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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문학 수록작품(전체)

17호/계간평/백인덕/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품다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품다


백인덕



  1.
  예술로서의 문학, 또는 문학의 장르로서의 시의 특징, 아주 협의의 비평적 관점에서는 ‘현대시의 미적 특성’ 등에 주목하다 보면, 가끔 문학이나 시가 본질적으로 인간의 정신활동의 산물이라는 점을 잊곤 한다. 지나치게 일반적이고 중요하기 때문에 현재의 매 순간마다 잊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인데, 예를 들자면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명제와 같은 것이다. 정신활동의 산물이라는 것은 사실 매우 중요한 근본 원리를 가리키고 있는데, 다름 아니라 시는 결국 ‘삶의 기록’이라는 결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작품이 언어라는 프리즘을 통해 욕망의 문제를 다뤘든, 사회와 공동체의 병리적 현상을 다뤘든, 아니라면 순간 포착된 정서적 조응照應을 그려냈든 여부에 관계없이 하나 같이 존재와 시대의 삶의 기록으로 읽을 수 있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이 가고 가을이 성큼 다가선 것이 반갑기 때문일까? 『아라문학』 의 지난 호를 다시 펼쳐드니 ‘삶에 대한 애잔한 소회所懷’를 풀어낸 작품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친구 덕분에 물때를 배운다
내 생전에는 관심도 없이 지나갔을 일
늘그막에 친구는 어부가 되고
나는 어부의 친구가 됐다
젊어서 윗물에서만 살던 사람이
아랫물 해남까지 내려가서
낙지를 잡는단다
밤낮 없이 바다 물살은 들어오고
나가고 할 것이다
조차가 큰 사리의 삶
그럭저럭 조금의 삶
한때는 만조였던 사람
늘 그러리라 사는 나의 일상에도
물이 빠져 나간다
천천히 그러다가 순식간에
텅 비는 바다
검푸른 갯벌에 배를 걸었다


─이성필, 「걸었다」 전문


  삶의 변화란 예기치 못한 순간, 지점에서 잔잔한 충격파처럼 일렁일 때도 있다. 시인은 이를 “늘그막에 친구는 어부가 되고/나는 어부의 친구가 됐다”라는 신분 변화(?)로 표현하고 있다. 귀어인지 귀촌인지 정확한 용어는 모르겠지만, ‘늘그막’에 친구의 선택이 따지자면 그리 큰 사건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어부의 친구’인 ‘나’가 “생전에는 관심도 없이 지나갔을 일”, 즉 ‘물때’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분명히 주목할 만한 사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전히 나는 “늘 그러리라 사는 일상”에 갇혀 있지만, 거기에서마저 “물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리, 조금, 만조’와 같은 물 때 명칭이 정확하게 쓰인 것을 보면 시인은 공부가 설렁설렁 하는 소일거리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게다가 “젊어서 윗물에서만 살던 사람이/아랫물 해남까지 내려가”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윗물/아랫물’(해남의 위치와 ‘서울로 올라간다.’는 우리의 관용 어구를 생각해 보면 서울이거나 수도권일 것이라 추측되는데 어쨌든 장소를 ‘물’로 표현한 것이 독특하면서 앞의 생각을 반증해 준다.)
  이 작품에서 이성필 시인은 마치 친구의 삶의 변화를 기록하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나의 일상’의 변화를 애잔하게 기록하고 있다. “천천히 그러다가 순식간에/텅 비는 바다”는 시각적 포획 대상으로서의 ‘바다’이면서 동시에 ‘인생’의 성공적인 비유다. 나아가 “검푸른 갯벌에 배를 걸었다”는 부분은 시인의 이후 행로를 예측하게 하는데, 단지 상상만으로 그 나머지를 독자 스스로 채우게 함으로써 시의 공감을 극대화하는 힘을 함축한다.


계단마다 상처투성이다 부서지고 깨어져 떨어져나간 잇바디마다
숭숭 바람이 들고 난다
이 길을 오르는 동안 꺾어진 계단 닮아가는 아낙
누군가 휘어지려는 허리 밟고 오르나
뼈마디 욱신거리는 소리 두터운 난간처럼 둘러선다
주저앉은 하늘에 이마주름 짓눌렸다 펴지던 계단이 날개 모양이다
저 아래 바닥부터 산정까지 날개와 날개를 이어놓은 것 같다
시멘트에서 떨어져 나온 모래들이 몸 부비며 우는 골목길, 구부렸
다 펴는 날개의 연대기 층층이 쌓여 있다
해 떨어지면 어둠이 가장 먼저 찾아드는 마을
상처 입은 부리로 켜놓은 등불이 하늘 환하게 밝혀주는 곳
어스름 속으로 묻히는 숨소리가 둥지 야무지게 떠받치고 있다
깃털 위에 지어놓은 집 흔들리지 않도록 꺾어지고 꺾어져 계단이
된 날개를 헤쳐 너덜거리는 골목 들어 올리고 있다


─조규남, 「골목을 들어 올리는 것들」 전문


  도시정비사업, 또는 재개발이라는 이제는 많이 자취를 감추고 설령 남아있다 하더라도 도로와 아파트 단지 등으로 예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속칭, ‘달동네’의 전경이 떠오른다. 더불어 고단했지만 희망이 있었던 시절에 대한 시인의 무한 애정이 함께 느껴진다. “저 아래 바닥부터 산정까지 날개와 날개를 이어놓은 것 같다”는 부분에서 더욱 그렇다. 직선이 아니라 “꺾어지고 꺾어”진 계단의 형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구부렸다 펴는 날개의 연대기”를 읽을 수 있는 시인의 눈에는 그것은 “시멘트에서 떨어져 나온 모래들이 몸 부비며 우는 골목길”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함축한 대상이 된다. 매일이 고난이 ‘상처 입은 부리’로 드러나지만, “해 떨어지면 어둠이 가장 먼저 찾아드는” 위치가 삶의 신산辛酸을 뼈저리게 각인하지만 그래도 몇 개의 등불이 “하늘 환하게 밝혀주는 곳”이라는 지점에서 시인의 긍정적 세계관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조규남 시인은 이를 더 강조해서 “어둠 속으로 묻히는 숨소리가 둥지 야무지게 떠받치고 있”음을 본다. ‘야무지게’라는 시어 하나가 발휘하는 위력이 시인의 가치관을 명료하게 뒷받침한다. 이것은 곧바로 ‘골목을 들어 올리는 것들’이 어떤 계획이나 지정에 따라 풍문이나 뜬소문에 춤을 추는 지가地價나 프리미엄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2.
  현대인의 특성을 지적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무수한 어휘들 중에서 ‘번아웃 신드롬burnout syndrome’이 있다. 우리말로는 ‘탈진증후군, 소진증후군, 연소증후군’ 등으로 번역된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에너지가 다 소모되어 극심한 무기력증이나 자기혐오, 직무거부 등의 병리적 증상을 보일 때를 일컫는다. 문제는 이것이 희귀하거나 특수한 계층, 연령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중·고등학생에서부터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일반적 사회현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 ‘멍때리기’ 대회와 같은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필자도 어떨 때는 ‘살아내는 거나, 살아지는 거나 피장파장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즉 인생에서 무슨 거창한 목적이나 의미를 지향하지 말고, 매 순간이 생의生意가 충만한 창조적 발현發現이길 기대하지 말고 그저 그렇게 지나가도 그만 아닐까, 회의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뭇 생명은 자기 목적성을 갖는다. 재귀적으로 자기 지시적이기도 하다. 즉 우리가 의사소통의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기에 서로 정보를 교환할 수는 없지만, 길가의 잡초 하나도 아침에 울고 간 박새 한 마리도, 아니 이름도 모르지만 이 순간에도 날아드는 총알과 포탄 아래서 울부짖는 시리아 민중이나 미얀마의 소수민족 로힝야족 마저도 자기 생명을 보중保重하면서 인정받고 싶어 하고, 주목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시는 마땅히 자기를 돌보는 것만큼 동시대의 세계를 보살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의미와 가치 있는 삶을 기록하려는 시인의 노력에 걸 맞는 자세일 것이다. 전주호 시인은 ‘대상포진’을 통해 바로 앞에 언급한 문제를 다시 환기하고 있다.
 
왼쪽 옆구리가 이상하다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근질근질
불만 가득한 입 잔뜩 내미는 것이다


뿌연 물안개가 낀 것처럼 어지럽다
생의 중심 쪽에 박아놓은 말뚝들

움찔움찔 삐져나와 바람에 삐걱거린다
생각날 듯 말 듯
길 잃은 언어들이 바닥으로 쏟아져 내린다


쩌릿쩌릿!
갈비뼈 신경을 타고 다니며
알 수 없는 모르스 부호를 타전한다
바늘다발을 꽂아놓은 것처럼 마구 쑤셔댄다


뭔가 잘 못 됐다 싶어
욱신거리는 부위를 달래듯 살짝 문질렀는데,
앗뿔싸! 기다렸다는 듯 반점들 시뻘건 날을 세우는 거다


늑골 속으로 파고드는 예리한 칼날들
밤새도록 왼쪽 옆구리를 훑고 다닐 때마다
뼛속까지 저미고 시리다


앞만 보고 내달리던
그녀,
앞에 날아든 경고 문자 한 통!


-당신은 방전되었습니다


─전주호, 「방전-대상포진」 전문


  ‘번아웃’을 한참이나 말해놓고 또 ‘대상포진’을 상술하는 것은 중복일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 용케 걸려본 적이 없어 그 증상에 대해서는 체험적으로 서술할 수는 없지만, 대략 ‘대상포진’은 과로나 불안과 같은 이유로 면역체계가 약해 졌을 때 일종의 곰팡이 균이 몸 안을 돌아다니면서 극심한 통증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심하면 장기가 훼손되어 위험하다고까지 하니, 얕잡아 볼 수 없는 증상인 것은 확실하다.
  시인은 1~5연에 걸쳐, 이 대상포진의 증상을 “근질근질→어지럽다→쩌릿쩌릿!→반점들(발진)→(뼛속까지) 저미고 시리다”며 진행 상황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와중에도 “생의 중심 쪽에 박아놓은 말뚝들/움찔움찔 삐져나와 바람에 삐걱거린다”는 수월한 표현을 획득하는데, 이 부분은 뒤의 “앞만 보고 내달리던/그녀”와 호응하면서 ‘방전’의 필연성을 이끌어낸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일, 특히 몸이나 건강과 관련해서는 주체적으로 행동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 사태의 심각성은 외부에서 알려온다. 바로 “날아든 경고 문자 한 통!”처럼. “당신은 방전되었습니다” 이 경고가 날아들기 전에 문득문득 ‘멍’이라도 때려보는 여유가 다가오는 가을 삶을 조금은 풍요롭게 해 줄지도 모르겠다.
  김용균 시인은 솔직 담백한 ‘군말’을 통해서 ‘삶의 기록으로서의 시’의 가치를 다시 환기해준다. 대상이 꼭 ‘잡초’여서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작품 그대로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높은 데 보란 듯이 요염하거나
양지쪽의 여염한 풀꽃들에만
요란스레 환호하지 말고
아무데고 오그르르 뭉쳐나서
서로들 푸른빛만 닮아가는
저 잡초들을 가만 바라볼 일이다.
착하고 어진 땅이 그저 좋아서
그늘지고 외진 곳도 꺼리지 않고
온 산하에 지천至賤으로 살고 있는,
그래서 천하디천하다고 너흴 얕보고

이름도 모르는 대수롭지 않은 풀로써
다 싸잡아 정의定義 내리고,
어디 그뿐이랴,
멀쩡한 제 이름 놓아두고
무명초無名草라고 마음대로 불러왔다만,
이제 대수롭지 않은 것들에게
먼저 경건해야 할 일이다.


─김용균, 「잡초에 대한 군말」 부분


  잘 가꿔진 나무와 숲의 소중함을 모르는 이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착하고 어진 땅이 그저 좋아서” 무리지어 살면서 우리의 소중한 땅을 꽉 움켜쥐고, 바람이나 빗물에 날리거나 씻기는 것을 최대한 막음으로써 이 땅이 사막이 되는 것을 몸으로 막아내고 있는 ‘잡초’의 위대함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 소중한 ‘잡초’에 대한 ‘군말’에서 어떤 정치적 함의含意 이전에 생명에 대한 ‘경외敬畏’를 찾아 볼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본지 주간. 시집 『끝을 찾아서』, 『한밤의 못질』, 『오래된 약』,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단단斷斷함에 대하여』,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상상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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