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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문학 수록작품(전체)

21호/특집Ⅱ시時, 시柹, 시詩/배귀선/주체와 객체, 그 열림의 미학


주체와 객체, 그 열림의 미학


배귀선



  시간의 유비
  시간 속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멸의 파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유형의 모습으로 구현되고 보일 뿐 속성이 없는 것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있으나 누구에게는 없는 것이 시간이다. 예컨대 시간은 존재를 통해 구현되는 것으로, 겨울은 여름에서 오고 가을은 봄에서 오는 이치와 같다. 따라서 시간이라 함은 무형이면서 늘 열려 있어 무엇이라 할 수 없는 무한의 흐름으로 이곳과 저곳을 이분하거나 일체를 단속하지 않는 연결된 이미지 같은 것이다. 여름 없는 겨울은 있을 수 없고 봄의 잉태 없이 가을의 만삭이 존재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푸르게 열어주는 과정으로서의 여름의 열림이 없으면 가을은 없다. 이 같은 순환과 생멸에 의한 시간은 인간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고 나아가 깨달음을 있게도 한다. 때문에 우리는 자연이라는 시간 앞에 또는 스스로 있는 시간이라는 자연 앞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시간의 유비가 시의적절 하게 투영되어 있는 안성덕의 「저녁연기」를 살펴보자.


사람의 마을에 땅거미 내려와
동구 밖에 서성거린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식구를 기다리나,


어머니는 머릿수건 벗어 어깨에 묻은 검불 같은 어스름을 탈탈 털었다
가마솥에 햅쌀 씻어 안쳤다 모락모락 연기 피워 올렸다
시월 찬 구들장을 덥혔다


워 워, 외양간에 누렁이를 들이고 아버지는
꼬투리 실한 콩대 몇 줌을 어둔 작두에 욱여넣었다 쇠죽을 쑤었다
산달이 가까워진 소, 푸우 푸 콧김을 뿜으며 워낭을 흔들었다


어스름처럼 고샅에 밥내가 깔리면 어슬렁, 들고양이가 기웃거리곤 했다
솎아온 텃밭 무로 생채를 무친 어머니
아버지 밥사발에 다독다독 고봉밥을 올렸다
졸을 텐디, 두런두런 남은 국솥의 잔불을 다독였다


아무 집이나 사립을 밀면, 막 봐놓은 두레밥상을 내올 것만 같은 저물녘
들어가 둘러앉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컹컹 낯선 사내를 짖는 검둥개가 금방이라도 달려 나와
바짓가랑이에 코를 묻을 것만 같다
잘 익은 감빛 전등불은 옛일인 듯 깜박거리고
저녁연기 굴풋하다


                                          ―안성덕, 「저녁연기」 전문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것 같은 이 시편은 다소 평면적인 전개이기는 하나 그 배면은 간단하지 않다. 생의 곡면이 평화로움으로 환치되고 몽타주처럼 펼쳐진 노동은 손에 잡힐 듯한 임장감을 드러내고 있으며, 섬김과 겸손 또한 면유面諭되어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시간 속에 든 풍경으로, 열림과 이어짐의 정경이다. “어머니는 머릿수건 벗어 어깨에 묻은 검불 같은 어스름을 탈탈 털”고, 아버지는 “쇠죽을 쑤”고, “산달이 가까워진 소, 푸우 푸 콧김을 뿜”어 내는 풍경은 種을 초월한 시간이다. 이 시간은 과학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스스로 존재하는 시간의 융화이며 융접이다. 시인의 눈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식구들을 기다리는 “땅거미”가 사람의 마을까지 내려오는데, “땅거미”라는 무정 상관물을 들어 교감하게 함으로써 사람의 시간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지경을 경험하게 한다. 나아가 “잘 익은 감빛 전등불” 깜박이는 장면과 “저녁연기”가 “굴풋”해진다는 어휘의 조탁은 시간의 감각을 상실한 공감각의 정황을 보여준다. 이 같은 상통의 장면은 “밥내가 깔리면 어슬렁, 들고양이”를 불러 모으고 “낯선 사내를 짓는 검둥개가 금방이라도 달려 나와” 그 “바짓가랑이에 코를 묻”고 반갑게 맞아줌으로써 너와 나, 또는 주체와 객체가 구별이 아니라 하나이며 영속이고 시간을 드러내는 대속물로 어우러져 있음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이 시편에 등장하는 유·무형의 대상들은 매임이 없다. 또한 경계도 없다. 시간의 흐름일 뿐이다. 그것은 주관이 객관을 지배하거나 이분법으로 정의되어지는 세계가 아닌 마음을 열고 어우러짐으로서 다가오는 평등이며 있을 법한 진리 같은 것이다. 이는 하나의 지식 체계 속에 구성된 나이거나, 내 안의 또 다른 나이거나, 어떠한 대상이거나, 그것들의 지배를 풀고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을 극복하고 현실을 현실이게 하는, 나아가 존재를 절대적이게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적 존재론에 맞닿아 있는 듯한 장면들로써 「저녁연기」 속에 피어오르는 풍경은 풀어주고 놓아줌으로 얻을 수 있는 실체적 삶에 대해 진중해지는 행위이자 자유로운 소리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저녁연기」는 존재의 현상을 열어서 보여주는 것으로, 자유를 찾아야 할 이유가 없고,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 굳이 필요 없는, 유·무정물 간 소통의 세계를 펼치고 있다. 바꾸어 말해, 시간이거나 계界를 초월한 이미지로서 생의 고단함을 그곳에 두지 않고 좁은 곳에서 넓은 곳으로,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의 공간 이동의 장면들을, 시인의 부재의 시간에 존재하는 감각적 언술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무엇을 무엇이라 도드라지게 드러낼 필요도 없고 숨길 필요도 없는 삶이 원시림처럼, 때로는 추억처럼, 주체와 객체를 뛰어넘어 실존의 모습으로 드러나 있는 세계로, 명가명 비상명名可名非常名의 시간이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발견의 미학
   안성덕의 「저녁연기」는 실존의 모습을 단층처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단층은 화석처럼 멈춰진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인다. 그것은 실존에 대한 근원 지향적 깊이와 탐색의 정신이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펼침은 경험이 미숙하면 조우할 수 없는 것으로 시간의 부재 또한 엿볼 수 없다. 여기서의 부재라 함은 없는 것이 아니라 있음 즉, 창조 또는 새로움을 전제한 부재이다. “저녁연기” 속에 時, 詩, 柿를 그려 넣는 동안의 시간은 시인에게 부재한 시간으로, 그 없음을 통해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부재는 영원히 사라지거나 없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낳는 이면적 진실이다. 따라서 시간의 부재가 낳은 “연기”는 그 자체가 時이며 詩이고 잘 익은 柿이다. 이제 時間 속에 잘 익은 紅柿가 “감빛 전등불”로 치환되어 실존을 밝히고, 시인의 부재의 시간 속에서 창조된 한 편의 詩가 풍경화로 명경되고 있으며, 결국 시편 속 時와 柿, 그리고 詩는 생의 곡면에 맞닿아 있음과 동시에 겸손의 징후가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柿, 詩, 時, 각각 어휘의 의미가 삼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 과정에 있는 것으로, 가을의 어스름을 밝히는 柿는 時를 지칭하는 시간 속에 존재하고, 이 풍경을 받아 적는 시인의 눈(詩)은 풍경과 어우러져 있는 것이 그것이다. 결국 이 같은 풍경은 스스로 존재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풍경으로 진리가 특별하거나 특정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있음을 드러낸다. “사람의 마을에 땅거미 내려와”로 시작되는 저녁 무렵, 한 마을의 풍경과 한 가족의 삶과 이웃의 삶 그리고 동물과 자연물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의 전개를 보면 더 그렇다. “산달이 가까워진 소, 푸우 푸 콧김을 뿜으며 워낭을” 흔드는 장면이라든지 “검둥개”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식구를 기다리는 “땅거미”는 시편을 이끌어가는 유·무형의 개체들이다. 이 이미지들은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어우러져 독자로 하여금 그 풍경에 몰입하게 한다. “잘 익은 감빛 전등불은 옛일인 듯 깜박” 거리는데, 이는 지나온 일들이거나 다가올 일들의 낯섦이 아니라 상시 우리 곁에 있는 기억의 재생산 같은 것들로 환기된다. 붉은 감에게 “전등”이라는 문명의 옷을 입힘으로 빛을 있게 하는 시행의 펼침은 시간을 조정하는 조정자로서의 눈으로, 그 밝음은 우리 삶의 뒤안을 추억하여 잊히는 것들에 대해, 또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과 소멸에 대한 염려, 즉 정서에 대한 아포리즘적 이미지가 함의되어 있다. 시인의 이 같은 시행 속 柿의 과정은 홍시로서의 기능과 교시적 차원에서의 시안詩眼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때(時)를 암시함과 더불어 詩의 눈이 혼재되어 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이면적 진실
  이 시편에는 시간의 흐름이 문면 곳곳에 깃들어 있다. “꼬투리 실한 콩대 몇 줌”이쇠죽이 되기 위해 뜨거움 속에 들거나, 마지막까지 “작두”에 잘려 보시하는 “콩대” 등의 시행들 또한 쉬이 넘어갈 수 없는, 이면적 진실을 내재한 장면들이다. 왜냐하면, 하늘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땅에도 있고 물에도 있는 것처럼, 콩은 인간에게, 콩대는 소에게 나누어주는 시간의 흐름에서 생멸과 희생과 사랑의 적실赤實을 유추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데아를 중시한 플라톤의 논지에 칸트는 현실을 떠난 이상은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말에 비추어 볼 때, 이 시편은 더불어 흘려보낼 수 있는 지극히 작은 이치와 무정물 하나에도 숨을 불어넣어 존재의 각성을 일깨우며, 행간의 면면에서 시의 눈(詩)과 시의 호흡(時), 시의 가슴(柿)을 경험하게 한다. 이는 하나의 홍시(柿)가 있으려면 때(時)가 필요하고, 이것을 시(詩)가 되게 하는 과정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이 같은 과정들은 시인의 눈을 통해 저의된 것들이지만 사실은 실존적 차원에서 존재하는 풍경들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진리는 통속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것이라 봤을 때 저녁연기의 풍경은 이면을 바탕한 구체성과 현실성을 두루 갖추었으며, 이는 대상에 대한 한 심안의 지점에 가 닿아야 가능한 것으로, 여기서 심안이라 함은 잘남을 드러내고자 하는 게 아니라 겸손함을 말함이다. 일찍이 프란시스 베이컨은 근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발견과 발명인데 그것은 자연에 복종하는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하면, 삶에 대한, 이웃에 대한, 자연에 대한 겸손함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덧붙이면, 석가가 깨닫고 보니 이미 산천초목이 깨달아 있더라는 ‘산천초목 동시성불’처럼 겸손함의 깊이에 들지 못하면 詩의 눈과 柿의 이치와 時를 볼 수 없으니,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저녁연기」에 든 시행들은 詩, 柿, 時의 유기와 유비를 적절히 품고 있으며, 이를 통해 개념적 시간의 존재를 부인하고 시간을 스스로 존재하는 우주적 상관물로 추동한다. 이 같은 과정 모두는 시간, 즉 시時에 있으니 나 없음의 부재를 통해서만이 유추될 수 있다. 따라서 시詩, 시柿, 시時는 객체이며 주체이고, 각각이며 하나일 것이다.





*배귀선 2011년<전북도민일보>신춘문예 수필 당선. 2013년 《문학의 오늘》 시부문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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