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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문학 수록작품(전체)

21호/특집Ⅱ시時, 시柹, 시詩/고경숙/소멸, 가을에 새긴 문체


소멸, 가을에 새긴 문체


고경숙



  햇살 가득한 과실수를 바라보거나 수확하는 들판을 내다보며 가을에 대한 이미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고 단정적으로 생각했던 내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았던 어느 가을날 이후, 나는 풍요와 소멸 중에서 이미 소멸 쪽으로 빗겨 서 있었다.
  노모는 가을날 노을 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싫다고 했다. “멋지지 않아요?”라는 내 느낌과 ‘지는 거니까… 쓸쓸하잖아’ 라는 느낌 사이에는 32년의 간극이 있었다.
  사람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또 처한 환경에 따라 주관적으로 판단한다. 어릴 때 가을에 대해 그리라면 주저 없이 주렁주렁 감이 달린 감나무와 누런 황금들판을 그렸었지만, 지금 누가 내게 가을에 대해 그리라면 한참을 머뭇거리게 될 것이다. 중년도 노년도 아닌 어정쩡한 말미에 서서 풍요와 소멸을 동시에 읽어내던 내 세월은 시간이 가며 이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그런 까닭에 내 시 속에는 어느 결엔가 결핍과 아련한 슬픔이 묻어있게 되었다. 팔자도 시를 따라간다고 억지로라도 밝은 시를 써보려고 애써도 눈은 먼 데 노을 진 하늘가를 보고 있다. 이것도 무슨 알량한 시인의 정서라고, 이쯤 되면 내 정서의 오지랖도 꽤나 깊다.


  혼자 넘어야 하는 돌산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모든 사회활동과 맞물려 있어 한 사람을 지칭하는 수많은 타이틀 중 하나씩을 내려놓는 일과 맞닿아 있다. 예외는 없다. 일간신문 부고란에 올라있는 망자의 이름들은 단 한 줄의 직함으로 지상에서의 삶을 대변한다. ○○이사장, ○○대표 모친상 등… 일반명사화 되어있는 그들은 신분 평준화를 마쳤다. 그저 총탄 빗발치는 전쟁터 피난 행렬처럼 마지막 한 길로 가고 있는 사람들은 훌훌 다 털어버리고 바야흐로 돌산을 넘어가는 중이다. 이승에서의 삶이 고되었던 만큼 억새밭 같은 등짝에 붉은 꽃을 피우며 자식이 긁어주는 마지막 수발인 것이다.
  마당 한켠에서 벌레 하나 먹은 이파리 없이 감꽃 피우고, 혼자 넘은 돌산 저 너머 젯상에 올릴 때 볼 빨간 감 몇 알은 지상에서 켜두었던 마지막 등불, 먼저 간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다.
  마당가에 넘어져 박살난 감을 들고 울음이 터졌을 때 그 가을은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만, 곁이 텅 비어있는 ‘결핍’이란 때로 ‘힘’으로 작용해, 인생은 회귀할 수 없다는 불편한 진실에 직면하고, 대신 다른 생을 바라보게 하는 변형된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풍성한 가을에 역설적으로 소멸을 함께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단순한 ‘멸滅’이 아닌 재생의 의미, 희망적 메시지가 일정 부분 담겨있다. 가을 들녘에 남아있던 세대가, 길 떠나는 이들에게 보내는 의식처럼 경건하고 진중하게 한 발 한 발 계절 속으로  발을 옮기는 것이다.


울퉁불퉁한 돌산
평생 걸어온 그 길을
손톱 밑에 핏자국 배도록 긁으면
활짝 피어나는 억새꽃
고된 날 손잡고
등뼈 마디마디 넘을 때마다
바람은 억새밭 사이 무섭게 불어
나는
그 밭 어느 언저리 엎어져
잠투정을 하곤 했다


―「붉은 억새밭」중 일부


  중심에서 빗겨선 사람들
  중심에서 빗겨선 사람들은 ‘때’를 놓친 사람들이다.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때, 사랑할 수 있는 연인을 놓친 때,  달동네가 아니어서 비 와도 산사태 걱정 없고, 눈 와도 낙상을 걱정하지 않는 평지에 있는 동네, 그 동네에 살 기회를 놓친 때, 계약직이 아닌 정규직으로 만년 생활비 걱정 없이 마누라에게 땅땅 큰 소리 칠 기회를 놓친 때, 모두 풍요와 정반대에 서있는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 굳이 찾아보려 애쓰지 않았던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삶은 소극적인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쉽게 노력하지 않는 가난을 비난만 하고, 세습되는 가난을 나태와 연결시켰다.
  치열하게 살아도 힘들었던 철거민들이 떠나가는 달동네의 「또 다른 가을」, 억울한 시위대의 긴 싸움이 될 「가을」의 정경, 지불각서를 이행 못해 심장에 옹이가 박힌 아비의 가을까지 도시민의 통증은 각양각색이라는 것을, 시는 돌려서 얘기한다. 그 또한 중심에서 빗겨선 일원으로서 속내를 감추어도 어김없이 드러나는 통점인 것이다.
  때를 놓쳤다는 얘기는 잠재적으로 충분한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처음부터의 무능이나 불가능은 ‘때를 놓치다’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다만 현재의 모든 상 황이나 환경이 자신이 생각한 혹은 처한 것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거나 진행 과정상의 더딤을 의미하기도 한 것이다. 그럼으로 ‘때’란 자발적 적극성과 가능성, 준비의 삼박자가 모두 완비되어 언젠가 그 시기가 오기만 하면 무한한 가능성을 불태우며 에너지화 할 수 있기에 끊임없이 표현하고, 주장하고 꿈을 꾸는 것이다.


길은 퉁퉁 불은 면발처럼 끈기를 잃고
占집 지붕에 백기 하나 내걸려 펄럭였다
구청 철거반이 다녀갈 때마다 녹색의 잎들은 무리져 떨어지고
동네는 한 뼘씩 산으로 올라갔다
단풍은 노을 속에서만 빛났다
제일 먼저 어린이집이 문을 닫고
뿔뿔이 흩어진 아이들은 비닐하우스 속에서 쑥쑥 자랐다
누우면 별이 보일 거라고 좋아하던 아이는
밤마다 별을 찾았다
어미는 아예 눈을 감았다


<중략>


야광팽이 따조를 신나게 돌리며 아이들이
화려하게 가을밤을 점령했다.


―「또 다른 가을」 일부


시위대는 차단기를 올리고
청사를 눌러 홈으로 진입하려 했다
바람 몇 가닥
탐색기를 타고 흔들렸을 뿐
가을은 절대 뒤로 가지 않았다
구름이 몇 개 배너창으로 떠있었다.


―「가을」 일부


  詩는 모두 슬픈 레지스탕스
  시인의 계절은 속수무책으로 가변적이다. 겨울이어도 여름이고, 가을이어도 춥다. 다반사로 일어나는 세상에 대한 변절은 글로써 할 수 있는 비장한 통첩이다. 시인들은 늘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처럼 아프고, 남들보다 더 치열하게 사는 데도 허름하다. 무엇이 詩를 이토록 혹사시키는가? 생활과 타협하지 못하는 자존감을 뒷주머니에 찔러 넣고 그저 비눗방울처럼 세상 주위를 빙빙 떠도는 짚시의 노래처럼, 울고 웃고 또 연민하는가.
  시에 가격을 정확히 매긴다면 활자 한 자의 단가는 얼마나 되어야 마땅한가, 이름 석 자 들어도 모를 작가들과 소위 말하는 대가의 작품 사이에 간극은 얼마나 큰 것이기에, 서러운 이 가을은 허수아비처럼 남루하게 또 키득거리고 있는 것인가.
  詩는 멀리 고향을 떠나온 슬픈 레지스탕스다. 비빌 아군조차 너무 멀리 떨어져 숲속에 은닉한 시간들이 어쩌면 머지않아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예감하고 사는 슬픈 저항군이다.


그해 가을, 숲은 양팔 번쩍 들고 투항한 나무들을 내몰고 문을 걸었네 최소한의 규율로도 나머지의 성장은 더뎠네 바람은 생존에 관한 회유와 전략을 매일 밤 살포했지만 친위대들에 의해  나뭇잎 삐라는 모두 수거되고 썩은 낙엽층만 쌓여갔다네


                                             ―「슬픈 레지스탕스」 중 일부

 
  다시 가을이다.
  허름한 시는 여전하고, 중심에서 빗겨선 채로 가을을 맞고 있다. 몇 번의 가을을 보내고 나면 외롭다는 느낌 없이 혼자서 돌산으로 길 떠날 준비를 차근차근 해가며, 세상사에 초연해진다.
  그러나, 시의 힘은 생각보다 세다.
  고작 몇 줄의 글조합이라고 폄하하기엔 그 영향력과 파괴력은 가히 폭발적이기에 우리는 어려울 때 차분히 시를 읽으며 침잠하고 에너지를 비축하는 것 아닌가.  돌아보면 어려운 시기에, 우리의 조상들은 노래詩歌를 부르며 긍정적인, 낙천적인 삶 쪽을 바라봤다.
  지금도 다분히 어려운 시기이다.
  내 아이들의 아이들이 그려놓는 가을에는 마당 가득 감나무에 주렁주렁 감을 그려넣고, 마지막 몇 알은 까치밥으로 남겨둘 줄도 아는 넉넉한 가을이면 좋겠다. 떨어지는 나뭇잎이 새 봄을 위한 또 다른 생성의 과정이라는 것을 소멸과 함께 기억해주는 풍성한 아이들로 자랐으면 좋겠다.





*고경숙 2001년 《시현실》로 등단. 시집 『모텔 캘리포니아』, 『달의 뒤편』, 『혈을 짚다』, 『유령이 사랑한 저녁』. 수주문학상. 두레문학상. 경기예술인상 수상. 희망대상(문화예술부문), 한국예총 예술문화공로상, 부천시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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