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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문학 수록작품(전체)

18호/중편분재⑥/손용상/土舞 원시의 춤 제5화/원시의 춤


土舞 원시의 춤
제5화/ 원시의 춤


손용상



  1.
  계십니껴?
기척에 문을 열자 박기사와 백대리가 플레이트에 냄비 하나와 밥그릇 등을 받쳐 들고 그 앞에서 싱긋 웃으며 서있었다. 냄비에서는 김이 솟고 있었다.
“뭐요, 그게? 들와요들….”
  철민은 영 마음이 잡히질 않아 식사도 거른 채 저녁나절 내내 숙소에 처박혀 있자 그들이 온 것이었다. 하긴 대장이 심기 불편하여 인상을 쓰고 있으면 그 아래 것들의 마음인들 편할 리가 없을 터였다.
  그게 뭐요? 하는 표정으로 철민은 다시 한 번 냄비를 일별하며 혹 이 친구들이 낮에 잡은 뱀을 삶아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코를 찡그렸다.
“라면하고… 나시꼬랭(볶음밥의 일종)이라요. 여기서는… 안 묵으면 체력이 금방 딸리니까 자기 손핸기라요 백대리… 그거 꺼내라.”
  박기사가 철민을 한 번 힐긋 쳐다보며 뭐가 우스운지 키득키득하다가 백대리의 주머니를 툭 쳤다. 백대리는 기다렸다는 듯 죠니워커 한 병을 정글복 주머니에서 꺼내 탁자 위에 놓고 마치 제방처럼 익숙하게 냉장고로 가 얼음과 술잔, 스펨 등 안주를 꺼내왔다.

자요!
  박기사가 맥주 글라스에 반쯤이나 넘게 술을 따르더니 불쑥 철민에게로 내밀며 냄비 뚜껑을 열었다. 구수한 라면 냄새가 순식간에 철민의 식욕을 자극하며 퍼져 올랐다. 그는 암말 없이 박기사가 건네는 술잔을 받아 단숨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알콜이 식도를 타고 흘러드는 짜르르한 느낌이 온몸을 자글거리게 했다. 그리고 그는 냄비를 통째로 들어 국물 몇 모금을 후르륵 들이켰다.
  빈속에 들이부은 술이 잠깐사이 속을 화끈거리게 하며 희한하게도 조금 씩 조금씩 신경이 안정되는 느낌이 왔다. 그는 빈 술잔을 들어 박 기사에게 돌리며 나머지 빈 술잔에도 술을 채워 백 대리에게 건넸다. 백대리가 술잔을 받아 옆으로 밀치며 우선 할 일이 있다는 듯 부시럭 부시럭 호주머니를 뒤져 접은 백지 한 장을 꺼내 놓았다.
“뭐야, 그건?”
“답장요.”
그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뭐라 썼어?”
“그냥… 너희 편지 잘 받았다, 하지만 우리 입장은 너희 생각만큼 해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아무튼 내가 새로 부임했는데 한 번 만날 기회를 갖자, 장소와 시간은 너희가 정해라 등등… 그런 내용이고… 이사님 이름으로 썼어요.”
  그리고 그는 편지지를 철민에게 건넸다. 그는 술잔을 홀짝거리며 글도 모르는 편지 내용을 물끄러미 훑어보다가 뚜벅 그들에게 물었다.

“이거… 어떻게 전해주요?”
“그냥… 이사님 방문 앞 창틀에다 꽂아두면 누군가가 갖고 가요.”
“누군가가? 그러면… 지켜서 있다가 잡으면 될거 아뇨?”
철민이 초등학생처럼 눈을 깜박거리며 고개를 갸웃하자 백대리가 풀썩 웃었다.
“잡아서… 뭐하게요?”
“……?”
“잡아본들… 그래서 이곳 경찰 파견대에 넘겨본들… 뭔 소용 있겠어요? 오히려 분란만 생기고 나중에 그 탓에 해코지만 당할 수도 있을텐데….”
  이어서 박기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번 일 해결되면 며칠 있다 바로 한 보름 그라운드 서베이 들어가야 돼요. 임도 연장 현장조사도 미리 해야 되고… 그러려면 우선 그놈들과 이사님이 먼저 상견례를 하고 뒷구멍으로나마 그놈들의 허락을 받아야 되요. 정부허가서는 놈들에겐 말짱 헛것이거덩요.”
“보름 동안 그라운드 서베이 들어간다고? 그럼 나도 가봐야겠네. 그런데… 그들 승인이 필요하다고? ”
“그래요. 그때 한꺼번에 임도연장선 사전 조사해놔야지 끝나면 바로 장비 투입해야 되니까… 그네들이 즈네 졸개들에게 못건들게 하는 거지요. 이사님… 가시면 좋긴 하지만…, 물컹물컹 굼벵이도 자셔야하고… 암튼 고생 좀 하셔야 할 겁니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철민은 잠시 눈알만 디룩거리다 뜬금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라운드 서베이 가면… 굼벵이야 안 먹으면 되지만, 그보다 산거머리가 그리 많다메? 황이사가 그러대?”
“많지요. 나뭇잎 밑에 붙어 있다가 사람 지나가면 귀신같이 달라붙어요. 처음엔 실같이 가는데, 나중에 보면 통통해져요. 피 빨아서….”
  백대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럼 어떻게 떼내나? 눈에도 들어간다메?”
“눈에는… 가끔. 그냥… 담배불로 지지던가… 그러지요.”
  박기사가 백대리를 밀치며 끼어들었다.
“그거 뭐… 별거 아입니다. 보통 서베이 들어가면 흔히 있는 일이니까… 그보다 이사님 여러가지 걱정하는 심정… 이해합니다만…기왕 여기 오셨으니 그러려니 하고 상황 닥치면 그때그때 최선 아니면 차선으로 넘어가는 것도 지혜라꼬 생각해요 저희들도 처음엔 왈가왈부 많은 토론을 했지만… 결론이 그거라요 또 죄송치만 이 바닥 경험이고요.”
  그들은 완전히 산적들 편인 것처럼 마치 철민을 설득하러 온 사람들 같았다. 생각해 보면 본사 고위층의 측근으로서 그룹의 왕자란 별명이 있었을 만큼의 도련님이 불쑥 이곳에 와서 천방지축 아무 것도 모른 채 FM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려다 혹시나 자기들 신상에 불상사라도 벌어질까봐 솔직히 속으로 겁들을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들은 이미 현실에 길들여져 있는 셈이었다. 철민은 암말 없이 술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라면과 국물과 볶음밥이 동이 날 때까지 그들은 별 얘기도 없이 착잡한 심정으로 죠니 워커 한 병을 몽땅 비워버렸다.


  철민은 잠깐 생각을 모아보았다. 사람이 살아가며 참으로 별별 처지를 겪고 맞닥뜨리기도 하지만 그리고 그 와중에서 때로는 좌절을, 때로는 ‘해냄’의 환희를 맛보기도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적어도 남에게 내 목숨을 내놓고까지 달려들었던 상황은 아닐 것이라 싶었다. 만약 누군가 그러기를 강요한다면 아마 서로가 등을 돌리든가 원수를 지고 말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바닥의 현실은 적당히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며 지내다가 잘 되면 내 공로요, 못 되어도 그만이지 하는 생각들이 온 캠프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날더러 까불지 말라 이거지.
  철민은 직원들이 돌아가자 착잡한 심정으로 침대에 누웠다가 가슴이 답답해 창문을 열었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훅하니 밀려드는 바깥은 이미 깜깜해져 있었고 산 속엔 자가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만 퉁퉁퉁퉁 캠프 광장을 두드리고 있을 뿐 여기저거 거뭇거뭇 보이는 숙소들은 마치 도깨비 집들처럼 괴괴하기가 이를 데가 없었다.
  그러나 고개를 들자 하늘엔 하나 가득 별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슬글슬금 캠프 광장을 가로질러 주변을 거닐기 시작했다. 몇 군데 숙소에서는 마치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알전구가 창문을 통해 감빛을 뿜어대며 흐릿하게 언저리를 밝히고 있었다. 어둠에 눈이 익자 숙소 난간에 몇몇 현지 노무자들이 윗 통을 벗어던진 채 얘기들을 나누고 있다가 철민이 다가가자 손을 흔들어 주었다.
“슬라맛… 삐삐난(어서오세요, 두목).”
“안녕하세요.”
  철민은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주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한동안을 헤매다 가까운 한국인 직원 숙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안에서는 고스톱이라도 치는지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리며 열어젖힌 창문 바깥으로 마치 굴뚝처럼 담배연기가 뭉클뭉클 뿌옇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그들의 문 앞에 잠간 섰다가 왠지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흔들며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문득 서울의 아내와 꼬마들이 못 견디게 그리워졌다. 그렇게 그는 황당한 심정으로 또 한밤을 지샜다.


   2.
  새벽 5시. 자명종 소리에 철민은 눈을 떴다. 잠에서 깨어났다기보다는 어제 밤도 저녁 내내 가수 상태에 있다가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는 밤새 온갖 황당하고 단편적인 꿈속을 헤맸다. 느닷없이 며칠 전 익사한 죽은 직원이 헤엄을 치며 자기를 부르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고 밀림 속에는 커다란 구렁이가 앞을 가로막는 기분 나쁜 장면도 들어있었다.
  그런가 하면 서울 집에서 아이들과 놀던 중 아내가 엉뚱하게도 게릴라 대장이랑 사람과 함께 불쑥 나타나 황황히 아이들을 데리고 사라지는 황당한 꿈도 꾸었었다. 누구 말마따나 기가 약해진 탓일까? 철민은 머리를 흔들고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신선한 아침 공기가 새어들 듯 실내로 들어와 앉으며 그나마 조금씩 얽힌 기분을 풀어주고 있었다. 캠프 주변을 둘러싼 거대한 숲은 막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아 무수한 나뭇잎들이 제가끔 너울거리며 아침 이슬로 세수를 한 듯 은빛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철민은 손바닥으로 푸석한 얼굴을 고양이처럼 쓸어내리며 탁자로 걸어가 커피포트에 물을 부었다. 그리고 그는 탁자 위에 놓인, 어제 아침에 받았다는 게릴라 대장의 답장에 눈을 주었다. 봉투 위에 부전지로 붙어있는 백 대리의 메모엔 알맹이의 내용이 이렇게 요약되어 씌어져 있었다.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당신 답장 잘 받았다. 명일 새벽 6시에 만나자. 올 때는 필히 Mr.백과 함께 오되 3명 이상이 넘지 말 것이며 약정된 지원금도 지참하길 바란다. 우리는 그 신세를 잊지 않을 것이며 우리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영수증을 발급할 것이다. 신의 가호를…….
  ―임시정부 좋아하네.
  철민은 저절로 한숨이 푹 쉬어졌다. 어제 저녁 권대리 시신 운구차 자카르타까지 출장을 다녀온 정부장, 박기사, 백대리서껀 모두 다시 모여앉아 대책회의를 했지만 이미 어쩌구 저쩌구 할 뾰죽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그냥 돈 준비하고 아침 일찍 그들을 만나 앞으로도와달라고 엉기는 것만이 현재로서는 최선인 것 같았다.
“야, 혹 갸네들 총 들이대고 납치라도 하면 어쩌냐?”
  철민이 찜찜한 마음에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을 때 정부장이 머리를 가로 저었었다.
“그런일… 없을 겁니다. 갸네들 가만 앉아 한달에 백만 루피아씩 받는데 뭐하러 사람 데려가 토벌군 불러들이겠습니까? 마, 마음 편히 가지세요.”
  하긴 실리로 따지자면 공연히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손바닥에 땀이 배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일어났습니껴?”
  밖에서 시간 맞춰 찾아온 박기사 일행이 문을 노크했다. 철민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시다 말고 문을 열어 그들을 맞았다. 바깥엔 발동을 건 짚에 백대리가 앉아 있었고 박기사는 정글복 차림인 채 륙색 하나만 달랑 들고 눈짓으로 철민을 재촉하고 있었다.
 “길은… 알아?”
 “그라문요, 얼마 안멀어요….”
  철민이 문 앞을 나서며 묻자 박기사가 무뚝뚝하게 말을 받았다. 그렇게 그들은 마치 사지로 들어가듯 각오를 새로이 한 채 길을 떠났다. 그리고 철민은 덜컹거리며 산길을 내달리는 찦에 앉아 참으로 별별 생각을 다 했었다.
  ―사람 일이란 모르잖냐, 차라리 유서라도 한 장 써놓고 오는걸….
  담배를 피워 물었으나 맛도 알 수 없었고 오히려 빈속에 블랙으로 먹은 커피가 속을 쓰리게 하며 카페인 작용을 하는지 손까지 가늘게 떨렸다. 흥분인지 두려움인지가 한데 뒤섞여 영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반면 박기사는 태평이었다. 속은 어떤지 몰라도 겉보기로는 아주 늠름해 뵈는 것이 철민이 보기엔 이곳의 두목은 자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인 것 같아 쓴 웃음이 올라왔다. 철민은 잠깐이나마 침묵이 부담스러워 괜스레 그를 집적였다.


“박기사?”
“예에.”
“당신… 군대… 어디 있었어?”
“강원도요.”
  박기사가 철민의 마음을 읽었는지 흘깃 그를 쳐다보며 이어서 불쑥 농담을 한마디를 던졌다.
“이사님요?”
“……?”
“제가 말이요, 옛날에 군대 있을 때 여군 하사 하나를 꼬셔 묵은적이 있거덩요.”
“……!”
“그런데요, 그 가시나가 처음엔 지가 계급 높다고 반말 찍찍해대며 눈에 디지게 힘을 주더라구요.”
“……?”
“그라다가… 우째우째 내한테 꼬시켜서 여관을 갔는데… 한참 그짓을 하다가 홍콩갈만 할떄 내가 마 팍 빼뿌맀거덩요”
“그래서?”
  백대리가 킬킬대며 철민 대신 물었다.
“갑자기 그 가시나가 눈을 동그랗게 떠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물었지요, 가시나 니 이래도 하사가? 그랬더니 그 가스나가 뭐라고 했게요?”
“뭐랬는데?”
“아아 아이다, 아이다, 나 하사 아이다, 그라문서 내 물건을 콱 붙잡고 사정을 하더라니까요.”
“예라 이….”
  철민이 풀썩 웃음을 터뜨리자 박기사가 정색을 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니까요, 야네들도 벨거 아니라 생각하시고… 긴장 푸시라고요. 야네들은 어차피 돈 갖고 쇼부봐야 되니까… 다부지게 마음 잡수시라요.”
  박기사는 엉뚱하게 얘기를 이 상황에 끌어다 붙이며 담배 한 대를 새로이 붙여 철민에게 건넸다. 그 사이 햇살이 본격적으로 밀림 위로 퍼지기 시작하며 숲 안개가 조금씩 조금씩 그 자락을 걷어내고 있었다. 박기사의 표정으로 보아 그들과 약속한 장소에 거의 다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드문드문 바위가 방석처럼 퍼져있는 한 장소에 이르자 이윽고 백대리가 차를 세우며 철민을 돌아보았다.
“내리시죠!”
  철민이 암말 없이 어금니를 주근주근 씹으며 조용히 차문을 열었다. 어디선가 피리릭 피리릭 새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그들 간의 신호음이란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저만치 숲 속에서 무슨 물체인가 휙 지나가는 것이 얼핏 비쳐왔다.


  3.
  그들은 단지 다섯 명쯤 되는 것 같았다. 두 녀석이 광장으로 나타나고 세 녀석이 뒤에 남아 가증스럽게도 인원이 많은 것처럼 인근 수풀을 흔들리게 하는 초자적인 병법을 구사하는 것이 오히려 측은하고 귀엽기까지 했다. 아마 한 놈은 총이라도 겨누고 있으리라. 철민은 잠깐 동안 상황을 파악하자 오히려 마음이 푸근해지며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게릴라 대장이란 작자는 의외로 마호 병에 홍차까지 담아와 철민에게 권하며 순박하게 웃음을 보였다. 다만 귀걸이와 더불어 식인종처럼 인중에 코걸이까지 한 것이 이채로워 보였다.
“저 넘… 코걸이는 왜 했냐?”
“무섭게 보이려구요.”
  철민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리자 백대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박기사와 백대리는 기왕에 그를 아는 듯 현지말로 인사를 나눈 후 철민 쪽을 돌아보며 소개를 하는 듯 했다. 대장이 뭐라고 지껄이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래?”
  철민이 박기사를 돌아보았다.
“환영한대요. 그리고… 도와줘서 고맙대요.”
  ―환장하겄네!
  철민은 혼잣소리로 중얼거리면서도, 웃는 얼굴로 그의 손을 잡자 그는 갑자기 심각한 표정이 되며 꽤나 길게도 무언가 일장연설을 해댔다. 백대리의 통역에 의하면 그 내용인즉 이러했다.
  ―들으니 며칠 전 너희 직원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던데, 조의를 표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리얀자야주의 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너희들처럼 이곳에 와서 일하는 외국 기업들이 조금씩 도와주기에 많은 힘을 얻고 있다. 곧 해방의 시기가 다가올 것이며 그때가 되면 지금까지 진 너희들의 신세를 그 배로 갚을 생각이다. 오늘 이렇게 당신이 직접 와서 우리를 격려해주니 참으로 고맙다. 그 보답으로 당신네 회사 사람들이 산에서 일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우리도 최대한 협조를 약속하겠하겠다. 고맙다…… 등등.
  대충 이런 말이라고 했다. 철민은 그의 말하는 태도가 하도 진지해서 속으로는 웃음이 가글거렸지만 차마 표정으로 나타낼 수가 없어 그와 똑같이 심각한 얼굴을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솔직히 그는 이 나라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또 알 필요도 없었지만, 상황 돌아가는 것을 보니 이 나라 중앙정부도 골치깨나 아플 것 같았다. 자그마치 영토 중 대.소 섬이 4만여 개나 되는데다 언어가 4백여 종, 인종도 수백 종으로 갈라져있으니 그들을 통솔하자면 여간한 지도력과 카리스마가 없으면 불가능할 것이었다. 거기다가 조금만 사는 터전이 넓고 머리에 먹물이 좀 들어간 자들이 사는 곳엔 당연히 독립하고 싶은 욕망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게릴라 대장이 말하는 꿈이 이루어지려면 시쳇말로 기차바퀴 펑크가 나든 말대가리에 뿔이나 나야만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철민은 겉으로라도 너희 생각과 의도는 알만하다는 의사를 표시한 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다짐을 받기 위해 백 대리를 앞세우고 뚜벅 입을 열었다.
“우리 직원 조문은 고맙다. 그런데… 너희는 전쟁을 해봤나?”
“무슨 소리냐?”
“다른 뜻이 아니라… 우리는 반세기동안에 두 번이나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는 국민들이다. 내가 왜 이런 얘길 하냐면… 우리들은 그렇기 때문에 별로 겁도 없고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민족인데… 혹시나 너희들… 우리가 너희들에게 겁먹어서 이렇게 왔다고는 생각하지 말아달라는 얘기다.”
“……?”
   통역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녀석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눈알만 디룩디룩 굴리며 철민을 쳐다보고 있었다. 박기사가 끼어들며 다시 거들었다.
“우리 삐삐난이 너희에게 부탁하는건… 아무튼 우리 직원들에게 해코지하지 말아달라는 거다. 만약 안 그러면 돈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너희랑 맞 짱 한 번 뜰 것이다”고 말했어요.”
  녀석이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박기사의 배에 그들이 지니고 다니는 필수 호신용인 정글용 큰 칼을 들이대고 찌르는 시늉을 했다. 박기사가 그 칼을 손으로 걷어내며 태권도 포옴으로 그의 목을 가격하는 포즈를 취하자, 숲속 광장은 갑자기 무도장이라도 된 듯 서로를 껴안고 어깨를 들썩이며 갑작스럽게 누구도 연출하지 않은 원시의 춤판이 벌어졌다.
 
  ‘이리안 자야’―빛나는 승리의 땅이라 한다던가… 하지만 그 곳에도 ‘승리의 빛’은 없었고, 그들은 마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처럼 매일매일 ‘고도godot’를 기다리며 헛소리로 세월을 죽이고 있었다.
  철민 일행들 역시 무언가 삶의 지표라도 건질까 이 섬에 찾아들었지만, 암 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다만 거스르지 못하는 자연의 순수純粹만이 살아 숨 쉬고 있을 뿐 그들이 찾는 ‘빛’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으이 으헤야… 꼬레안 이리안 자야 자야 으히헤야~으헤야…….
  게다리춤 같이 몸을 흔들며 뜻 모를 노래를 흥얼거리던 게릴라 대장이 철민을 손짓해 함께 끌어들였다. 철민은 처음엔 어색하게 마지못해 주춤주춤 끼어들었지만, 그러나 주술 같은 그들의 노래 가락과 춤사위에 이끌려 잠깐 사이 자기도 모르게 그들의 세계에 무당처럼 빨려들고 말았다. 인도네시아 민속춤인 케작 댄스(원숭이 춤)와는 또 다른 그들만의 ‘원시의 춤’이었다.
  철민은 마치 길들여진 장마당 유랑 극단의 삼류 배우들처럼 춤추고 노래하고 종내에는 괴성을 지르며 머릿속에 땀이 나도록 그들과 함께 게 다리춤까지 따라 추었다. 그리고 이 날의 춤판은 흡사 며칠 전 객사한 현장직원의 원혼을 달래는 듯, 또는 이 ‘빛나는 땅’에서 ‘빛’ 없이 한 삶을 마감했을지도 모르는 우리네 할머니들의 한限을 달래듯, 먼 유배의 땅에서 벌어지는 살풀이 한마당 토무(土舞/토속 춤)와 같아 철민은 공연히 순간순간 관자놀이에 찌르륵 찌르륵 소름이 돋아 올랐다.





*손용상 손남우孫南牛 경남 밀양 출생. 1973년 〈조선일보〉신춘문예 소설 당선. 소설집 『베니스 갈매기』, 『똥 묻은 개 되기』. 장편소설 『그대속의 타인』, 『꿈꾸는 목련』. 전작장편掌篇 『코메리칸의 뒤안길』. 중편소설 『꼬레비안 순애보』, 『이브의 능금은 임자가 없다』. 콩트·수필집 『다시 일어나겠습니다, 어머니!』. 에세이집 『우리가 사는 이유』. 에세이·칼럼집 『인생역전, 그 한 방을 꿈꾼다』. 시·시조집 『꿈을 담은 사진첩』. 경희해외동포문학상, 미주문학상, 고원문학상 수상. 한국, 미주문인(소설가)협회, 달라스 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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