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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문학 수록작품(전체)

26호/권두칼럼/허문태/시인은 겨울 들판에서도 꽃을 피운다


허문태


시인은 겨울 들판에서도 꽃을 피운다



참으로 얼마만인가? 찬바람이 몰아치는 겨울 들판을 걸어본다. 요즘 고향이, 유년시절이 자꾸 내 생각의 주위를 맴돈다. 불편한 것으로부터 벗어나 편안함을 찾고 싶은 심정이 작동하는 것일까? 옷깃을 여미고 주머니 깊숙이 손을 넣고 겨울 들판을 걷는다. 빈 들판 위로 몇 마리 기러기 난다.
유년 시절 겨울이 오면 강력한 북풍을 몸으로 맞서며 친구들과 들판을 걸어 등하교 했다. 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이 추웠고, 언 손이 쩍쩍 갈라져 피가 났다. 손가락과 발가락에 얼음이 박혀 실내로 들어오면 벌게지고 가려웠다. 그래도 아이들은 개울에 얼음이 얼기를 기다렸고, 얼음이 얼면 썰매를 타고 놀았다. 영웅심에 얼음 위에서 구르다 얼음이 깨져 물에 빠지기도 하고 젖은 바지를 모닥불에 말리다 태워 어머니에게 혼나기도 했다. 장독이 깨지고 전선들이 윙윙 울어대는 엄동에도 눈이 오길 기다렸고 눈이 오면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만들었다. 날이 풀리며 얼었던 눈이 녹고 처마에 고드름이 열렸다. 고드름을 따서 칼싸움도 하고 우두둑 우두둑 씹어 먹기도 했다. 겨울을 온몸으로 견뎠다. 겨울이 지나고 나면 아이들은 또 한 뼘씩 쑥쑥 자라 있었다. 그 시절이 문득 그립다. 인공지능 시대가 대세인 지금 왜 추위에 덜덜 떨며 고통을 몸에 새기던 그 시절이 그리운 걸까?

들판 멀리 대단위 아파트 단지를 보니 갑자기 춥다. 기능성 속옷에 바람을 차단하는 자켓을 단단히 챙겨 입고 그 위에 오리털 롱패딩을 걸쳤는데도 춥다. 평당 1억 원이 넘는다는 아파트가 점점 늘어난다고 한다. 대다수의 서민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임시직이나 알바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또 어떤가. 가면 갈수록 벌어지는 빈부 격차는 한파가 되어 매섭게 귀때기를 때린다. 세습되는 부와 세습되는 가난. 부자가 되려면 금수저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이 있다. 노력으로는 부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춥다. 
한파를 뚫고 또 멀리 도심 한가운데서 격앙된 함성이 들려온다. ‘결사반대!’ ‘사생결단!’ ‘물러나라!’ ‘수호하자!’ 서로 갈라져 획일화 된 함성소리가 진정성도 없고, 설득력도 잃은 채 끝없이 이어진다.  타협도 없고 양보도 없고, 수치심도 없고 품위도 없고, 진영 간 대립만 있다. 춥다. 젊은이들은 결혼을 포기하고, 결혼한 부부들도 아이 낳기를 망설인다고 한다. 춥다. 엄동설한의 한파가 가슴을 쩍쩍 갈라놓는다. 심장에 얼음이 박힌다. 지독한 한파다.


겨울들판을 다시 천천히 걷는다. 수확을 끝낸 들판은 침묵 속에 내면으로, 내면으로 길을 찾는 듯하다. 겨울 과수원에 사과나무는 이파리를 모두 떨어뜨렸다. 자신을 감싸 안고 키워주던 이파리들을 모두 떨어뜨렸다. 여름 내내 땀을 흘리며 키웠던 붉고 단맛이 가득한 열매는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이제는 겨울 앞에서 빈 가지를 뿌리처럼 하늘로 뻗쳐 허공 속 한파를 영양분 삼아 내적 성장을 하고 있는 듯하다. 사과나무는 얼마나 많은 한파를 겪으면서 몸으로 한파를 기억하게 되었을까. 해마다 겨울이 닥치면 자연스럽게 사고의 전환을 통해 외적 성장을 멈추고 내적 성장을 하는 성숙된 모습에 고개를 숙인다. 저들은 겨울 한파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앙상한 가지로 추위에 덜덜덜 떨고 있다고 치부했던 내 상투적 안목을 씁쓸히 내려다본다.


아득하게 벌어진 빈부격차, 극과 극의 진영논리, 극심한 이기주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늘어나는 관태기와 일인가구 등 지금 우리 사회는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은 아닐까. 한파는 한 번만 오지 않는다. 주기적으로 때론 예상치 못하게 오기도 한다. 그러므로 한파가 닥칠 때마다 한파를 원망하지 말고 사고의 전환으로 한파를 껴안아야 하지 않을까.
겨울 들판에 사과나무만 봐도 희망이 솟아난다. 우리도 겨울 들판에 사과나무처럼 악착같이 주렁주렁 매달고 있던 것을 모두 나누어주고 빈손으로 내적 성장을 해야 할 때인 것은 아닐까. 사과나무가 나뭇가지를 뿌리처럼 허공에 내리고 한파를 영양분 삼아 내적 성장을 하듯이 빈부격차, 진영갈등, 이기주의 등 사회적 한파를 영양분 삼아 혹독하게 몰아치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성숙한 세상을 만들어야 할 때가 아닐까.
가지마다 잎눈을 내밀고 겨울바람에도 흔들림이 없이 사과나무는 겨울 들판에 우뚝 서 있다. 우리도 이 겨울을 뜨거운 가슴으로 맞이해야 한다. 한파가 나를 키우는 영양분이라는 사고의 전환으로 꽁꽁 언 그 겨울 들판에 겸허히 서야 한다.
그 선봉에는 늘 시인이 있다. 몸의 기억으로 살아가는 시인이 있다. 한파로 인한 아픔과 슬픔 좌절과 절망을 영양분 삼아 꽃을 피우는 시인이 있다. 시인은 겨울 들판에서도 꽃을 피우는 끝내 천진한 어린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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