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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문학 수록작품(전체)

25호/계간평/백인덕/말의 ‘육체성’에 관하여


백인덕


말의 ‘육체성’에 관하여



1.
늘 그래왔듯이 이번 글에서도 어떤 거창한 담론을 설계하기보다는 지난 호의 작품을 몇 편 고르고, 그 작품들의 저변에 흐르는 어떤 맥 같은 것을 생각하다 보니 ‘말의 육체성’이라는 거창한 제목이 붙게 되었다. 인류가 언제부터 음성 언어(말)를 통해 정보의 세밀한 부분까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전달하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일반적으로 의사소통의 중심적 역할의 변화는 어렵지 않게 되짚어 볼 수 있다. ‘몸짓→말→문자, 그리고 시청각 영상’이라는 의사소통 수단의 중심 이동은 지금 현재 새로운 인류(신생아)의 개인적 성장에서도 광범위하게 되풀이 되고 있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사실이라고 믿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문명사적 진보와도 맥을 같이한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이 변화는 의사소통이 겨냥하는 두 가지 큰 목적, 즉 ‘정보전달과 정서교환’ 중에서 정보의 위상이 정서의 표현이라는 측면을 압도하는 상황과 함께 가속화 되었다. 말하는 사람의 정황(정서적 상태)보다 ‘말의 내용’에 더 큰 의미가 주어지면서 ‘문자’는 의사소통 수단으로서 그 광범위 파급력만큼 절대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신뢰성을 동시에 획득할 수 있었다. 이는 우리가 ‘역사(쓰여 진 이야기)’에 얼마나 몰두하는지만 생각해봐도 쉽게 수긍이 간다. 하지만 시인들은 아직도 ‘정보’보다는 ‘정서’를 ‘전달’에서 멈추기보다는 ‘공감’을 지향하면서 여러 수단들의 ‘재정의re-definition’를 통해 표현의 가치를 되살리고 있다.
박혜연 시인은 ‘나무의 수화’라는 표제를 통해서 말의 육체성에 보다 더 주목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수화手話’란 불가피하게 음성 언어의 사용이 제한될 때 이를 대체하는 신호체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발화할 때 취하는 각종 ‘몸짓(제스처)’과는 다른 양상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어쨌든 그것이 음성 언어 이전에 위치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몸짓이 좋다
소리가 되어 귀에 꽂히는 말보다
모양이 되어 마음에 들어오는
너의 몸짓이 좋다


너는 먼저
새들의 하루를 조용히 풀어주고
너는 먼저
허공 중의 하늘을 받쳐준다
너는
쓸쓸한 이마를 짚어주며
가만 옆에 와 걷는다


소리 없이도 세상 모든 말인 너
월인석보에 새긴 부처님 말씀처럼
만리 밖 눈에 보는 듯
천년 전 귀에 듣는 듯
연두빛으로 번지는 너는
갑사 오르는 길을 환한 봄날로 돋아나게 한다


길을 채우고
하늘로 뻗어가는 너의 무한한 말
너무나 조용해서, 천지간 가득해서


온몸으로 속삭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를 그 길에서 들었다


─박혜연, 「나무의 수화-갑사를 오르며」 전문


세상의 모든 나무는 각기 다른 ‘나무의 육체성’을 갖는다. 물질성이 아니라 굳이 육체성이라 해야 하는 이유는 구성 성분의 차이가 아니라 모양의 차이가 일차적인 변별성이 되기 때문이다. 시인도 이 점에 주목하고 있다. 그래서 “소리가 되어 귀에 꽂히는 말보다/모양이 되어 마음에 들어오는/너의 몸짓이 좋다”고 단언한다. 이 부분에선 ‘소리/말’의 의미 구분이 있고, ‘(그냥)몸짓/너의 몸짓’의 차이도 드러난다. 우리는 나무가 계절에 따라, 시간(습도 등의 영향)에 따라, 대기의 상태(바람의 성질, 강도 등)에 따라 각종의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시인은 그런 소리의 변화를 통해 나무의 ‘말’을 듣기보다는 어떤 ‘몸짓(행위)’에서 더 큰 의미를 찾는다. 아니 형성한다. 그 ‘너의 몸짓’은 “새들의 하루를 조용히 풀어주”는 것이고, 먼저 “허공 중의 하늘을 받쳐주”며 나에게 “쓸쓸한 이마를 짚어주며/가만 옆에 와 걷는” 것이다. 즉 그 몸짓은 나에게만 독점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소리/말’로는 오히려 더 멀어지기만 할 뿐인 세계와 나를 이면裏面에서 연결해 준다. 이를 통해 “길을 채우고 하늘로 뻗어가는 너의 무한한 말/너무나 조용해서. 천지간 가득”한 말에 동참하며 시인은 자신의 말(시)의 이면을 또한 ‘온몸으로 속삭이는’ 것으로 재탄생하게 한다.
말을 공존을 지향하는 행위로 다시 보고자 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자연이 그 속성 자체로 드러내는 무자비함을 통해 ‘의미 이전의 생존’이 갈등하고 심지어 교환되는 장場으로 읽는 것은 더 더욱 어려운 일이다.


얼어붙은 바다가 자꾸 구멍을 닫고 있다
숨구멍을 뚫을 수 없다면
얼음 아래서 죽을지도 모르므로
바다표범은 송곳니를 얼음구멍 가장자리에 꽂는다
육중한 머리를 프로펠러처럼 쉼 없이 회전시킨다
사방으로 얼음파편이 휘날리고
알루로 들어가기만 하면 몸은 부드러워질 텐데,
물속에서도 얼음 위로 스치는 바람과
얼음을 잘 통과하는 햇살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해빙(海氷)의 두께가 얇은 곳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이빨 빠지는 그는 닫히려는 구멍의 수호자가 된다
지상에서 바다로, 바다에서 지상으로 닿으려는
그의 가쁜 숨들이 얼음을 깨뜨리고 있다


얼어붙은 바다가 한사코 숨구멍을 틀어막고 있다


─손창기, 「구멍들」 전문


봄이 와 상대적으로 얇아진 해빙에 숨구멍을 뚫어놓고 ‘지상과 바다’를 오간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북극 바다표범을 소재로 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런 정보는 나변那邊일 뿐이고, 필자는 작품을 열고 닫는 “얼어붙은 바다가 자꾸 구멍을 닫고 있다”와 “얼어붙은 바다가 한사코 숨구멍을 틀어막고 있다”는 비슷하면서도 질적으로 확연하게 드러나는 차이에 주목하게 된다. 전자, 즉 1행은 의도성이 드러나지 않는 자연(기온과 바람)의 일반적 현상을 사실 그대로 적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후자인 2연은 바다표범의 입장에서 자연의 무자비한 의도가 극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한사코 숨구멍을 틀어막”는 대상 앞에서 그 적의에 치를 떨지 않을 존재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시인은 이 비극적 상황에서 한 존재의 말, 그것은 하는 것이 아니라 듣기(“물속에서도 얼음 위로 스치는 바람과/얼음을 잘 통과하는 햇살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에 능숙해져야 하는 숙명을 읽어낸다. 갑자기 먼 극지의 바다표범이 도심의 한 복판에서 불쑥 자신의 숨구멍으로 머리를 밀어 올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2.
현재 우리는 ‘언어’(를 ‘통해/통과해서’) 사고 한다는 이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아직까지도 언어는 존재의 ‘집/짐’이다. 자기가 애써 구축한 언어로 표상되고 지칭되고, 의미가 부여된다. 심지어 그에 따라 재단되고, 판단되고, 치리되기까지 한다. 세상의 모든 화근이 ‘세 치 혀’에서 자란다지만, 필자에게는 대학노트 한 권 분량도 되지 못하는 ‘글’이 만병의 근원이고, 심지어는 기억의 저장고 저 깊은 데서 불쑥 뛰쳐나오는 어휘들이 절망의 그 종자種字들일 뿐이다.


초저녁을 미치게 좋아 했어


환하던 밖이 방심한 사이
어둠은 거침없이 침범하고


어느덧 너와 나의 허물어지는 경계를
푸른 띠로 나누는 하늘


아, 그때 오그라드는 심장이며 입 막고 느껴야했던 경련
회색밀물처럼 되돌아 오던 사춘기, 그것, 확실한데
기억이 안나 그 단어, 그 단어


그게 뭐였지? 뭐였지? 분명히 있는데
절망이야 결국 이리 되고 마는가
분해되는 기억력하고는


─최계철, 「지워주기」 전문


이 작품에서 시인은 언어가 존재의 ‘집’에서 ‘짐’으로 변하고 오히려 벗어버리면 보다 자유로운 사고의 영역이 경계의 이쪽이나 저쪽에서 열리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지워주기’라는(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는 ‘삭제’가 아니라는 점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표제를 통해 은연중에 드러낸다.
개인사에서 아무리 오래 전에 말이 문자로 바뀌었다 해도 말의 육체성은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을 뿐, 문자의 표면과 신체 사이에서 끝없이 유동하며 살아 있다, 이는 특정한 상황에서 기억의 표면을 뚫고 자주 사용하지 않는 어휘들이 쏟아져 나오는 현상으로 반증된다. 시인은 “초저녁을 미치게 좋아 했어‘라는(그것이 ’나/너‘, ’둘 다‘ 방향성은 불필요하다.) 어떤 성향의 자각에서 이 작품을 시작하고 있다. 성향이 떠오르자 구체적 사건이 생생하게(”어느덧 너와 나의 허물어지는 경계를/푸른 띠로 나누는 하늘“이라는 선명한 이미지) 살아나지만, 아무리 ”그것, 확실한데“라고 오늘의 육체로 소리를 울려 봐도 그때의 ’그 단어‘는 떠오르지 않는다. 결국 시인에게는 ”그게 뭐였지? 뭐였지? 분명히 있는데“라는 아쉬운 혼잣말만 남는다. 사실 ’그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또는 여러 번 되살려지면서 애초의 ’상향과 사건‘과는 다른 단어가 되어 다른 계열에 스며들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아주 가끔 ’지워주기‘로 작정했을 때 고스란히 되살아오기도 한다.


근육이 육포처럼 굳어지도록
죽어라 우체통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탄산수에 깻잎을 넣어 버틴 여름 가고
붕어빵 꼬리부터 먹을지 머리부터 먹을지 고민하는
겨울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나는 대체로 무사합니다 불행은 고작 나팔꽃처럼 자라
꼼짝달싹 못하게 혀를 묶어버렸습니다
입술이여 산세베리아처럼 날카로워져라
이런 주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태양을 보지 않았는데 뺨이 오렌지 같구나
이런 문자에 행복했던 시간도 끝났습니다
나는 무사하지 않습니다
당신 뒤꿈치에 박힌 굳은살을
이빨로 긁어 주고 싶은 날에는 맨발로 골목을 걷기도 했습니다
이런 게 사랑이 아니라면 미친 거겠지요
복숭아뼈에 날개가 돋아 날아갈지 모르고
곧추서서 환하게 웃는 사람을 바라만 봤으니
이런 죄를 당신의 행성에선 뭐라 부른답니까?
앞머리를 잡았어야 했는데 허리를 잡아
내 손을 빠르게 빠져나간
부드럽지만 강렬했던 푸른 도마뱀


─김시내, 「후」 전문


말이 육체성을 갖지 못했고 의미가 물질성을 입지 못한다면, 모든 기억과 한낱 정보는 순식간에 자리만 바뀌는 항렬에서 깜박이는 신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김시내 시인은 ‘후’라는 제목을 통해서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대략 유추해보면 차원이든 층위든 우리가 머무르는 것은 순간일 뿐이고, 무엇을 특정하지 않는다면 결국 인과나 선후, 시종始終 같은 체계가 다 무의미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시인은 어떤 ‘후’에 위치하는데 그것은 ‘혀’, ‘입술’에서 유추할 수 있는 ‘말’이 오고갔던 시점은 이미 끝난 상태고, “태양을 보지 않았는데 뺨이 오렌지 같구나/이런 문자에 행복했던 시간도 끝”나 버린 그 다음이다. 거기에는 특별한 의미 없는 행위(‘탄산수에 깻잎을 넣’거나 “붕어빵 꼬리부터 먹을지 머리부터 먹을지 고민하는”)를 통해서도 바뀌는 계절과 “이런 죄를 당신의 행성에선 뭐라 부른답니까?”라는 대답을 구하지 않는 질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은 “앞머리를 잡았어야 했는데 허리를 잡아/내 손을 빠르게 빠져나간/부드럽지만 강렬했던 푸른 도마뱀”에게 보내는 가독 불능의 편지 형태를 취한다. 즉 의사소통에서 ‘소통’을 용인하는 ‘타자’가 삭제되었을 때 남는 후기적 상황에서의 ‘몸/말’의 상태를 그려낸다. 하지만 이는 뒤집어 생각하면 자기 안에서 ‘타자’를 형성, 외화外化하려는 시인만의 방법론적 결단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끝을 찾아서』, 『한밤의 못질』, 『오래된 약』,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단단斷斷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상상력』 등. 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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