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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문학 수록작품(전체)

산문

정정근





오일장과 연포댁





   우리나라 오일장은 17세기 말,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 일주일은 기다림에 지치고 사흘은 다른 일 하기에 바쁠 터이니, 닷새가 알맞은 파수다.
   오늘은 충주 오일장날. 저마다 희망 보따리를 이고 들고 지고, 혹은 소달구지나 리어카에 실어 20리 30리를 걸어갈 것이다. 찻길이 닿지 않는 두메에 사는 연포댁도 닷새의 기대를 엮어 보따리를 꾸렸다. 묵나물과 푸성귀를 싼 커다란 보따리는 머리에 이고, 씨암탉 두 마리는 옆구리에 끼고 사뿐사뿐 집을 나선다. 지아비도 손수 농사한 곡식들을 무겁게 지고 뒤따른다. 환한 얼굴로 배웅해주는 시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있어 마음도 든든하다.
장터 가는 길은 정든 길이요, 한 맺힌 길이다. 돌담길 돌아 동네를 벗어나면 나지막한 성황당고개. 들판을 건너 ‘숯골’과 ‘궁골’을 지나면 잡목 우거진 산길을 따라 ‘달은티’ 재를 넘어야 한다. 달은티에는 ‘월은봉月隱峰’이 있는데 어른도 한 번은 꼭 쉬어간다. 하물며 이고 진 연포댁 내외야 오죽하랴. 허위허위 뒤따르던 지아비가 커다란 벚나무 그늘에 지게를 받쳐놓고 엽연초 한 대를 말아 피운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두어 번 훔친 연포댁이 그 새를 못 참고 재촉이다.
“얼렁 가유. 해가 댓 발이나 솟았시유.”
“쬐끔만 쉬었다 감세. 댐배 한 대 꼬시리고…. 보름달도 이 고개를 넘다가 허리가 휘었다잖은가.”
고개를 다 내려와 ‘위 파소’ ‘아래파소’를 지나면 들판을 가로지른 개울을 건너야 한다. 징검다리를 건너 좀 더 가면 신작로로 들어서게 되는데, 30리 충주장터까지 절반인 셈이다. 그래도 길이 좋으니 힘들지 않다.
10시쯤 됐을까? 도락꾸(트럭)에서 짐을 내리는 상인들과, 초만원 버스에서 방금 내린 사람들로 장터는 금세 시끌벅적해진다. 야금야금 점령해 들어가는 난전의 물건들을 바라보는 연포댁 전신에 뜨거운 기운이 감긴다.
부지런한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은 벌써 잡곡·산나물·푸성귀들을 다 펼쳐 놓고 앉아있다. 남정네들이 벌여놓은 농기구와 생활용품들은 반 평도 안 되는 땅바닥을 차지하고 드러누워 삶의 정한情恨을 보여주고, 닭·강아지·염소새끼·돼지새끼 등 박스 안에 가둔 가축들은 맹한 눈으로 두리번거리고 있다. 없는 것이 없는 고향백화점이다.
일흔이 훨씬 넘은 강식이 할아버지도 낡은 돗자리를 편다. 가위· 도장집·돋보기·귀이개·천자문·손톱깎이 등, 팔아도 몇 푼 안 되고 팔릴 것 같지도 않은 잡동사니들을 꺼내놓는다. 꾀죄죄한 좌판에 권태가 소똥처럼 달라붙어 있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5학년 용섭이도 나왔다. 부모의 성화에 떠밀려 나왔는지, 강아지 세 마리를 대소쿠리에 담아 시무룩이 앉아있다. 발목에 줄을 달고 등과 다리에 매단 북을 치며 하모니카를 부는 요란한 소리에도, 애들은 가고 어른만 오라는 약장수의 걸쭉한 입담에도, 여기저기 북적대는 장날풍경 모두 관심 밖이다.
정오를 전후로 장은 최고조에 이른다. 침구류, 부엌살림, 알록달록한 옷가지들. 개피떡·시루떡·옥수수 등 먹을거리도 풍성하다. 순대국밥과 돼지국밥 냄새도 구수하게 풍겨온다. 손톱여물 썬 고쟁이 돈 들고 나온 아낙들이 소소한 생필품 몇 가지를 고르더니 모처럼 점심 겸 군것질도 즐긴다. 까르르 웃는 소리에 정감이 흐르고 흥겨움이 넘친다.
용섭이도 엄마가 싸 준 감자떡 몇 개를 꺼내먹는다. 강아지는 아직 한 마리도 팔리지 않았다. 창피하고 지루하다.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쪼그리고 앉아 졸기 시작한다. 한참 꾸벅꾸벅 졸다가 앞으로 꼬꾸라진다. 그 바람에 강아지가 담긴 대소쿠리도 함께 엎어진다. 소쿠리를 빠져나온 강아지들이 기다렸다는 듯 낑낑거리며 도망친다. 화들짝 놀란 용섭이가 흩어진 강아지들을 허겁지겁 주워 담는다. 
   장은 소리로 열리고 소리로 닫힌다. 기분 좋게 흥정하는 소리,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웃고 떠드는 소리, 장꾼들의 실랑이 소리, 장돌뱅이들의 호객소리, 뉘 집 총각과 뉘 집 처녀 다리 놓는 얘기, 멀리 사는 친척이나 자주 만날 수 없는 사돈네 안부 묻는 얘기, 세상 돌아가는 얘기, 비닐하우스에 농사짓는 얘기, 가축들 우는 소리….
장터 옆 모퉁이에서는 우시장이 열리고 있다. 그곳에선 하루 종일, 새끼 잃은 어미 소와 어미 잃은 송아지들이 애처롭게 울고 있다. 소장수로 유명한 샘골양반은 손가락에 침을 퉤퉤 묻혀가며 돈다발을 센다. 호방한 성격의 대장부로 소문난 그는 돈을 잘 벌어 그런지 부인을 셋이나 두었는데, 모두 한 집에 살면서 싸우는 일이 없다고 아낙들은 모여 앉으면 입방아다.
   해가 서쪽으로 조금만 기울면 장돌뱅이총각들과 시골처녀들의 풋사랑도 익어간다. 장날은 시골처녀들이 고달프고 지루한 농사일에서 잠시 쉬는 날이요, 연정을 분출시키는 통로다. 장돌뱅이총각이 은근슬쩍 수작을 부리면 처녀도 흥정하는 척 눈웃음을 흘린다. 몇 번 눈을 맞춰 둔 사이인지, 연정어린 눈빛이 둘 사이에 오래 머문다.
해 질 무렵이면 장터는 파장에 이른다. 떨이도 얻을 겸 일부러 느지막이 나온 아낙들 한 무리. 아끼고 쪼갠 돈으로 항아리도 사고 나일론양말도 사고 벼르던 은빛 금빛 양은그릇도 산다. 사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련만 마디게 장을 보고 서둘러 돌아간다. 남은 푸성귀를 떨이로 준 연포댁도 장을 본다. 홀시아버지 드릴 속옷 한 벌, 어린 아들 줄 눈깔사탕 몇 개, 간고등어도 한 손 사서 지아비와 장터를 떠난다.
   장꾼들이 빠져나가면 장터는 그때부터 취객들 차지. 여기저기에 술판이 질펀하게 벌어진다. 주머니가 두둑한 사람들은 작부 집으로, 그렇지 못한 이들은 목로주점으로 모여든다. 젓가락장단에 청승맞은 노래도 부르고, 혀 꼬부라진 소리로 고함도 치다가 마무리는 너털웃음이다.
어느덧 해질녘. 장을 본 물건들을 허리춤에 매단 송영감이 흔들흔들 걸어간다. 집으로 가는 20리 길에도 주막이 있으니 그곳도 그냥은 못 지나칠 것이다. 막걸리가 밥이요 반찬이다. 다음 장날에 갚기로 하고 외상술을 마시니 죄 없는 주전자만 주모 손에서 찌그러진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송영감의 허리춤이 엉성하다. 호미 하나는 제대로 걸려 있는데, 며느리 주려고 산 미역은 다 부서지고 양미리 꾸러미는 어디서 흘렸는지 절반만 남아 있다.
온 길 되짚어가는 연포댁 내외의 걸음이 재다. 하얀 반달이 머리 위에서 삥시레 웃는다. ‘아쉽기는 하겠지만 그만하면 잘 팔았네.’ 내외를 위로해주는 듯하다. 지아비도 고생한 보람이 있는지 취하지도 않은 맨 얼굴이 상기돼 있다. 다음 장날에도 갈 수 있을까, 그때는 무엇을 내다 팔까. 내외는 벌써부터 그 궁리를 하는 모양이다. 
 
   지금도 전국 700여 곳에서 오일장이 선다. 그 옛날 장터들이 남긴 흔적처럼 훈훈한 인심이 깃든 곳도 많지만, 설레는 맘으로 찾아갔다가 쓸쓸한 여운만 안고 돌아올 때도 있다. 오일민속장터는 비슷비슷한 것을 벗어나 지역마다 특산물을 활용한 상품개발이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다. 지역의 특징과 문화를 장터에 연결시키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약력:1994년 《창작수필》로 등단. 1999년 《시대문학》에서 시로 등단. 수필집 『내 이름을 불러주세요』외 3권. 시집 『숨은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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