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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문학 수록작품(전체)

21호/특집Ⅱ시時, 시柹, 시詩/이외현/시時,시柹,시詩에 대하여


시時,시柹,시詩에 대하여


이외현



  1.때, 시時에 대하여
  계절마다 머무는 때時가 있어 지금 머물고 있는 계절이 물러나지 않으려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다음 계절이 턱밑에 다가와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스러지게 마련이다. 올 여름은 1994년의 폭염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의 불볕더위라고 한다.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흐른다. 요즘은 우스갯소리로 “하나님 부처님 윌리스 캐리어님”이라고 한단다. 캐리어는 에어컨을 개발한 사람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노벨평화상 주자’ ‘오늘도 캐리어 선생님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처럼 온라인 상에는 다양한 찬양 글들이 올라온다. 올해 같은 폭염에 에어컨이 없었다면 어찌 살았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2018년 여름, 그를 신의 반열에 올려놓을 만큼 에어컨을 발명한 캐리어가 존경스럽고 감사하다. 잠깐만 밖을 나서도 머리가 띵하고 무더운 여름에 시를 생각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힘이 든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믿음으로 잉걸불처럼 뜨거웠던 그리움을 알알이 쏟아낸 나유성 곡 이가림 시 「석류」라는 시노래를 흥얼거려본다.


  언제부터  이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속에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지난 여름 내내 앓던 몸살  더 이상 견딜 수 없구나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구나  나 혼자 부둥켜 안고 뒹굴고 또 뒹굴어도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을 이젠 알알이 쏟아놓아야 하리 무한히 새파란 심연의 하늘이 두려워 나는 땅을 향해 고개 숙인다 온몸을 휩싸고 도는 어지러운 충만 이기지 못해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내가 깨뜨리는 이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받아주소서


                                                                ―이가림 「석류」 전문


  2.감(나무), 시柹에 대하여
  감을 생각하니 땡감이 떠올라 입안이 텁텁해지고 시골집 텃밭에 서있던 감나무가 아련하다. 어릴 적에, 친구와 함께 감꽃을 주워 감목걸이를 만들기도 하고, 덜 익은 감을 따 한 입 베어 먹다가 입안이 아리도록 떫어 밭고랑에 던져버린 일도 부지기수다. 감나무 밑에 떨어진 감을 주워 쌀독에 묻어두기도 하고 물항아리에 담가 우려서 먹기도 하였다. 때로는, 감나무 가지에 걸터앉아 밭고랑에 떨어진 감을 쪼아먹는 참새를 바라보며 사색에 젖기도 하였다. 이렇듯 감나무는 나의 어린 시절을 함께한 동무이자 너른 팔을 벌려 안아준 엄마의 따듯한 품이었다. 감꽃이 홍시가 되기까지를 살펴보면 감나무에 감꽃이 피었다가 진 자리에 조그만 감 열매가 나온다. 초록을 머금은 감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햇살이나 노을을 빨아먹으며 몸집이 커진다. 수확의 때가 되면 붉은 물이 들고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아기바람이나 참새가 먹어도 좋을 만큼 말랑한 홍시紅柹가 된다.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결 고은 시를 감상하며 눈으로 홍시의 맛을 함께 즐겨보자


쪽쪽 햇살을 빨아먹고
쪽쪽 노을을 빨아먹고 
 
통통
말랑말랑
익은 홍시
 
톡 건드리면 좌르르 햇살이 쏟아 질 것 같아
톡 건드리면 주르르 노을이 쏟아 질 것 같아
 
색동옷 입은 아기바람도 입만 맞추고 가고
장난꾸러기 참새들도 침만 삼키고 간다


―김종영 「홍시」 전문


  3.(가을)시, 시詩에 대하여
  가을이 되면 먹거리와 볼거리가 풍성하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힘써 일한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계절이 바로 가을이다. 나무들이 한여름의 열기를 고이 간직한 열매를 매단 채 나뭇잎에 알록달록 채색을 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가을에는 모든 것이 풍요로워 사람들의 마음도 넉넉해진다. 그래서 가을을 노래한 시들이 많다. 가을은 자연의 붓으로 그린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로 시각적 효과가 두드러진다. 거기에 귀뚜라미, 방아깨비 같은 풀벌레 소리가 어우러져 청각적 효과를 나타낸다. 여기에 먹는 것이 빠질 수 없다. 감, 밤 대추, 쌀, 고추, 콩 등 가을의 결실들이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하여 미각적 효과를 거둔다. 가을은 또한, 연탄불에 살랑살랑 부채질을 하며 전어를 굽고 집 나간 며느리의 코를 자극해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후각적 효과를 나타내기도 한다. 멍석에 고추를 말리고 가을걷이도 하고 과수나무의 열매도 따면서 만족을 느끼는 촉각의 효과를 누리기도 한다. 가을은 그야말로 오감만족의 계절이다.


  고추 말리는 아낙네의 손가을걷이하는 농부의 얼굴가을 햇살은 따사롭기만 하다.긴긴 기다림으로간절함으로한 해의 풍요를 기도하던 일탐스런 열매가 주렁주렁가을은 무르익어 가고이른 새벽부터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가을은 깊어만 가고하늘 높이 나는 고추잠자리가을은 높아만 가네.가을 그림자 길게 늘어지면한 해의 내 그림자도편히 쉬겠지.                                                             


―이제민 「가을단상」 전문
                                                       
  가을에는 우리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이 자리하고 있다. 갓 수확한 햅쌀을 빻아서 익반죽을 하여 할머니를 비롯한 집안의 여자들이 빙 둘러 앉아 송편을 빚었다. 송편 속의 고물은 팥과 깨를 넣었다. 송편을 예쁘게 빚어야 시집가서 예쁜 딸을 낳는다는 큰엄마의 말씀을 듣고 자그마한 손바닥에 반죽을 올려놓고 동글동글 궁굴렸다. 손끝 야무지게 꼭꼭 눌러 모양을 잡아 터지지 않게 빚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가도 반죽은 별로 줄어들지 않고 손바닥은 얼얼하고 다리에서는 쥐가 났다. 엄마는 갈라진 반죽에 다시 뜨거운 물을 붓고 치대었고 나는 코에 침을 바르고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내가 만든 송편은 시간이 갈수록 크기가 커지고 옆구리가 자꾸 터져 여기저기 땜빵을 해야 했다. “다른 것은 먹지 말고 이렇게 크고 못생긴 것은 네가 다 먹어야 돼” 하는 작은엄마의 놀림에 모두 아침 햇살처럼 투명하게 까르르까르르 웃었다. 추석에는 이처럼 온가족이 사랑으로 정성껏 빚은 송편과 햇과일. 햇곡식 등으로 풍요롭게 한 상 가득 조상님께 차례상을 올렸다.


내가 빚은 송편의
손가락 자국은
메뚜기만 하고
 
엄마가 빚은 송편의
손가락 자국은
방아깨비만 하다
 
할머니가 따온
솔잎은
소쿠리에서 솔솔 자고
 
송편 맛보려고
달님은
대추나무에 앉아 있다


                                                                 ―오탁번 「송편」 전문
                                                                                     
  변화하는 계절은 자연이 쓰는 아름다운 서정시이자 장엄한 서사시이다. 시인은 자연이 쓴 시를 읽고 몇 구절 빌어 와서 그저 끄적거릴 뿐이다. 모든 자연과 사물이 시가 된다. 사람도 자연이 쓰는 시의 일부이다. 너, 나, 우리 모두가 한 편의 시이다. 보이는 모든 것이 시여서 더 이상 구차한 말이 필요 없다는, 그런 시인의 마음을 표현한 시를 감상해 보자.


나의 신은 나입니다.  이 가을날
내가 가진 모든 언어로
내가 나의 신입니다
별과 별 사이
너와 나 사이 가을이 왔습니다
맨 처음 신이 가지고 온 검으로
자르고 잘라서
모든 것은 홀로 빛납니다
저 낱낱이 하나인 잎들
저 자유로이 홀로인 새들
저 잎과 저 새를
언어로 옮기는 일이
시를 쓰는 일이,  이 가을
산을 옮기는 일만큼 힘이 듭니다
저 하나로 완성입니다
새, 별, 꽃, 잎, 산, 옷, 밥, 집, 땅, 피, 몸, 물, 불, 꿈, 섬
그리고 너, 나
이미 한 편의 시입니다
비로소 내가 나의 신입니다. 이 가을날


                                                         ―문정희 「사람의 가을」 전문





*이외현 2012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안심하고 절망하기』. 전국계간지작품상 수상. 《아라문학》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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