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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문학 수록작품(전체)

19호/신인상/이용태/구름이 멀다 외 4편


구름이 멀다 외 4편


이용태



봄바람 속에 함께 세우고 함께 잡은 햇살이 쌓여               
쉰하고도 한해를 아우르던 붉은 꽃이
하얗게 지던 날,
싸늘한 별들이 허공을 갈랐다.
 
동그라미 위를 흐른다.
끝이 감춰버린 길 아닌 길
영원한 길에
점 하나 찍어줄 임, 멀리 안개 속에 숨는다.


돌아보지 않고 먼저 간 아득한 오르막길
막차는 소식 없이 멀기만 멀고
구름을 가른 별은 기어이 달에 닿았나?
아스라이 빛을 감춘다.


동근 끝을 찾아 오색 줄을 타고 걸어도
아무런 흔적 없는 자리
슬며시 다가온 현란한 빛도 그윽한 향기도
잠간 머물다 말없이 떠나고
흘러가는 저 끝 구름이 멀다.





소리 없는 미소



소리 없는 미소가
무지개를 타고 흐르면
가없는 하늘엔 차가운 추억
오색구름 위 하얀 마음을 싣는다.


다가설 수 없는 그리움
높은 산 그림자 품은 호수가 깊게 푸르고
눈부신 햇살이 물 밑에 잠기면 
곱다란 석양빛이 노을을 빚는다.


손을 잡고 걸어도
따라오지 않는 마음
혼자서 가슴 깊이 새기며
노을 따라 멀리멀리 숨어버리고


소리 없이 홀로 찾아가는 잔잔한 미소.
위로 받을 길 없는 머나먼 자리
스쳐가는 바람결 따라
노란 낙엽이 빛을 감추다





아내의 집



홀로 눈 뜨는 아침이면
허공 높다란 집은 넓어지고
창가 군자란이 잘 보이지 않는다.
거기 지켜 서 보듬고 애태우던 사람,
영원하리라던 체취마저 멀다.
이별의 거리距離로 자라나는 집.


갈색 식탁은 길어지고
낡은 소파는 높아지고
오십 년 지기知己 선풍기는 알고 있다.
구두 소리 달가닥 어딜 가자는 것일까.
일 없이 바쁜 아침이 자꾸 길어진다.
남루襤褸는 사물이 아니라 마음일지도 모르는 것.


서서히 달아오르는 북쪽 창문
그 계절의 얼굴로 쏟아져 드는 산자락,
뾰쪽하게 우뚝 솟은 태을봉,
둥글 넓적 곱게 앉은 관모봉,
오래 바라본 눈빛의 사람을 닮아 창밖은,

세상은 다시 그 사람의 향기香氣를 되살린다.


아내의 집은
밤이면 넓어졌다 해가 뜨면
내 몸에 꼭 맞춰 줄어든다.
오늘도 약속은 유효有效하다.





하얀 꽃이 날린다



하얀 꽃이 날린다.
찬바람 마다않고 꽃이 날린다.
봄, 여름, 가을 따라
노랑, 분홍, 보라, 빨강
저마다 제 아름다움 모두 보내고
끝자락 철찾아 하얀 꽃을 날린다.


모두 떠나간 나뭇가지에도
환한 웃음 곱게 뒹구는 놀이터에도,
젊음 붉게 다투는 공원 그늘에도
들에도 길에도 찻길에도
피할 수 없는 무거운 어깨
조용히 사르륵 하얀 꽃이 날린다.


칼바람 뚫고 온 흰 꽃이
아린 마음을 아랑곳없이 두드리며
하염없는 슬픔을 곱게 덮는다.





청옥靑玉을 쥐고



허공에 띄워놓은 메아리 삼키며
빈 술잔을 기울인다.
조용한 메아리 따라
푸른 구슬이 다가오고
구슬 속에 파랗게 잠겨 운다.


더없이 돌아오지 않는 숨결 
마음이 멈추고
긴 이야기
끝을 모르고 가슴속으로 흐른다.
슬픈 구름이 갈기갈기 수놓은 곳
아스라이 하얀 그림자 깔린다.


언덕을 넘어
푸른 나무 몇 그루 서성대는 곳.


구름 속 찬바람
말없이 사랑을 안고
별빛 찾아 속삭이던 밤
깊은 꿈속에서마저 자취 없는 임을 찾아
날아갈 끝이 숨어버린
머나먼 허공





<심사평>


간결하고 상징적인 시어의 압축을 통한 정서 표출이 돋보여


  시를 쓰는 동기動機는 다양하고 그 ‘다양성’은 마땅히 존중되고 그 이상으로 옹호擁護 되어야 한다. 누구는 자연과 우주의 섭리攝理를 엿보기 위해 고심하고, 더러는 감옥과 거리에서 번지는 폭동의 불씨가 되기를 바라며 쓰고, 어떤 이는 순수한 탐구探究로써 존재와 언어의 본질에 가 닿기 위해 분투奮鬪하고, 아무개는 소비하고 즐기기 위해, 즉 향유享有로 시를 제작製作하기도 한다. 이러한 동기의 다양성은 비록 위계位階를 가질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선망羨望이나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동기의 다양성을 부정한다면, 시는 획일화될 수밖에 없고 종국에는 생기生氣없는 요즘말로 ‘좀비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용태 시인을 발굴하게 된 것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시인은 그 연배年輩가 부지불식간에 흔히 드러내는 ‘탄복歎服과 탄식歎息’의 함정을 거뜬히 건너뛰고 있다. 가령 「청옥靑玉을 쥐고」에서 “더없이 돌아오지 않는 숨결/마음이 멈추고/긴 이야기/끝을 모르고 가슴속으로 흐른다./슬픈 구름이 갈기갈기 수놓은 곳/아스라이 하얀 그림자 깔린다.”는 얼핏 보면 주인 없는(인식 주체가 명확하지 않은) 감정의 토로吐露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이해는 시를 빨리 읽는 이들이 쉽게 범하는 우愚. 이 부분을 제대로 읽어내자면 ‘청옥을 쥐고’라는 제목을 반드시 참조해야만 한다. 시인은 지금 손에 ‘청옥’을 쥐고 있다. 그런데 그 안에 흐르는 ‘구름’(실제 구름이 비춰지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을 그 ‘구름’이 환기하는 정서를 풀어내고 있다. 즉 파지把持 가능한 세계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피안彼岸’을 읽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을 서정의 단순 소품이라고 치부恥部해서는 안 된다.
  이용태 시인은 간결하고 상징적인 시어를 가급적 압축하려는, 즉 요즘 말로는 ‘언어의 경제성’에 대한 인식, 예전말로는 ‘조탁彫琢’에 뛰어난 기질氣質을 지녔다. 별 대수롭지 않은 의미를 실어 나르고자 거의 잡담 수준의 언어를 마구 토吐하듯 늘어놓는 행태가 만연한 상황에서 그 기질은 더욱 돋보인다. 「아내의 집」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허전하다, 외롭다 등의 심사心事를 직접적으로 표출하지 않고, “갈색 식탁은 길어지고/낡은 소파는 높아지고/사십 년 지기知己 선풍기는 울고 있다./반듯이 놓인 구두는 또 어딜 가자는 것일까/일 없이 바쁜 아침이 자꾸 길어진다.”고 한다. ‘식탁, 소파, 선풍기, 구두’가 어떤 상실 뒤의 아침을, 시인의 심정을 ‘객관적 상관물’로 암시하고 있다. 이것이 시다. 즉 사물을 가까이 부르는 호명呼名이 바로 ‘시작詩作’의 다른 이름이다.
  부디 시인은 많은 작품을 게워내려 애쓰지 말고, 몇 편이 되었든 시인만의 ‘기질’을 살려 꾸준히 써나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부단한 삽질이면 태산을 쌓을 수도 있다 믿으며 기쁜 마음으로 장도壯途를 축하드린다./백인덕(글), 허문태, 정미소





<수상소감>


  수리산 자락, 산본으로 이주移住한 지 이십오 년이 흘렀다. 한동안은 서울로 출퇴근하기 바빠 그리고 ‘신도시’라는 명칭이 맘에 들지 않아 정을 붙이지 못했다. 그러다 반세기를 넘겨 곁을 지켜주었던 아내가 먼저 소천하면서 숙제처럼 약속 몇 개를 남겨주었다. 하나는 수리산을 자주 바라보면서 산처럼 우뚝하면서도 부드럽게 살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문학공부에 정진精進해서 꼭 ‘꿈’을 이루라는 당부였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소년기에 잠시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할 수밖에 없었다. 향리 유지有志의 장손으로서 그 시절은 못내 서럽기도 했고, 들에서 맞는 고단한 저녁은 어린 심지心地에 어떤 ‘내밀한 꿈의 씨앗’을 뿌려놓았던 것 같기도 하다. 이후 교사로 재직하면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삼덕(三德, 신信, 망望, 애愛)’을 심어주고 싶은 내심內心도 있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아내의 다짐을 지지대 삼아 뒤늦게 문학공부에 뛰어들게 되었다. 굳이 털어놓자면 자녀들에게 아비가 꺼내 보이는 작은 사랑의 징표徵標가 되길 바라는 마음도 담겨있다.
  소박한 바람과 작품에게 길을 열어주고 지면誌面을 할애해 주신 《아라문학》의 주간과 여러 편집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린다. 조언을 해준 여러 선배 시인들과 더불어 ‘수리샘문학회’와 ‘시니어문학반’의 여러 문우文友들과 이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이용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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