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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문학 수록작품(전체)

26호/초점에 선 시인/정치산/콧대 긴 그녀 외 4편


정치산


콧대 긴 그녀



사랑해 사랑한다구 너만 사랑해. 간지러운 말을 예쁘게도 쏟아낸다 그녀의 코가 길어진다. 너만 사랑해 다른 사람은 내 눈에 차지 않아. 입에 발린 간지러운 그 말에 그녀의 코가 석자나 더 쑤우욱 자란다. 그녀의 코에서 나무가 자라고 새들이 모여들고 애벌레들이 숨어든다. 그녀의 입에서 썩은 과일이 떨어지고 달콤한 말들이 잼으로 졸여진다. 입에 발린 끈적끈적한 향기에 강물이 흐르고 물고기 떼 튀어 나간다. 억새꽃 은빛 물결로 쌀랑거리고 부서지는 햇살 그 강물에 짤랑거린다.





부론富論, 부론浮論·2

 ─자산 욕바위



그의 노래는 오래전 시작되었다. 개치나루 섬강의 끝자락에서 담 담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시인 묵객을 불러모으던 자산의 절벽에서 부정한 관리들 떠날 때 마다 흠벅지게 불러 재꼈다.
표지석만 덩그마니 남아 떠날 곳 없는 산 그림자도 노랫소리에 흔 들렸다 제자리로 깊어졌다.
담쟁이풀 구불구불 자산의 절벽 오르고 강 건너 담장에 능소화꽃 은 경계를 없애며 기어간다.





바람의 기억



문을 밀고 들어서면 비에도 젖지 않는 강물에 물결이 인다. 강물은 기억을 머금고 비에 얻어맞으면서도 모두를 품는다. 휘돌던 바람 귓바퀴를 때리고 그녀가 있던 자리에 그가 있다. 반쯤 갇힌 문 사이로 기억 훔치는 바람의 온기 차갑게 스친다. 미친 바람이 불고 펄럭이던 옷자락이 휘리릭, 다리를 휘감는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그의 눈 속에 미친 기억들이 일렁인다. 입술 끝에서 한 숨 팝콘으로 튀고 쏟아놓은 기억 울음이 된다. 시간을 적시고 기억을 적시며 그에게 흘러가 커다란 산이 운다.





초하初夏



장미꽃보다 더 좋다던 찔레꽃 뭉개고 바람꽃 들고서 길을 나선다. 종종종 조바심이더니 버려진 우물 속에 사랑초 숨어서 몰래 핀다. 권커니 잣거니 주고받는 늦바람에 이 산 저 산마다 뻐꾹새 울어댄다. 샘물보다 더 깊은 한숨 소리에 화들짝 환하던 감꽃이 후드득 진다.





상강 무렵



뜨거웠던 날은 차갑게 식고 차가웠던 날은 뜨겁게 달아올랐지. 열아홉에는 가슴이 두근거렸고 스무 살엔 가슴이 불처럼 탔어. 험악한 손들에 핸드백이 쏟아지고 터지는 최루에 눈물 흘렸지. 그렇게 감추면서 안개 속에 숨기도 하고 헤쳐 나가기도 했지. 별들이 뜰 때는 부산거리고 별이 질 때는 소문도 없이 사라졌어. 절기를 건너는 사이 몇몇은 떠오르고 몇몇은 묻혀서 사라졌네. 바람에 절하는 억새의 몸피 얼어가는 겨울 강 속으로 스며들고, 그리하여 긴 겨울의 꿈은 꿈틀거리다 꿈틀거리다가 눈을 뜨지.





*정치산 2011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바람난 치악산』. 강원문학 작가상, 전국계간문예지 작품상, 원주문학상 수상. 막비시동인.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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