 나아가 각 작품의 의미의 변별성을 인지하는 것이 인식의 차원에서 시를 이해하는 최종지점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시는 미학적 층위에서 ‘공감’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공감은 단순히 이해의 수준에 멈춰서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감상자의 적극적 관여關與라는 전제를 요구한다. 이 때문에 ‘공감’은 정보의 차원에서 원原 기입자(시인)와 추追 해석자라는 두 주체가 만나는 지점, 경계에서 형성되는 경우가 가장 일반적이다.
이를 좀 비유적으로 말하면, 시인은 독자와 만나는 지점, 즉 작품에서 공감을 지향하는 열린 경계를 설정해야 하는데, 시인이 작품에 장치하는 공감의 문고리 중에서 가장 강력하면서도 일반적인 것은 ‘기억’을 현재화해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수법이다. 체험보다 기억이 강조되는 이유는 체험의 직접성보다 기억의 핍진성逼眞性이 보다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못가에서 신발을 본 날은
밤새 검은 물속을 헤집는 꿈을 꾸었다
수없이 자맥질을 하는데 물의 결을 스치며
가슴에 못이 박힌 사람이 지나갔다
본 듯한 얼굴이었다


못가에는 구두 한 짝 가지런하였다
그 속에 꽃잎 한 장 날아와 앉았다
검은 구두 속이 연분홍으로 환했다


어쩐지 눈을 뜰 수 없을 것 같은 어스름 속에
사람들이 술렁였다
귓전이 울음소리로 쟁쟁하였다


앞섶을 다 풀어헤치고 달려온 여자가 구두를 끌어안았다
꽃잎이 천천히 떨어졌다
먼 곳이 부르는 듯 얄팍한 생이 하르르 내려앉았다


한 생이 그렇게 가라앉고
수면 위에는 밀서 한 장이 떠올라 물살에 찢겼다
고요하였다
고요의 내면이 바뀌고 있었다


                                                                                                      ―권순, 「못」 전문



   이 작품은 하나의 기억이 오랜 학습의 과정과 이해의 되풀이를 통해 인간의 보편적 운명에 대한 인식으로 확장된 경우를 잘 보여준다. “못가에서 신발을 본 날은/밤새 검은 물속을 헤집는 꿈을 꾸었다”는 것은 기억을 소환하는 계기, 즉 ‘현재적 필요’의 작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현재적 필요하면 보통 욕망을 떠올리고 그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기억을 헤집는 것은 욕망 이전의 충동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이고 암울한 분위기일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못가의 신발을 본’ 사실과 ‘검은 물속을 헤집는 꿈’은 현실과 환상만큼이나 별개의 것이지만 시인은 1연의 마지막에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라는 진술을 통해 사적 트라우마를 일련의 사건에 대한 정서의 차원으로 승화하고 있다.
   작품의 2∼4연은 기억의 내용과 지금 현실에서 목도目睹한 사건이 동전의 양면처럼 전개되면서 시적 긴장을 고조한다. ‘못가’에 가지런한 ‘구두 한 짝’에 날아와 앉는 한 장의 ‘꽃잎’을 통해 구두의 주인이 매우 젊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검은 구두 속이 연분홍으로 환했다”라는 표현을 통해 시의 비극성을 한껏 끌어올리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이쯤에서 멈추고 말았다면,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공감을 이끌어내기에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현대인은 그 어느 시대의 인간들보다 불행과 불운에 익숙하며, 타자의 비극에 공감하면서도 쉽게 동화同化되지 않는 정신 상태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권순 시인은 한 사건과 이로 상기想起된 기억을 아울러 하나의 시적 명제를 구축한다. “한 생이 그렇게 가라앉고/수면 위에는 밀서 한 장이 떠올라 물살에 찢겼다”는 표현에서 죽음을 삼킨 수면에 떠오른 ‘밀서’, 즉 한 죽음이 건네는 잠시의 깨달음을 떠올린다. 비록 시인은 ‘물살에 찢겼다’며 그 찰나성을 비난하는 듯 하지만, “고요의 내면이 바뀌고 있었다”라는 진술은 내부, 즉 정신으로부터 존재의 변화를 예상케 한다.  



외따로 떨어져 잠든 종이박스 왈칵 들춰보고 싶은 충동에 등 푸른 계단 아래로 굽고


마지막 통화와 함께 사라진 욕설
화석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서울을 떠날 때마다
뒤 돌아보는, 세 살 터울 같은 습관
네모난 풍경에 갇히고


계절마다 찾아오는 잦은 외출이 해감 될 즈음
면역력 약한 삶 하나가 환절기를 넘지 못한 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오랜 세월 귀에 머물던 절벽의 야유에서 이명의 꽃 피었다지고


서울역 지하도 지나갈 때면
앞만 보고 걸었다 봄은
웅크린 몸에 푸른 물 불러들이는
소란한 감전


붉은 신호등에 숨겨둔 하얀 비명
화들짝, 길을 건넜다


                                                                                                                              ―김정수, 「화들짝, 봄」 부분



   사건이 기억을 건드리는 접점接點에서 인간 운명에 대한 보편적 인식의 가능성이 열리듯, 기억을 외화外化하지 않고 단지 내장한 체험도 자아성찰이라는 측면에서 시적 공감의 가능성을 충분하게 고양高揚한다.
   김정수 시인은 어떤 고백으로 시를 여는데, “노총각 동생이 집을 나간 후부터 서울역 지하도 지나다닐 때마다 흘깃, 등 돌리는 얼굴들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 ‘버릇’은 지극히 후천적이며 원인이 명확한 것인데, 어떤 불화不和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넘어 안타까움이라는 시적 분위기Mood를 우선 확립한다. 이 버릇은 “종이박스 왈칵 들춰보고 싶은 충동”으로 분출되기도 하며, 결국 시인에게 “등 푸른 계단 아래로 굽”는 등을 남긴다. 시인의 이 굽은 등은 직접적으로는 현재의 버릇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돌이켜보면 “서울을 떠날 때마다/뒤 돌아보는, 세 살 터울 같은 습관”이 배면背面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그 현실성을 획득한다. 세 살 터울 동생은 예나 지금이나 자꾸 뒤를 돌아보게 하는 애린愛隣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이 비극적 상황이 존재의 변화, 아니 발각이라는 측면에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랜 세월 귀에 머물던 절벽의 야유에서 이명의 꽃 피었다지고” 같은 수월한 이미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야유/이명’은 외부와 내면의 소리, 게다가 고통을 주문하는 소리라는 점에서 시인의 처지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결국 시인은 “붉은 신호등에 숨겨둔 하얀 비명”을 ‘화들짝’ 꺼내 드는 데, 이것이야 말로 존재의 발각reveal을 그대로 유비한다. 사족이지만, 권순 시인이 ‘못’에서 ‘못이 박힌 사람’을, 김정수 시인이 ‘봄’을 통해 봄春과 봄視을 중의적으로 사용한 것은 시어의 저변 확장을 위한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2.
   모든 공감이 그렇겠지만, 시적 공감도 ‘함께 하는 장場’이 마련되었을 때 더 빠르고 깊게 형성된다. 다만 이때는 작품과 독자, 즉 ‘텍스트와 관여 주체’라는 보다 복잡한 개념적 층위가 작용한다. 여기서 이를 논하자는 것은 아니고, 시인은 작품 속에 이 관여 주체가 능동적으로 사유하고 상상할 수 있는 공간, 혹은 틈을 마련해야 한다는 책무가 있다. 이 빈틈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개별적이면서 동시에 일반화 되는 체험에 의지하는  방법이 있다. 물론 그것은 ‘시적’이라는 전제에 따라 적절하게 상징화되어 드러나야 한다.



어쩌면 죽기 전에 쉬는 곳이라 죽전일까


머리 짧은 풀들이 비를 마시며 벌써 힘을 얻고 있다
말없이 진설한다
우산을 겹겹이 세워 막아도 제사 음식에 들이치는 비
우산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 빗줄기 속에는 있다
오래도록 덤덤하던 큰 언니가 물 위에 털썩  주저앉는다
슬픔에는 약이 없다더니


자동차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쇠북 치는 소리 같다


                                                                                                 ―김은옥, 「마지막 휴게소」 부분


   시인은 성묘라는 특별하면서도 일상적인 행위를 기록한다. ‘죽전’이 ‘마지막 휴게소’라면, 지도상의 지역을 상상해 보는 것도 그리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시에서 우선적으로 체험 자체보다 그것이 하나의 규칙과 개념으로 바뀐 언어를 접하게 된다. 언어는 그러므로 시인의 체험과 독자의 체험 사이에 가로놓인 다리일 수도 있고 벽일 수도 있다. 더불어 시인이 자신의 체험을 원래의 느낌과는 다른 방식으로 변형할 수 있는, 즉 상징화할 수 있는 좋은 도구이기도 하다. 영면永眠한 이들의 만나러 가는 길에 눈에 들어온 ‘마지막 휴게소’는 현실의 지시대상 이상의 정서적 반응을 촉발한다. ‘죽전’을 “어쩌면 죽기 전에 쉬는 곳”이라고 바꿔 생각하는 것도 이에 따라 가능해진다. 이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져 ‘자동차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쇠북’ 소리 같다는 데 닿는다. “우산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 빗줄기 속에는 있다”면 그것은 ‘쇠북 치는 소리’ 같은 어떤 장엄함일 것이다. 빗속의 성묘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것이 공감을 지향하는 하나의 전략이다.



앵두는 발갛게 익는 데만 꼬박 한 달이 걸렸다.
꿈에서도 꼭 쥔 주먹은 펴지지 않았다.
너무 잘 자라서 탈이네요.
앵두는 안 열리고 입만 무성해 진다니까요.
사람들은 웃자라는 가지를 모두 잘라냈다.
내가 태어난 집은 앵월에 남의 손에 넘어갔다.
헛열매를 따내시던 어머니 손도
앵두물이 든 내 손도
주먹을 움켜쥐어야 겨우 잠이 들었다.
앵월에는 바람소리도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정남석, 「앵월櫻月」 전문



   집의 상징성은 굳이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원형이며, 특히 한국인의 정서에서는 근원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게다가 ‘어머니’라는 계열적 상동相同 어휘가 등장하면, 그 효과는 배 이상으로 증폭되는 효과를 거두게 된다. 정남석 시인도 이런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근원적이라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보편화 된 것이기 때문에 깊이 있는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이를 개별적으로 특수화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런 난점을 ‘앵월’이라는 신선한 시어를 통해 극복한다. 문자 그대로 이해하자면, ‘앵두가 익는 계절’이라는 뜻 같은데, “앵두는 발갛게 익는 데만 꼬박 한 달이 걸렸다”고 했으니, 최소 앵월은 한 달 이상일지도 모른다. 앵두 농사를 짓는 이들에게는 이 앵월마저도 특별할 것이 없는 한 시간적 계기로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내가 태어난 집은 앵월에 남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과, 또 “헛열매를 따내시던 어머니 손도/앵두물이 든 내 손도/주먹을 움켜쥐어야 겨우 잠이 들었다”는 고백을 통해 어떤 실패의 경험, 각인된 슬픔을 반추反芻해낸다. 다시 말해 앵월이라는 신선한 시어 속에 시인만의 독자적인 체험을 기입함으로써 정남석만의 ‘앵월’을 한국시에 존재하게 한 것이다.
이번 호에 살펴본 네 분의 시인들은 시적 의미라는 거대 중압에서 조금은 자유롭게 자신만의 시어를 확보해 나가고 있다는 특징이 보였다. 비록 작지만 알찬 결실들이다.










**약력: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본지 주간. 시집 『끝을 찾아서』, 『한밤의 못질』, 『오래된 약』,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단단斷斷함에 대하여』,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상상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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