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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문학 수록작품(전체)

22호/신작시/송연숙/가을, 구겨지는 외 1편


가을, 구겨지는 외 1편


송연숙



단풍나무 아래엔
웬, 구깃구깃 구겨진 이파리들
저렇게나 많을까


종이와의 연대
나무의 유전자 속에는
종이의 습성이 들어 있다
이파리 물들다 말고 휙휙
구겨진 이파리들 파지인양 떨군다
숲은 온통 구겨지는 중이다
종이를 구기듯
찌푸린 이맛살 같은 파지들
팽팽하던 초록의 말들마다
끝자락들이 물들고
어깨를, 온 몸을 움츠리듯 구겨져 있다


스탠드 불빛도 없이
촛불은 더더욱 없이 자꾸 틀리는
바람의 구술口述을 받아 적다 말고
가을, 구겨지고 있다
구석으로 몰려 쌓여가는 파지들
단풍잎 들여다 보 듯
벌레 구멍
바람에 찢긴 문장들, 들여다본다


구겨지고 버려지는 것은
얼마나 힘이 센지
봄, 여름, 가을이 잎맥마다 들락거리고
또 구겨지다 보면
까짓것, 삭풍의 언덕쯤이야
벌레의 상처에도 쭉쭉 팔을 올리는
파지들의 힘


바람이 흘리는 휘파람마다
한 묶음의 파지들,
음표처럼 날아다닌다





달팽이, 시간을 굴리다



달팽이가 지나간 배춧잎은 텅 비어 있다


비어 있는 문양은 느린 시간의 발자국, 무형의 무늬 속으로 늦여름이 빠져 나간다 사각사각 초침들이 배추 이파리를 지날 때 점액질 흰 달은 둥글게 살이 찐다 여름의 막바지들이 겹겹으로 들어차고 막바지에 다다른 파란을 달팽이가 갉아 먹는다 파란의 흉터는 공중의 숨구멍


모든 흉터는 파란이 파란波瀾을 겪으며 걸어온 흔적이다


달팽이가 지나온 흔적 너머로 늙은 개가 하품을 하고 밀잠자리들이 고춧대 끝에서 구름의 전파를 잡는다 알밤이 툭툭 가을을 세고 수수열매 자루들마다 공중을 쓸고 있다


지금은
배추들이 겉잎을 버리는 시간
풀벌레 소리가 배춧잎으로 스며드는 시간
햇살과 바람의 끝자락이 알곡처럼 자루에 담기는 시간


오른돌이바람이 천천히 공중의 시간을 돌리고 있다





*송연숙 2016 《시와표현》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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