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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문학 수록작품(전체)

25호/시집속의 시/천선자/낡은 화로에 오랜 기억의 혈전


천선자


낡은 화로에 오랜 기억의 혈전
―정치산 시집 『그의 말을 훔지다』 , 허청미 시인의 시 「엉겅퀴 스위치」



고욤나무 윗부분을 쪼개어 감나무가지에 접을 붙여두면
아래 둥치는 고욤나무 위는 감나무가 되어 감이 열린다지.
나무가 훌쩍 자라면서 접붙인 흔적은 깨끗이 사라지지.
감접같다 감쩍같다 감쪽같다 걱정하지 마 넌 감쪽같아.


─「그의 말을 훔치다·8 -감쪽같아」 전문


전기를 충전한 달이 창가에 등을 켜고 나는 방바닥에 요를 깔고 잠을 청한다. 꿈속에서 꽃길을 달리다 길을 잃어버리고 길을 찾아 해매다 어두운 숲속에 갇힌다. 부엉이 올빼미가 어둠으로 빚은 울음을 토하고, 나무귀신이 내 목덜미를 잡고 나뭇가지 위에 걸어놓고 낄낄낄, 깜짝 놀라 눈을 뜨니, 눈앞에 커다란 지네 한 마리가 재빠르게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온다. 나무귀신에게 살려달라고 나뭇가지에서 내려달라고 울며불며 이불 속을 뛰쳐나온다. 정신을 다잡고 주위를 둘러봐도 달등만 희미하게 방안을 비추고 있다. 전등을 켜고 파리채로 이불 위를 내리치며 콩 타작을 하다가 모기약을 뿌린다. 방 안에 가득한 연기로 콜록거리면서 눈을 감고, 모기약을 하얗게 뿌리고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온다. 아침에 일어나 미소를 지으며 꼼짝없이 죽었을 거야, 그 방으로 들어가서 이불을 털어도 지네의 “흔적은 깨끗이 사라져”서 온데간데없다. 소파 밑에서부터 장롱의 문을 열고 서랍마다 다 털어내고 샅샅이 뒤져도 지네는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네, 어디 갔지, “감접같다 감쩍같다 감쪽같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핸드백이 하늘로 쏟았나, 땅으로 꺼졌나, 알다가도 모르겠어. 핸드백이 순식간에 사람을 바보 만드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 정도면 좀 심하지, 치매인가. 무슨 치매, 치매 같은 소리, 아직은 치매에 걸릴 나이는 아니지. 어이가 없어, 속없이 실실 웃다가 정신줄을 놓는다. 핸드백을 통째로 잃어버리고, 나라는 인간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무엇 때문에 오두방정을 떨었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외출하려고 콧노래를 부르며 옷을 갈아입는다. “걱정하지 마”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도 있잖아. 모든 걸 잃어버려도 넌 너니까. “걱정하지 마”, “감접같다 감쩍같다 감쪽같다” 그 순간은 감쪽같이 사라질 거야. “걱정하지 마” 넌 괜찮아.


사자의 포효가 묵음으로 편집되는 오후
동물원 외곽이 고요하다
길섶에 우뚝, 우직한 수문장 같은 엉겅퀴에 감전된다


허공을 물고 솟구친 검붉은 허의 돌기를 꽃이라 해도 되나
접근금지 독설 같은 초록 가시에 찔린다
창과 방패의 자웅동체 같은 속내가 궁금한
저 검붉은 꽃잎에서 피 냄새 날 것 같은
식물도감 속에 한 뙤기 거처를 얻어 명패를 걸었으니
너를 호명해본다, 엉겅퀴-


이생에서 아득한 그때
논두렁에 웃자란 망초 질경이 쇠뜨기 닮은 계집애의
여린 검지에 박힌 엉겅퀴 가시는 번개였다


긴 찰나의 이생에서
첫 통정의 밤이, 첫 분만의 아침이
해마의 낡은 화로에 오랜 기억의 혈전들이 녹아
마하의 속도로 찌르르-
아찔했던, 그때 눈물은 왜 흘렀을까


다락방에 먼지 쌓인 내 실록實錄의 스위치 같은
두근두근 새가슴이 되는 알싸한 트라우마 그 짜릿함으로
오버랩 되는
한 생의 통과의례 때마다 우직한 수문장 같던 환유다


─「엉겅퀴 스위치」 전문


“다락방에 먼지 쌓인 내 실록實錄의 스위치”를 누르면 세상에서 가장 빠른 여자가 되고 싶었던 꿈이 있다. 삶이라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고 깨져서 돋아난 오기의 돌기, “허공을 물고 솟구친 검붉은 허의 돌기”, “이생의 아늑한 그때”로 돌아가 마하*로 태어난다. 창과 방패로 무장하고, “마하의 속도로 찌르르”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바람처럼 번개처럼 적토마와 경주를 한다. 시작점이면서 끝 지점에 먼저 도착한 그 곳에서 “긴 찰나의 이생에서 첫 통정의 밤이, 첫 분만의 아침이” “통과의례 때마다 우직한 수문장 같던 환유” “해마의 낡은 화로에 오랜 기억의 혈전”으로 남은 내 꿈의 환유이다.


*마하, 음속 이상의 속도를 재는 단위, 달리기를 잘하는 켈트 신화의 전설에 나오는 여
  신. 왕의 강요로 말과 달리고 결국 도착하자마자 아기를 낳으며 죽은 여신의 이름.





*천선자 2010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도시의 원숭이』, 『파놉티콘』. 전국계간지작품상. 리토피아문학상 수상. 리토피아부주간. 막비시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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