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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문학 수록작품(전체)

22호/산문/정치산/가끔은 마음의 길을 따라 걷는다


가끔은 마음의 길을 따라 걷는다


정치산



우리 집에는 지가 사람인 줄 아는 겁쟁이 고양이 사자와 지가 고양이인 줄 확실하게 알고 있는 해맑은 고양이 레오가 있다. 지가 사람인 줄 아는 사자는 젖먹이였을 때 떨어져 우리 손에서 사 년을 넘게 살게 된 고양이고, 지가 고양이인 줄 아는 레오는 어미에게 독립해 나와서 제대로 못 살고 아이들의 괴롭힘으로 몇 날 며칠을 갇혀 있던 것을 우리 딸이 데려와 키운 지 일 년 정도 된 고양이다. 사자는 예민하고 면역력이 약하다. 길에서 자란 레오는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는 영양실조에 피부병이 있어 한참을 치료했다. 사자는 따라다니는 레오의 치덕거림이 귀찮다. 지가 고양이라는 걸 아는 레오는 저와 같은 고양이가 반가와 따라다니고 지가 사람인 줄 아는 사자는 다가오는 고양이가 귀찮다. 귀찮아서 피해 다니고 나에게 와서는 재가 귀찮게 한다고 이르듯이 무어라 무어라 한참을 중얼거리다 가는데 난 사자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한다. 우리 딸은 그래도 많이 알아듣고 사자가 원하는 것을 잘 들어주는 편이다. 사자는 말을 다 알아듣는 것 같은데 가끔 못 들은 척 시치미 떼는 느낌을 받는다.
외출 준비를 하는 나와 우리 딸을 보고 애교를 떨며 발목을 잡는 사자는 혼자 있기가 싫다는 표현을 하듯 계속 불쌍한 표정을 짓다가 뒹굴뒹굴 구르며 애교를 떤다. 문을 나서는 나와 딸을 보면서 불쌍한 얼굴을 하고 쳐다보며 배웅을 한다. 외출에서 돌아올 때면 초인종 소리에 후다닥 달려와 현관 앞에서 기다리다가 들어오는 걸 확인하면 시크하게 돌아서서 제 할 일을 한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그냥 나온 건 아니라는 걸 고양이를 보면서 가끔 생각하게 된다.
아직 사람과 사는 것이 낯선 레오는 언니 고양이가 보이지 않으면 야옹야옹 울면서 찾아다닌다. 그러면 귀찮아서 거실에 숨어있던 사자는 슬그머니 레오가 있는 방으로 가서 가만히 앉아 있다.
지가 사람인 줄 알고 있던 사자는 어느 날부터 고양이처럼 영역표시를 하고 다닌다. 혼자만의 공간이었던 집에 레오가 들어와 자신의 냄새를 묻히고 다니면서부터 두 마리의 경쟁이 시작된다. 작은놈이 묻히고 간 냄새를 다시 자신의 냄새를 묻히며 영역을 표시하고 그렇게 경쟁하다가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는 것 같다.
큰 고양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에 작은 고양이가 앉지 않는다. 그곳을 피해 멀리 떨어져서 앉는다. 가끔은 서로 앉으려고 다투기도 하지만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고 침범하지 않는다. 서로가 사이좋게 살아가는 방법을 만들어 가는 것 같다.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다가도 보이지 않으면 울면서 찾아다니고, 또 우는 소리를 들으면 무슨 일인가 들여다보면서 그렇게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어우러져 가는 모습을 본다.


두 고양이의 모습이 시간을 뛰어넘어 세상의 언저리를 서성거리던 이십 대의 어둡고 힘든 시절의 기억 속으로 나를 이끌고 간다.
서울살이가 힘들고 외로워서 일이 끝나면 음악다방에 앉아 밤이 깊도록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가장 힘들고 외로웠던 시절이었는데 돌이켜보니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에 빠져 있던 어느 날인가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어떻게 친하게 되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한참 동안 만났던 친구들이다. 직장에 다니는 친구, 재수하는 친구, 대학에 다니는 친구, 음악다방 디제이를 하는 친구, 다양한 군상들이 친구가 되어 몰려다녔던 시절이었다.
세상에서 동떨어져 있던 이방인 같은 우리는 시끄러운 80년대의 중반을 빈둥대는 영혼을 달래며 음악에 빠졌던 것 같다. 가끔은 멋진 디제이의 퍼포먼스에 반해서 음악을 신청하고 시간마다 바뀌는 디제이들의 다양한 모습을 감상하기도 하고 또는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나와 썩은 강물이 흐르는 다리에 앉아 술을 마시며 세느강이니, 템즈강이니 하면서 낭만적인 이름을 붙이려 애쓰기도 하면서 청량리 뒷골목 포장마차를 전전하였는지도 모른다,
앞이 보이지 않는 불안감과 이십 대의 허무함을 그렇게 풀면서 스무 살 언저리를 넘어선 우리들은 그 이후 군대로 직장으로 각자 흩어져 소식조차 들을 수 없는 사이들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십 대의 내 삶의 언저리에 그때의 빛나는 기억들이 가끔은 아름답게 다가온다.
가장 위험하고 어두웠을 그 시기를 그 친구들로 인해 나는 맑고 순수하게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치악산 아래 행구동 치마바위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관음전 한 귀퉁이를 서성이다가 머무는 산자락 바람을 불러놓고 커피를 마신다. 구불구불 꽃밭머리를 지나 레인보우를 지나 원주가 한눈에 보이는 야외 의자에 뜬구름 잡자고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인 무언가를 찾아서 이렇게 앉아 있다. 바람 적당히 불어오고 적당한 고요, 올드팝이 들려오는 한적한 풍경의 치마바위에 앉아 그리움을 마신다. 어제는 소금산 출렁다리에서 한 행을 출렁거리다가 돌아왔고 오늘은 치마 없는 치마바위에 앉아 추억을 마신다.
벚나무잎은 밤새 내린 비로 인해 더욱 붉어졌고 찬바람은 우루루 단풍잎을 떨군다.구겨진 마음의 생채기를 다림질하는 시간이다. 모두가 여유롭고 한가한 발걸음을 그린다. 나는 흘러가 버린 그때의 추억들과 친구들이 그리워 다시 커피를 마신다. 새끼고양이 한 마리 슬그머니 다가와 다리를 붙잡고 애교를 피운다.





*정치산 2011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바람난 치악산』. 제14회 강원문학 작가상, 전국계간문예지 작품상, 원주문학상 수상. 막비시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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