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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문학 수록작품(전체)

21호/신작특선/명호경/보리똥 익는 빈집 외 4편


보리똥 익는 빈집 외 4편


명호경



주인 잃은 집
마당 시멘트 틈 사이
웃자란 잡초는
그리움에 푸르다
 
영영 지울 수 없는
가슴마다 핀 서러움
허망하다고
울컥 보고 싶다고


빈집 모퉁이

주인 없이 익은 보리똥에
눈시울 적시는 딸들


오살나게 슬픈
그리움 붉은 시절이다.





사과처럼 익다



그녀에게서는
풋풋한 사과 내음이 났다


지천명이 지났는데도
아직 좋은 향이 난다


샤워 중 샴푸를 집어 들자
신선한 사과향이란 제품명이 보였다


나에게서도
사과향이 날 것이다


비누도 샴푸도 
같이 쓰는 사이니까


서로에게 좋은 향이 난다며 
끝내 사과처럼 익어갈 일이다.





풀치조림



누구는 제주 은갈치가 맛있다 하고
누구는 목포 먹갈치가 맛나다 하는데
나는 없이 살아서 풀치만 먹고 자라
어느 것이 더 맛난지 알지 못한다
우리 회사 어선조업정보시스템에도
은갈치와 먹갈치 어종코드가 다르고
풀치는 기타 갈치로 구분하는 것을 보면
크기나 모양에 따라 맛도 다를 것이다
은갈치나 먹갈치는 부모가 같은 형제지간이지만
낚시로 잡아 비늘이 그대로면 은갈치라 하고
그물로 잡아 껍질이 벗겨지면 먹갈치라 부른다
풀치는 손가락 둘을 붙인 넓이보다 가늘어
갈치 조카뻘이 되는 작은 놈들인데
안강망 타시던 옆집 아제가 조금 때 입항하시면
바가지에 풀치 여남은 마리 돌담 위로 건네주셨는데
감자랑 무 넣고 간장에 졸이면 맛난 내음이 났다
울 엄니는 비린내 맡아서
이제 한 계절 나겠다고 말씀하셨고
조그만 새끼가 어찌나 좋은 냄새를 풍기던지
우리 집이 부잣집이란 착각도 들었더랬다.





안개



와룡산 안개에는
유월 초목향이 나고
창선바다 안개에선
꿉꿉하니 갯내가 났다
 
우중충한 장마 중에
비라도 잠시 그치면
젖은 산도 바다도
그리움에 가까워졌다
 
색이 빗줄기에 씻겨
단순화된 세상에
다가서는 것은 온통
눈물 머금은 채
수묵으로 번지고 있다.





쑥섬*



섬의 섬으로
하릴없이 늙어가던 쑥섬이
화사하게 꽃단장을 하셨다
 
하늘빛 아키네시아 나비 유혹하고
비취색 수국은 바다 희롱하다
헐떡길 오르막 숨소리마저 거칠다
 
나룻배 할머니 갑판장도
‘섬집아기’ 동요 부르시던 쑥 할머니도
팔자주름 추억에 감추시고
손으로 입 가리며 수줍게 웃으셨다
 
후박나무보다 더 푸른 지금이
섬의 꽃 파도에 넘실거리며
세월 수역선 경계를 긋고 있다.
     
    *쑥섬은 고흥군 외나로도 부속 섬으로 ‘전남1호 민간정원’ 꽃길 따라 탐방로를 걷다보면 숲도 바다도 품에 푸르게 안겨오는 작디작은 낙원이다.





<시작메모>


 시문학을 함께 수학하시는 선생님 중에 팔순을 목전에 두고 있음에도 아직 처녀처럼 고운 분이 계십니다.
 가끔 저의 시를 보면서 ‘부럽다’고 말씀하시는데 일제강점기에 유치원을 다녔을 정도로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을 아쉬워하시는 것을 보면 작은 섬에서 자란 점도 큰 자산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지난 시절을 생각하면 어려운 과정들을 통해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웠고 가슴 따듯한 시선으로 보는 습관도 생긴 것 같습니다.
 
 지나고 나니 다 그립습니다.
 지나고 나니 다 추억입니다.





*명호경 2017년 《리토피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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