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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문학 수록작품(전체)

23호/신작특선/기명숙/공원 앞 목공소 외 4편


공원 앞 목공소 외 1편


기명숙



전기톱이 왜앵앵 진저리칠 때마다
귀속에서 파닥거리는 새들이
공원 쪽으로 달아났다
빗소리를 할퀴는 길고양이들의 괴성 같기도 했다


적막은 훌륭한 理國의 양식
목공소 앞 공원 가득 희거나 검은 빛이
쏟아졌다가 저녁을 우려낸 손아귀에서
종이컵처럼 구겨졌다


빗소리는 톱밥 먹은 새 소리
제 풀에 지친 화음만 식탁 모서리에 깨지고
나이테에 얼비치는 나무의 사생활은
뿌리에서 수없이 퍼 올린 파문과
울음의 문장들로 더 단단해진다


갈수록 거세지는 빗발이
삶의 모퉁이를 적셔가는 밤
수화기 저편 애인의 母國語는
길고양이들의 괴성처럼
톱밥 먹은 새소리를 빗소리에 가둔다





사거리



이명을 갉아먹던 귀속 쥐들이 쏟아져 자동차 굉음과 한통속이 될 때
점멸등이 오락가락 속내를 감추며 악어 눈깔처럼 번득일 때
계율에 따라 차들이 나란히 무릎 꿇을 때
횡단하는 사람들 눈빛 죄다 죄의 문장으로 읽힐 때
기절해 있던 육견들이 철망을 끊고 흉곽 쪽으로 달아날 때
앞차를 추월하는 순간 사이렌 소리 맹렬하게 핏자국 위로 뿌려질 때
퇴화된 새의 날개 뼈가 어둑해지는 하늘 위 구름으로 걸릴 때
고름처럼 흘러내리는 전신주 불빛들 점점이 노래질 때
비밀번호를 잃은 집주인이 현관을 붙잡고 애걸복걸 할 때
나도 인류사를 반납하고 싶다





러닝머신



저 여자는 그와 열애 중이었다
그의 호흡은 거칠고
치욕은 근육질이어서 아무리 밟아도 끄떡없다
거친 호흡과 마찰음은 여자를 유혹하는 기술
KO패 직전의 권투선수처럼 이를 악무는 여자
시간이 둥글게 태엽을 감고 있었다


계획된 경로는 이탈의 자유가 없으니
모호한 바깥과 안쪽 수많은 발길질에도 균열 없이
척척 들어맞는 아귀가 두려웠다.
365일 레이스를 이탈하지 못하던 저 여자
트랙 위 살을 깎아내리며 야금야금 몇 그램의 부피를 갉아먹다
오늘은 통째로 잡아먹혔다.
새벽부터 여자는 무서운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고
억, 소리와 함께 비명이 낭자했던 것


폴리스 라인이 쳐지고 비닐 팩에 담겨 여자가 들려나가자
죽음의 배후를 캐기 위해 그는 해체됐지만
죽어서야 남편에게 풀려날 수 있었던 404호 여자
러닝머신과의 열애가 행복했다던 저 여자





낙화



사랑은 애초에 짓이겨질 소식이었다고 벚꽃이 흩날리는 밤이다 꽃잎 가장자리에 지워진 추신을 해독 중이다





도서관



멧돼지를 씹어 삼키는 강한 아래턱이라야 활자의 맛을 볼 수 있다
책을 이해하는데 수천 그루의 잎맥을 독해하듯
송곳니 박고 말의 뿌리를 흡혈하고 있다
맹목의 소용돌이,
과녁이 빗나간 신념,
늙어가는 비유들이 유령처럼 어슬렁거리는 시간을 지나면
입 안 가득 활자의 새 잎이 돋아날 터이다





<시작메모>


어쩌다 객관적상관물을 통해 우주의 哲理를, 세계의 폭력성을, 내 열등감과 흥분됨을 말해야 하는 길에 들어섰을까? 골몰하던 회의론자는 펜을 버린 채 스스로 감옥에 투옥되었다. 시란, 제작하거나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라 본 ‘어떤 대상’을 옮기거나 사물 자체가 가진 특성들을 관찰, 그것이 말하는 것을 받아 적어야 함을 깨닫는데 10여 년이 걸렸다. 참으로 아둔한 죄인이다. 시적 관찰과 인식을 게을리 한 탓에 수감 기간은 더 늘어날 것 같다. 시를 생각하고 시를 쓰는 순간만이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할 수 있는 거라면 억울할 것도 없다. 다만 지금 내 손에 잔이 없지만 언젠간 시의 뮤즈와 건배 하고 싶다. 날이 춥다. 조만간 아나키스트처럼 외롭지만 용감한 눈이 내릴 것이다.





*기명숙  200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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