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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문학 수록작품(전체)

18호/특집Ⅱ 겨울 시 시의 겨울/정승열/겨울과 시


겨울과 시


정승열



  Ⅰ. 들어가기
  겨울은 4계절 중에서 가장 정적이고, 시련을 받아들여야 하는 계절이고, 사색과 함께 삶을 관찰하는 철학적인 계절이고, 인생을 반추하는 계절이다. 또한 겨울은 어느 계절보다 단절되고 격리되고 고립되고 힘겹게 지내야 하는 계절이다. 그래서 겨울은 상실감과 절망, 이별과 버림, 공허와 허탈의 감정을 깔고 있다.
  그러나 한편 겨울은 새 세상을 맞이하는 감격과 기쁨이 존재하는, 삶의 스펙트럼이 큰 계절이다. 봄의 사랑이 부드러운 솜사탕 같고, 여름의 사랑이 싱싱하고 역동적인 꿀 같고, 가을의 사랑이 잘 숙성된 와인 같다면 겨울의 사랑은 초월의 세상을 여는 한약 같은 것이다. 그래서 겨울은 은폐와 용서를 허용하는 넉넉함이 있다.
  이 글에서 소개되는 시에는 나의 시도 들어 있다. 변명하자면 원래 주문이 나의 시를 중심으로 겨울을 이야기해달라는 부탁이었는데 나의 시가 대중적이지 못하고 해서 일부만 인용하고 다른 시인들 시를 몇 편 골랐다.


  Ⅱ. 상실과 이별
 겨울을 주제로 한 시들 중에 가장 흔한 것이 사람으로부터의 격리와 단절 그리고 이별의 이미지이다.


한 두름 사설을 엮고 있는 솔나무
뒤에서
맴돌기만 하다가
이제 떠나야 하는 나의 바람


어제까지 손바닥에 흥건하던
흙 내음
살 내음
돌아보면 둥둥 떠 사라지고


어제 올린 염불처럼
숲에는
첫눈이 내린다.


되돌아보지 않을 거야.
훌훌
눈송이에 섞여서
눈송이인 양 날리며.


참고 참아 흘리는
그대 울음소리에도
절대 되돌아보지 않을 거야.


눈송이 사이 숨어 날면서
숨어 그대를 돌아보며


―졸시 「이별 離別」 전문


  이별은 가장 가슴 아픈 사건이다. 더구나 사랑의 이별은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의 상처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쓰다듬고 다듬어 언어화 하는 것이 시이다. 겨울이라는 계절에 와서야 그동안 허물려고 애썼던 서로의 벽을 끝내 허물어내지 못하고 돌아서는 아픔을 첫눈이 보듬어 주고 있다.


  Ⅲ. 은폐와 관용
  겨울은 눈의 계절이다.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다.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동심에 불을 지핀다. 수많은 동화가 그래서 겨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겨울눈은 춥고 배고프고 지친 삶의 시련을 나타내 주기도 하지만 한편 추하기만 했던 인간 세상을 살짝 덮어 주고 푸근하게 보듬어주는 맛도 있다.


지금 눈 오신다고
북촌 친구가 문자를 주었다
빗줄기 내다보며 나도 답했는데
금방 또 왔다


내가 사는 마을에는 씻어낼 게 많고
그의 마을에는 덮어 가릴 게 많아서라고


―유안진 「필요 충분 조건으로」 전문


  우리가 사는 세상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한 세상이 아닌 것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늘 어느 구석에선가는 음모가 있고 폭력이 있고 갈등이 있다. 이런 세상에 태연히 몸담고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다. 이런 현대인의 마음을 눈과 비가 잠시 보듬어 주고 있다.


  Ⅳ. 사색과 반추
  겨울은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기회가 많이 주어진다. 추위 때문이기도 하고 눈이라는 물리적 장애물 때문이기도 하지만 겨울은 우리를 이웃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자연으로부터도 단절을 당하여 혼자 남게 만드는 계절이다. 그래서 생각을 많이 하고 사색의 깊이가 어느 때보다도 깊다. 살아온 과거 발자취를 끊임없이 반추하고 토해내는 계절이다.


대들이 휘인다
휘이면서 소리한다
연사흘 밤낮 내리는 흰 눈밭 속에서
우듬지들은 흰 눈을 털면서 소리하지만
아무도 알아듣는 이가 없다
어떤 대들은 맑은 가락을 지상地上에 그려내지만
아무도 알아듣는 이가 없다
눈뭉치들이 힘겹게 우듬지를 흘러내리는
대숲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삼베 입은 검은 두건을 들친 백제 젊은 수사修士들이 지나가고
풋풋한 망아지 떼 울음들이 찍혀 있다.
연사흘 밤낮 내리는 흰 눈발 속에서
대숲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밤중 암수 무당들의 댓가지를 흔드는 붉은 쾌자 자락이 보이고
훨훨 타오르는 모닥불을 넘는
미친 불개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송수권 「눈 내리는 대숲 가에서」전문


  겨울 대숲에서 들려오는 사각거리는 수많은 대화 속에서 시인은 백제를 반추하고 무당의 쾌자 자락을 건져 올리고 있다.


  Ⅴ. 은밀한 세계와 해방감
  겨울 그리고 폭설은 일시적으로 모든 이웃과 세상으로부터 두절의 상황을 우리 앞에 가져다  준다. 그런데 이 상황은 어떻게 받아드리느냐에 따라 또 다른 모험과 흥분을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


명왕성에 자원 근무 나간 그에게서
e-mail이 왔다
올겨울 방학, 폭설에 교통 두절되면 꼭 놀러와
이곳은 인력이 미미한 곳
탱자처럼 작은 태양은 누구도 감시할 수 없어
우리 원 없이 함께 타락해 보자
살기 좋은 곳도 쌨는데 왜 거기까지 자원해 갔는지
내 책갈피 속 끼워둔 그의 머리칼 아직도 새까만데


명왕성, 달력에도 없는 요일에 깨어나
잠에 취한 도시를 달려가 보는 맛!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무덤에서처럼
몸 속에 안개만 가득한 사람들!
탁자 위에 자신의 미라를 올려놓고
천천히 붕대를 풀며 노래부르는 멋!


언젠가 그의 초청을 받아들여야지
죽어도 썩어 문드러지지도 않는 집들,
이제 손자 볼 때가 도래할 나에게
내 엄마가 아직도 시집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곳,

이십 년 전의 그 놈이 아직도 하나도 안 늙고 숨어 있는 제방,
언젠가 그곳에 가야지


―김혜순 「명왕성」 전문


  명왕성에 가는 첫 번째 모티브가 폭설이다. 그리고 교통두절, 이런 상황을 만나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해방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껏 몸을 칭칭 감고 있던 어떤 규제와 제약이 사라진 세계에서 순수했던 옛사랑이 민낯을 드러내고 손짓하고 있다.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 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이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띄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리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문정희 「한계령을 위한 연가」 전문


  고립과 단절은 외로움과 고독이라는 병폐만 가져다주는 것은 아닌가 보다. 짓궂은 이웃에게 시달림을 받았거나 여기저기서 사람에게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가끔 스스로 단절과 고립을 찾기도 한다. 폭설로 인한 고립을 전제로 모험과 흥분이 가득한 상상의 나래를 만들어 간다. 더구나 그 상상 속에 못잊을 사람이 등장하면 죽음도 두렵지 않은 열정이 불타오른다.


  Ⅵ. 나가는 말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시인들이 겨울을 배경으로 시를 남겨왔다. 더 많은 시들을 소개하고 싶었으나 한정된 지면 안에서 뼈대가 되는 시들만 골라 잠시 소개를 했다.





*정승열 1979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 새가 날개를 퍼덕여도 숲은 공간을 주지 않았다』, 『단풍』, 『 단풍 2』,『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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