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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문학 수록작품(전체)

18호/특집/오늘의시인/박상천/낮술 한잔을 권하다 외 2편




낮술 한잔을 권하다 외 2편




박상천



  낮술에는 밤술에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넘어서는 안될 선이라거나, 뭐 그런 것. 그 금기를 깨트리고 낮술 몇 잔 마시고 나면 눈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햇살이 황홀해진다.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은 아담과 이브의 눈이 밝아졌듯 낮술 몇 잔에 세상은 환해진다. 
  우리의 삶은 항상 금지선 앞에서 멈칫거리고 때로는 그 선을 넘지 못했음을 후회하는 것.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라. 그 선이 오늘 나의 후회와 바꿀 만큼 그리 대단한 것이었는지.
  낮술에는 바로 그 선을 넘는 짜릿함이 있어 첫 잔을 입에 대는 순간, 입술에서부터 ‘싸아’ 하니 온몸으로 흩어져간다. 안전선이라는 허명에 속아 의미없는 금지선 앞에 서서 망설이고 주춤거리는 그대에게 오늘 낮술 한 잔을 권하노니, 그대여 두려워 마라. 낮술 한 잔에 세상은 환해지고 우리의 허물어진 기억들, 그 머언 옛날의 황홀한 사랑까지 다시 찾아오나니.










사랑에 관하여



눈을 어깨 가득 지고 서 있는
겨울나무들이 들어찬 숲길을 걸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걷다
뒤를 돌아보면
눈 위의 선명하게 남겨진 자국들.
그 발자국을 바라보며
받아들임의 아름다움을 생각했다. 




눈은 나의 몸무게만큼의 깊이로,
신발 크기만큼의 넓이로
신발 모양 그대로의 무늬로
나를 포근하게 받아들였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런 것,
자신의 가슴에
그의 깊이를
그의 넓이를
그리고 그의 선명한 무늬를 남기는 것.










<신작시>


손톱을 깎으며 외 2편



나는 손톱을 바짝 깎아야 직성이 풀린다.
조금이라도 손톱이 길면
그것을 그대로 두고 보지도 않는다.




어쩌면 손톱 깎기와 같은 버릇이
나의 일상에도 그대로 들어 있는지 모른다.
손톱을 깎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잘 내색을 하진 않았지만
그에겐 나의 손톱깎기와 같은 삶이
얼마나 못마땅하고 답답하고 불편했을까
손톱을 조금 남기고 깎는 여자와
손톱을 바짝 깎는 남자가 만나
그래도 그런대로 살아왔다.




손톱을 깎고 있으면
옆에서 보다가 ‘안 아파’ 하고 묻고
‘아프긴 왜 아파 시원하기만 하구만’
하던 아내와 남편이 있었다.










프리미어 리그



프리미어 리그 시즌이면
식구들 모두 잠든 한밤중이건 새벽이건
거실에 혼자 앉아  
텔레비전 중계를 보며 즐거워하던 당신,
잠이 많던 당신이
자지 않고 축구경기를 보는 것이
참 신기하기도 했다.




그래도 당신이 있을 땐 간혹 옆에서 얻어보고
밖에 나가선 아는 척도 했지만
당신이 떠난 후
지금까지 프리미어 리그건 유럽 챔피언스 리그건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캘린더는
아직 2012년 7월인 채 안방에 걸려 있지만,
프리미어 리그도, 유럽 챔피언스 리그도
내 일상에선 사라져버렸다.




오늘 새벽엔,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프리미어 리그를 보았다.
중계를 보며 열심히 코치를 하거나
나에게 설명을 해주던
당신 목소리는 무음.










전원




자꾸 저전력 모드로 들어가는 날이 많아지고서야
그가 나의 전원이었음을 깨닫는다.
그의 웃음만이 아니라
도란거리는 일상의 말소리나
술 적게 마시라는 잔소리까지도
나를 충전시키는 전원이었음을,
내가 그곳에 선을 대고 있었음을.




그 전원이 끊긴 후,
빨간색의 저전력 모드 경고가 들어오고서야
그와의 일상이 바로 전원이었음을 깨닫는다.










<시론>



  30대 때엔 40대가 되면 조금 나아지려나 했고 40대엔 50대에, 50대엔 60대가 되면 좀 덜 바쁘고 덜 어수선하리라 기대했지만 우리 삶은 늘 그러한 기대를 배반하고 만다. 책상에 앉아 있지만 시를 쓰는 시간이 거의 없다. 어떤 때는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공부를 하는 일도 학생들 가르칠 걸 준비하는 것도 결국은 내 삶의 모습이다.
  얼마 남지 않은 정년 후엔 시 쓰는 일에 열중할 수 있을까? 그것도 그때 가봐야 알 일이다. 시를 쓰는 일도 늘 그렇다. 처음 시작을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전개되어 갈 지는 알 수가 없다. 시를 써나가다 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길로 빠지기도 한다. 어쩌면 그래서 시를 쓰는 재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시가 마음 먹은 대로 써지거나 뻔하게 전개된다면 그 얼마나 재미가 없을까? 우리들 삶과 시는 예상한 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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