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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문학 수록작품(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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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김왕노

외 4편

 

낫 하면 혀가 입천장에 닿는다. 내 입안에도 입천장이라는 푸른 하늘이 있다. 별로 수놓아도, 꽃으로 수놓아도 좋은, 낮달이 흘러가도 좋은 입천장이라는 하늘, 낫 하면 어느새 혀가 입천장을 가리킨다. 티베트의 조장이 있는 하늘, 입천장도 하늘이라 혀끝도 부끄러움 한 점 없이 입천장을 우러르며 살라는지, 때로는 낫을 들고 잡풀처럼 우거지는 어둠을 베어라는지, 먼 친정에 이르듯이 정답게 뻗은 논두렁 밭두렁 같은 길을 내라는지, 낫 하면 혀끝이 그렇고 멀고멀었던 입천장에 닿는다. 꿈 하면 혀끝이 죄 지은 듯 가운데로 몰리는데 희망하면 혀끝이 기댈 곳 없이 들리는데 낫 하면 혀끝이 먼 너의 하늘을 가리키듯 입천장을 가리킨다. 움켜쥐고 고부에서 삼례에서 관군을 향해 동학처럼 돌진하고 싶던 낫. 지주를 향해 움켜쥐고 싶던 낫, 낫 하면 언제나 혀는 새파란 나의 입천장을 가리킨다. 그리움하면 주눅이 들 듯 짧게 뻗어 닿을 곳 없는데 사랑해도 닿을 곳 없는 혀는 황당한데 낫 하면 혀는 한때 거리에서 끌끌 차던 입천장에 닿는다. 독이 오른 듯 세상을 향해 새파랗게 갈던 아버지의 그 낫, 길을 가로막던 아카시아를 쳐내던 그 낫, 낫 하면 혀는 내 몸의 하늘인 입천장에 어느새 슬며시 닿는다.

 

 

 

 

브라자를 열다

 

 

브라자는 벗기는 것이 아니다. 여는 것이다.

고리가 앞에 있지 않고 뒤에 있는 것이다.

문을 연다는 것은 닫힌 마음을 연다는 것

뒤로 돌아가 여는 것이 아니라

마주 바라보고 온몸을 부둥켜안고 난 후

아름다운 승낙 뒤에 브라자를 여는 것이다.

젊은 날 우린 브라자를 벗기는 줄 알았다.

브라자를 벗기면 마음이 열리는 줄 알았다.

지금도 두드리지 않으면 열 수 없는 브라자

브라자를 열면 수국 꽃 환한 여름이 보인다.

브라자를 열면

청춘이 부활할 봉긋한 두 개의 무덤도 보인다.

 

 

 

 

뼈다귀 경

 

 

이 가을에 뼈다귀 하나 찾아 물고

마르는 풀냄새 향기로운 곳에 웅크려

허기진 개로 이리저리 핥아대고 싶다.

맛이야 있겠냐마는 핥다가 보면

혓바닥은 경을 읽는 눈

뼈다귀를 이리저리 굴리고 핥으면

육탈의 시간 지나 초월의 언덕을 넘어서 온

뼈의 경로가 읽혀 눈물이 나기도 하고

뼈다귀 경에 이빨 자국 이리저리 내면서

혀가 너덜거리도록

이빨이 흔들리도록 읽어가다 보면

수캐 좆이 슬며시 몸 밖으로 삐져나오지만

원효가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음에 이르듯

어느 순간 깨달음이 찾아와 내 정수리를

툭 때릴 것 같은 볕 좋은 이 가을날

뼈다귀 경 한 권 혀 시리도록 읽고 싶다.

 

 

 

 

당신에게 나란

 

 

당신에게 나란 왼편에서 흘러가는 강물이었다.

당신에게 나란 당신이 잠든 틈을 타

싱거운 당신의 밥상에 간을 맞추기 위해

차마고도를 넘어 소금사막을 찾아가는 야크였다.

차마고도를 넘어가는 늙은 마방이었다.

당신이 준 물 한 잔으로 눈물을 만들면서

당신이 준 소화제 한 알로 설익은 사랑을 삭히면서

당신이 구름인지 꽃인지 물인지 분간도 못하면서

먼발치에서 강둑 무너지는 소리가

당신이 무너지는 소리인 줄 알아 불면으로 가는

당신에게 나란

한 번 쥐면 펴지지 않는 주먹 같은 고집이었다.

나에게 당신이란

한 번 펴놓고 잘 놀다가는 평상 같은 것이었다.

내가 흘려보낸 그리움은 당신의 등 뒤에서

가을 호수로 햇살에 반짝이는데

나는 나를 오늘도 당신을 향해 조금씩 죽이면서 산다.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쪽지 같은 사랑이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1

버렸다 해도 끝내 버리지 않았음을 압니다.

내가 버려진 세상에 왜 이리도 꽃이 피고

사랑은 나를 찾아와 내 생은 왜 이리 눈부십니까?

 

알알이 포도는 익어가고 바람의 상여를 타고 가는 새소리에 슬픔이 묻어있지 않습니다.

 

물을 거슬리지 않고 떠내려가는 꽃잎이 아름답습니다.

왜 이리 숨 가쁘게 꽃이 피어 꽃시절인지

한때는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외쳤습니다.

하나 내가 버려졌지만 버려진 곳의 우물물이 말갛게 차오르고

우물가를 찾은 처녀들의 웃음소리는 왜 저리도 환합니까?

 

2

버려지지 않았지만 아픈 나무들이 즐비한 숲을 지나쳐 왔습니다.

버려질 때의 느낌은 순간적이었고 추스르다 보니 버려진 것이 아니라 내 잡힌 영혼을

어린 양처럼 방목했음을 압니다. 녹음방초의 이 계절 멀리서 다시 불러들일 때까지

지금은 존재를 확인케 하는 방울소리 딸랑거리면서

연한 목초지를 찾아가는 양 같은 마음입니다.

지하경제를 움직이는 검은 손으로 인해 때로는 참을 수 없어

울음이 터지지만 미온적이 아닌 이상 어둠을 헤쳐 나가며 살아있음을 만끽하려 합니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버려져야만 버려지지 않는 것인 줄 압니다. 그것이 존재의 담금질임을 압니다.

 

3

내가 버려질 때 함께 버려진 내 어린 영혼을 봅니다. 샛강에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던 내 영혼을, 버려지는 나와 함께 버려진 벌판에서 피어오르던 쥐불연기, 끝물이 온 거리와 함께 쓸쓸한 저녁의 등불과 신호등, 이정표와 철거덕거리는 먼 지방으로 떠나가는 기차바퀴소리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것이 있음도 압니다. 하나 버려질 때 함께 버려진 내 추억에는 이제 어떤 고통도 없습니다. 버려진 것은 버려진 것들이 모여 고통을 나누는 지혜가 버려진 자들에게는 있습니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버려져도 버려진 것조차 모르는 무지도 있습니다. 응당한 징벌이라 생각하며 제 몸의 얼룩을 닦습니다. 죄는 개인의 몫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고 우리의 죄임을 압니다. 죄를 자초한 것은 개인적 불행이 아니라 우리 모두라는 것을 압니다.

 

내 살아온 날들이 이렇게 길어도 고통으로 점철되지 않았습니다.

강둑에 앉자 함께 쪼그려 앉은 계절에게 고마웠습니다.

넘어진 사람에게 가만히 손 내미는 사람이 있습니다.

익명으로 후원금을 내고 말없이 돌아서 멀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때 버려졌다가

버려진 가슴의 고통을 아는 사람이 보내는 아름다운 메시지도 있습니다.

 

4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상대적 박탈감이니 소득의 재분배니 어지러운 말들이 혼란에 빠뜨리지만

내가 버려진 날에도 수평선에서 뭉게구름이 피어났습니다.

그리움이 이끄는 루트를 따라가면 쌀 씻는 소리 정다운 집에 이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시작메모

내 시란 없는 사랑에 대한 예의이다

 

 

내 곁에 없는 사랑인데도 내 사랑이라며 울었다. 어제도 내 곁에 없는데도 내 사랑이라며 울었고 오늘도 여전히 내 곁에 없는 사랑인데도 내 사랑이라면서 울었다. 영원히 내 곁에 없는 사랑일 수도 있는데 어제도 내 사랑 오늘도 내 사랑이라면서 울었다. 울 때마다 없는 사랑에 대한 사랑이 깊어가는데 그 사랑의 깊이만큼 슬픔이라지만 내 곁에 없으므로 더욱 네 사랑이라 몸부림치면서 울었다. 내 곁에 내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울면서도 그게 아니라 아니라고 하면서 울었다. 내 곁에 없지만 먼 곳에 있으므로 손 닿지 않으면 마음이 닫는다면서 울었다. 곁에 없으므로 더더욱 깊은 사랑이라면서 사랑만큼 깊어진 그리움으로 울었다. 그 울음이 시다.

 

 

 

김왕노∙경북 포항 출생.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슬픔도 진화한다, 말달리자 아버지(문광부 지정도서),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중독, 사진속의 바다 등. 한국해양문학대상, 박인환 문학상, 지리산문학상 등 수상. 2013년 아르코 창작지원금수상. 시인축구단 <글발> 단장. ≪시와 경계≫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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