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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문학 수록작품(전체)

18호/신작시/허림/가을밤은 너무 폭력적이네 외 1편


가을밤은 너무 폭력적이네 외 1편


허림



단풍이 지고
저녁놀이 어스름으로 짙어지는 가을 오두막으로 가는 중이었네
조만간 저녁이나 하자는 문자를 받고
망설이며 문을 열다가 우편함에 꽂힌 편지 한 통을 보았네
벌레 먹은 갈잎이었네
동그랗게 어둠이 배어있었네 
나는 아무 뜻 없이 꺼냈네
꺼내기 전에 좀 더 나뭇잎에 대해 생각했어야 했네
마른 햇살 냄새도 맡지 말아야 했네
인연이라 여기지 말고,
저 생의 생리적인 것이라고
다 저런 과정을 지나는 것이라고
상투적으로 읽어야 했네
우정 하찮고 뜻 없이 읽었어야 했네
낯설게 그대의 말투로 읽으려한 게 잘못이었네
그냥 사랑하며 사는 일을 꿈꾸어야 했네
한 장의 나뭇잎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했네
내가 읽은 문장은 마른 갈잎일 뿐이라고 썼어야 했네
어떤 마음도 주지 말았어야 했네
누구도 저 나뭇잎이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르네
그 생의 처음이 거기였을까
만약 거기였다면 거기서 무엇을 또 꿈꾸었을까
세상은 꿈을 꾸라하네만
내 꿈꿔왔던 세상이 이젠 무서워지네
여정처럼 머문 낙엽의 문장을 있는 그대로 읽어야 했네
뻔한 생의 성찰이나 반성은커녕
아무런 감상도 없이
저녁 뉴스를 보다가 연속극을 보다가 잠들었어야 했네
저녁이나 하자는 문자를 까맣게 잊어버리듯이
가을밤은 너무 폭력적이네





바닷가에서 보낸 세 번째 봄날



그 영화의 끝은 보지 않았다
밖에는 벚꽃이 하르르 날리던 봄날이었다
신발 들고 걷던 바닷가 모래톱 언저리에
조개껍질 가지런히 쌓이던 저물 무렵이었다
산책 나온 개가 영화의 발단처럼 저녁 해를 바라보며
또 해바라기하는 갈매기를 향해 달리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갈매기들의 날갯짓 소리와 울음소리와 파도 소리가
봄의 몽상처럼 울려 퍼지던 저녁답이었다
보고 싶어도 앞으로는 혼자 삭이도록 하세요
독백처럼 읊조리는 파도의 끝자락이 모래톱 위 발자국을 지우며 사라지고
어둠이 와 또 다른 갈등을 암시하곤 했다
영화처럼 삶의 어느 대목은 긴장 되고 또 끝나거나 시작되었다
끝을 보겠다는 것은 비극이다
또 시작한다는 것은 비애다
독백 혹은 잔영만이 남은 생의 끝점에는
생장점처럼 슬픔의 감각들이 조밀하게 엉켰다
개구리 울음이 생생하게 들리는 저문 저녁
한 촉 밀어올린 난 분을 들고 와 속삭이던 날이었다
밖에는 벚꽃이 하르르하르르 날리고
그 영화의 끝이 궁금하지도 아쉽지도 않았다
여느 봄날 저녁처럼 파도소리가 멀리 밀려갔다 왔다





*허림1988년<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말주머니』, 『거기, 내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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