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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문학 수록작품(전체)

18호/신작특선/이희원/자존自尊 외 4편


자존自尊 외 4편


이희원



  추락하는데 날개가 펴졌어? 줄 뒤에서 누군가가 확 밀었지 순간 날개를 생각할 틈도 없었지, 내 차례도 아니었어. 추락할 때는 콘돌의 날개를 타고 안데스고원을 날아 양떼 목장으로 떨어지고 싶었지.


  줄 풀린 번지점프였어, 피톤치드 향, 잘려진 고목에서 나는 낡은 책 냄새도 없었어, 벌새의 여린 날개 짓도 없이 수챗구멍 속으로  처박혔어, 내가 그토록 쏘아올린 말풍선들은 다 어디로 간 거니, 밤새 허풍을 담아 공갈빵처럼 부풀려놨던, 끌어올리지도 못하고 한방에 다 터진 거니. 피 한 방울 흘리지도 못하고 숨 한 번 내 쉬지도 못한 채.


  당신과 나의 아비규환의 날들, 돌멩이가 발끝에 걸려 비명을 지르던 날들 아직도 당신을 기억하는 것은 당신과 내가 이 땅에 살았다는 희미한 증거인지 몰라, 누군가 기역은 삶을 거역하는 유일한 형식이라고 했던가. 올라갈 수 없다고 쳐다볼 수 없는 것은 아니나 떨어진 자에게 절벽은 통설通說이 된다. 하찮은 자들의 자존심이란 높은 곳에서 보면 정말 가소로운 것일까*, 어떤 것들은 저토록 눈부시게 떨어지는데.


  * 마키아벨리 「군주론」에서





요일들이 쏟아져 나왔다



도시 하나가 사라졌다
깊은 통증이 전두엽 한켠을 손상했다


그를 만나던 찻집과
그를 만나러 가던 메타세쿼이아길이
사라졌다


도시가 없어지자
길을 잃은 나는
네거리에서 퍼즐놀이를 해야 했다


도시가 사라지는 건 자신만의 일,
이제는 없어진 공중전화가 놓였던 자리처럼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


도시가 없어지자
요일들이 따라 사라졌다
처음엔 목인 길어진 월요일이
다음엔 가슴이 뜨겁던 금요일이
그 다음엔 기다릴 필요 없던 날들까지
엉키면서 사라졌다


텅 빈 일정표처럼 내 문장도
언제가부터 비문으로 변해갔다


요일들이 사라지자
그의 마지막 온기도 차문을 열고 떠났고
갇혔던 문장들이 문 밖으로 달아났다


도시가 사라지는 건 오직 당신만의 일,
나는 도망간 요일들을 찾으려 오늘도 분주하다





디코이*



  그녀가 갔다. 나는 타조 탈을 뒤집어쓴 채 그녀를 보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타조여야 했다 머리를 곧추 세우고 늠름하게 달려야했다. 어느 날엔가 타조 알 속에서 오리 알 하나를 발견한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바치던 무지개 색 타조 알에 입고리가 올라가던 그녀였다 한 번은 뾰족한 주둥이가 그녀의 입술을 공격한 적이 있었다. 나는 너무 사랑해서 생긴 일이라며 진한 포옹을 했다.


  나의 꼬리가 밟히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그녀는 탈을 벗기려고 안달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나는 번데기처럼 알집 속으로 숨어들었다 사랑은 서로를 쉽게 길들이는 몰약 같은 것인지 모른다. 약기운이 떨어진 그녀가 당신은 그림자가 없나요 라며 묻기 시작했다 나는 당신의 몸에다 수많은 간절함으로 한철 꽃피우고 떠날 수 있다고 믿었었다 당신은 그 간절함이 어느 순간 지겨워졌는지 모른다.


  그녀가 갔다. 탈이 벗겨지자 머리가 휑하더니 심장이 멈췄다 내 심장은 그녀를 위해서만 작동되는 장치였나 보다. 나는 그녀에게 생명이 끝나는 날 맞게 될 해체를 같이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했다 나는 더 이상은 무언가로 분류되고 싶지 않다 거울에 비친 나는 그저 물리적인 반사체일 뿐, 나는 나를 아직도 모른다. 어쩜 처음부터 그녀나 나나 타조였는지도 모른다. 어느 저녁 떠돌다 다시 만나게 될.

 

*decoy : 사냥에서 들새나 들짐승을 사정거리 안으로 유인하기위해 만든 모형 새, 미국 원주민들은 타조를 잡기 위해 타조 탈을 썼다나.





다크 고디바*



  나는 훔쳐보는 사람을 좋아해요 그때 코튼베리 城에서 양복쟁이 톰**만 훔쳐보았다는 말이 있긴 하죠. 전설은 세월이 가면서 부풀려지죠. 말을 타고 달리던 16살 성주 부인의 나체쇼, 누가 안볼까요. 그건 금발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요. 전설은 우리를 속게 하죠. 아무도 뒤집어보려고 하지 않아요. 전설은 동굴의 우상일 수도 있어요.  나는 sns 뒷면을 훔쳐보길 좋아해요 셀카가 아닌 독사진을 누가 찍어주었을까요. 그때는 한 여자의 연보에 슬쩍 이름을 올리고 싶었던 거죠. 자고나면 아이돌처럼 전설이 태어나고 자라죠. 위정자들은 누구나 전설을 만드는 버릇이 있죠. 저항할 수 없는 전설이 되는 전설 말이죠. 나는 당신들의 뒷면을 훔쳐보는 버릇이 있죠. 가면 뒤에 숨은 실체를 만져보고 싶어요. 그래도 안보이면 벗겨보고 싶어요. 지상에서 가장 예쁜 포장질 벗기고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거죠. 이제 전설을 믿지 않기로 해요. 그날 고디바의 알몸을 안 본 신하들은 아무도 없었을 거야요. 지금 우리도 포장질 벗기려 안달하잖아요. 발렌타인데이라나 뭐라나요, 참 당신 혀는 제가 접수할게요. 달콤하고 쌉쌀하게 녹여 드릴게요, 그러나 저를 만나는 동안 그 혀 다른 데로 돌리면 절대 안돼요.


  *11세기 영국코튼베리성 영주의 부인이며 남편의 폭정을 고치기 위해 전라로 말을 타고 성을 돌았다는 전설이 있음, 훗날 벨기에산 초코렛 상표가 되었음.
  **peeping tom이라고 하며 관음증의 속어임, 전설에 의하면 주민들에게 맞아 장님이 되었다고함.





warm blanket* 혹은 여우목도리



내 목구멍에서 종이 찢기는 소리가 난다
꾸역구역 집어넣었던 것들이
찢겨지 나오고 있다


그녀가 떠난 후로 늘 뼈가 시렸다
아니 팔장을 걸었던 팔목이 싸늘했다
아침이면 안경알에 서리던 하얀 부호도
새겨지지 않았다


한때 내 몸에 살았던,
나를 달뜨고 열 받게 했던 수많은 말들이
빠져나가자 내 몸은
불 꺼진 구들장처럼 식어갔다


“36.5도씨,
당신은 분명 저 체온증은 아닙니다.
우선 이 담요로 온몸을 감싸보세요
시간당 0.5도 씩 상승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체감 온도는
단 1도도 끌어올려주지 않습니다”


추억의 열량은 몇 칼로리 쯤 될까
추억 몇 덩이면 내 구들장을 덥힐까
빠져나간 그녀의 열량이 내겐 치사량일까


“참, 선생님 2차 처방전은 여우목도리입니다”


  *경증 저체온 증의 치료요법





<시작메모>


다시 莊子다



  옛날 탕 임금이 현자였던 극에게 물었지 ”불모지 북쪽 검은 바다에 붕이라는 새가 있지 등은 마치 태산 같고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아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리를 날아올라 구름을 뚫고 푸른 하늘을 등에 진 뒤에야 비로소 남쪽바다로 날라 가지 메추라기는 그걸 보고 웃으면서 말하지 저놈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군. 나는 폴짝 뛰어 올라야 몇 길 지나지 않고 내려와서 쑥대밭 사이에서 날개 짓할 뿐이지만  이것도 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지 그런데 저놈은 대관절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군.


―「莊子 消遙遊편」에서


  장석이 제나라에 갈 적에 천수를 누린 어마마한 상수리나무를 보았는데 그 크기가 수천 마리의 소를 가릴 만하고 둘레는 백 아름 헤아릴 정도여서 제자가 이를 베자고 하자 장석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잠자코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쓸모없는 나무다. 배를 만들면 가라안고 관이나 곽을 만들면 빨리 썩고 그릇을 만들면 쉽게 부서지고, 대문이나 방문을 만들면 수액이 흘러나오고 기둥을 만들면 좀이 먹으니 이 나무는 쓸모없는 나무다. 쓸 만한 구석이 없기 때문에 이처럼 수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莊子 人間世편」에서


  이즈음 시국이 어수선하여 다시 장자를 읽는다. 2,000년 전 전국시대나 지금이나 늘 亂世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길인지, 다시 2,000년 쯤 지나면 해답이 나오려나?
  어쨌든 이 한생 시 쓰기는 정말 잘한 것 같다, 비록 메추라기의 날개 짓이지만.





*이희원 2007년 계간 《시와세계》로 등단. 2015년 시집 『코끼리무덤』(2015년 세종도서문학나눔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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