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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문학 수록작품(전체)

18호/아라세계/신연수/인천을 대표하는 극작가 함세덕咸世德


인천을 대표하는 극작가 함세덕咸世德
―고향을 모티브로 작품 활동, 한국전쟁 때 사망


신연수



  근대문학이 도입된 이후 인천을 대표하는 작가를 꼽는다면 진우촌秦雨村(본명 宗爀)을 비롯하여 함세덕咸世德, 김동석金東錫, 현덕玄德 등을 꼽을 수 있다. 그 중 인천에서 태어나고 인천에서 자란 사람으로 중앙문단에서 촉망받던 사람이 바로 극작가 함세덕이다. 리얼리즘 연극의 최고로 꼽히는 그의 작품에는 인천이 곳곳에 녹아 있다. 그에게 고향 인천은 훌륭한 작품의 모티브였던 것이다. 「해연海燕」을 비롯하여 「무의도기행無衣島紀行」, 「황해黃海」 등은 제목부터가 인천을 떠올리게 하는가 하면 「산山허구리」, 「동승童僧」 같은 작품에도 인천의 지명이 여러 번 나타나고 있다. 때문에 인천사람들에게 그의 작품은 더욱 소중하고 애틋할 수밖에 없다.


  함세덕의 본적은 인천부 용리 177번지. 조부 함선지咸善志가 정3품 벼슬을 지내다가 대원군 때 인천으로 내려 왔다. 부친 함근욱咸根彧은 1882년 8월 6일생으로 1901년 5월 한성외국어학교 인천지교를 졸업한 후 한때 모교의 부교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 후 함근욱은 나주군청 주사가 되어 가족과 잠시 떨어져 지냈지만 당시 가족들은 인천부 화평리 455번지 18통 1호(조부의 원적지)에 살았다. 그 후 함근욱은 1915년 목포부청으로 발령이 나자 부인, 동생 가족들과 목포로 이주했다. 함세덕은 그 해 5월 23일 함근욱과 모친 송근신宋根信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함근욱의 호적에는 서자인 금성錦聖이 올라 있는데 금성은 함근욱이 홀로 나주에서 근무할 때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함세덕의 이복형(3세 연상)이다. 호적에는 함세덕이 장남으로 올라 있지만 목포로 이주한 이후 이복형은 가족의 일원으로 함께 살며 맏형으로 인정을 받았다.


  함세덕의 아명은 성달聖達이었다. 그의 집안은 성聖자를 돌림자로 썼고 그래서 함세덕을 집에서는 성달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가 태어난 곳은 인천부 화평동 455번지(그의 묘비에는 강화도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이고 출생 직후 목포부 북교동 92번지로 이주했다. 그가 목포공립보통학교 입학 당시 부친은 관직을 그만두고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는 보통학교 입학 후 1년 만에 부친이 인천으로 이주함에 따라 그도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 2학년으로 전학했다. 인천공립보통학교의 학적부를 보면 부친의 직업은 상업, 주소는 인천부 금곡리 14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성적은 10점 만점에 평균 8~9점으로 우수한 편이었다.


인천상업학교(이하 인상)에 입학하기 이전의 함세덕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체구의 평범한 소년이었다. 인상仁商 1학년 때의 키가 133.7cm이고 몸무게 26.7kg이었으니 그의 작은 모습이 짐작된다 하겠다. 그는 인상을 졸업할 무렵인 5학년(현재 고등학교 2학년 해당)이 되어서도 여전히 키 160cm에 몸무게가 46kg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왜소했다.


  함세덕은 1929년 3월 25일 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2일 인천도립상업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인천에는 일본인들이 주로 다니던 인천시립상업학교(일명 남상업학교)와 한국인들이 주로 다니던 인천도립상업학교(일명 북상업학교)가 있었다. 이 두 학교는 현격한 수준차가 있었다. 한국인들이 다니던 북상업학교는 금융계로 취업이 쉬워 경쟁률이 높은 일류 학교였던 반면 서울로 진학하지 못한 일본인들이 주로 다니던 남상업학교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함세덕이 인천도립상업학교에 진학해 5학년이 되던 해에 두 학교는 통합하게 되고, 그는 통합으로 이름이 바뀐 5년제 인천공립상업학교를 1934년 3월 6일 졸업한다. 인상 20회 동창회 명부에는 25인의 한국인과 45인의 일본인이 함께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인상 학적부를 보면 함세덕의 성적은 1학년 때 53인중 10위를 했으며 2학년 때는 35인중 11위를 해 비교적 상위에 들었다. 그러나 3학년 때는 36인중 26위, 4학년 때는 35인중 20위로 갈수록 성적이 떨어졌다. 그리고 남상업학교와 북상업학교가 통합한 후인 5학년 때의 성적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반면에 3학년부터 지각, 조퇴가 상당히 늘어났다. 성적이 떨어진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고학년이 되면서 학업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다녔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겪었던 경험들이 후에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때의 추억들이 그의 일생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고 중요하다 하겠다.


  이 무렵 그는 이규문李圭文, 김창건金昌建, 강영흠姜榮欽등 3명의 친구들과 자주 어울려 다니며 ‘4인조’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그러나 4인조 중 한 명인 김창건이 일본에 저항하는 만포진사건에 연루되어 권고 퇴학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은 실제는 4명이 모두 관련되어 있었는데, 주동으로 지목된 김창건 한 명만 희생이 된 것이다. 그 후 김창건은 일본으로 유학을 갔으며 강영흠은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조흥은행에 입사, 함세덕이 사망한 이후에도 금융인으로 남아 인상 출신의 대표적인 금융인의 한 사람이 됐다. 강영흠은 그 후 한국은행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국민은행 창립에 참여, 국민은행 상무를 역임했는데 생전에 친구 함세덕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다.


  함세덕은 5학년 여름방학 때 이들 친구들과 금강산을 여행했다. 부모님의 허락을 받지 못하자 가까운 관악산에 다녀온다고 거짓말을 하고 금강산으로 떠났는데, 이 여행은 훗날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동승」의 창작동기가 된다. 초기의 대표작인 「동승」은 1939년 동아일보사 주최 제2회 연극대회에 참가, 상연된 최초의 무대공연 작품이다. 그의 희곡집 『동승童僧』의 발문을 보면 “동승은 동아일보 주최의 연극콩쿨에 참가한 무대상의 처녀작이다. 학창시대 금강산에 천막생활(캠핑) 갔다가 마하연摩訶衍에서 본 사미승沙彌僧에게서 얻은 환상이 이 작품을 집필케 한 동기”라고 밝히고 있다. 또 이 작품은 광복 후인 1949년 「마음의 고향」이라는 제목으로 동서영화사에서 영화화되었으며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의 작품에는 인천 지명이 곧잘 등장하는데 「동승」에 나오는 지명 중 ‘가재울’은 현재 인천의 ‘가좌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밖에도 「산허구리」의 ‘먼우금’(연수구 일대)과 ‘배다리’, 「고목古木」의 ‘소부리’(우각리, 창영동)와 ‘수문리’(수문통, 송현동) 등의 지명이 모두 인천의 지명에서 딴 것이며 「에밀레종」의 등장인물인 ‘미추홀彌鄒忽’은 인천의 원래 이름에서 빌려 쓴 것이다.


  함세덕은 희곡을 쓰기에 앞서 먼저 시를 발표했다. 1935년 2월 1일 동아일보에 실린 시 「내 고향의 황혼」은 인천의 풍경을 표현한 것으로 인천을 모티브로 한 희곡과 다를 바 없다.


황혼이외다.
팔미도八尾島 멀리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검은 섬 우에
배부른 범포帆布 비치며 노을 뿜은 석양이 걸렸습니다.
항구의 불빛 멀-게 떨어져 부두의 등대가 어렴풋이 조을 때
기슭에 나룻배가 초저녁 반짝이는 샛별 아래
고요히 안식의 기도를 올립니다.…
(이하 생략)


  그는 이 밖에도 「저 남국의 이야기를(1935.3.19. 동아일보)」, 「저녁(1935.9.27. 동아일보)」등의 시를 더 발표한 후 희곡으로 방향을 바꾼다. 함세덕의 첫 희곡 작품은 1936년 9월 『조선문학朝鮮文學』에 발표한 「산허구리(1막)」다. 이 작품은 아일랜드 극작가 존 밀링턴 싱Jhon Millington Syng의 「바다로 가는 기사들」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인천 인근의 섬과 주민들의 생활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후 그는 1940년대 말까지 활발한 창작활동을 전개한다. 특히 1940년 1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해연(1막 2장)」이 당선된 이후 「낙화암(落花巖, 4막, 1940년 1~4월 조광)」, 「닭과 아이들(1막 2장, 1940년 3월 15~31일 동아일보)」, 「5월의 아침(1막, 1940년 7월 소년)」, 「동어의 끝(1940년 9월 조광)」, 「서글픈 재능(일명 추석, 1940년 11월 문장)」, 「심원의 삽화(1막, 1941년 2월 문장)」, 「무의도기행(2막, 1941년 4월 인문평론)」 등을 연달아 발표한다.


  함세덕은 인상을 졸업한 후 금융계통에 취업하지 않고 경성 본정통(현 충무로)에 있는 일한서방日韓書房에 취직한다. 금융계에 비해 보수가 적고 미래도 보장되지 않는 서점에 취업했다는 것은 일상적 삶을 떠나 작가의 길을 선택한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이때 알게 된 수필가 김소운金素雲을 통해 연극계의 은사이자 나중에 라이벌이었던 유치진柳致眞을 소개받았다. 유치진은 처음 그에게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데 그가 194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것을 계기로 예술성을 인정해 본격적인 교류를 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유치진과의 인연으로 1941년 3월 대표적인 친일극단인 현대극장現代劇場 창립회원으로, 또 조선극작가동호회朝鮮劇作家同好會의 회원으로 참가해 친일연극 활동을 하게 된다. 이 두 단체는 모두 유치진이 대표를 맡고 있었다. 그리고 함세덕은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전진좌前進座 연출부에서 본격적인 연극수업을 하는 동시에 축지소극장築地小劇場에서 직접 연출까지 맡아 공연을 한다.
  그리고 1944년 7월 귀국하는데, 귀국 후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친일적인 희곡을 쓰는가하면 연출까지 하고 또 국민연극에 대한 평론을 발표하는 등 변절되기 시작한다. 이 무렵 작품으로는 1942년 3월 『대동아大東亞』에 발표한「에밀레종」과 1942년 3월 『국민문학國民文學』에 발표한 「추장 이사벨라」 등이 있는데 두 작품 모두 일본을 미화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함세덕은 35세로 사망하기까지 결혼에 대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30세 즈음 부모의 강압에 의해 마음에 없는 결혼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우자는 고등교육을 받은 목사의 딸로 그와 동갑내기였다. 약 2년 만에 서로 합의하여 그녀가 개가하기까지 그는 연극에 빠져 아내를 전혀 돌보지 않았고 각방을 써 아이도 없었다.


  광복 후 그는 또 한 번의 변신을 시도한다. 돌연 좌익인 조선연극동맹朝鮮演劇同盟에 가입해 문화투쟁을 전개하는가 하면 황철, 박민천, 서일성 등과 함께 좌익극단인 낙랑극회樂浪劇會를 조직하기도 한다. 낙랑극회는 창립공연으로 쉴러의 작품 「군도群盜」를 번안한 「산적山賊」을 공연해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 무렵 그는 다시 창작활동에 적극 나서는데 이 때의 대표작으로는 일제강점기에 발표되었다가 전면 삭제를 당한 「감자와 쪽재비와 여교원」을 전면 개작한 「하곡夏穀(1947년 1월 제1회 종합예술제 공연)」과 「기미년 3월 1일(1946년 4월 개벽 74호)」, 「태백산맥(1947년 2월 민중 등 합동 공연) 」, 「고목(1947년 4월 문학 3호)」 등이 있다. 그리고 함세덕은 1947년 6월 20일 유일한 작품집인 『동승』을 박문출판사에서 발간한다. 46판 크기에 총 209면인 희곡집 『동승』에는 대표작인 「동승」을 비롯하여 「추석」, 「무의도기행」, 「해연」, 「감자와 쪽재비와 여교원」 등 모두 5편이 실려 있다. 책 뒤에 붙인 ‘동승童僧을 내놓으며’를 보면 그의 희곡창작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20에 시 쓰고 30에 소설 쓰고 40에 희곡 쓰란 말이 있다. 이것은 문학 장르 중에서도 희곡이 가장 내용형식 공히 난삽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맹인불공사盲人不恐蛇로 20에 나는 극작에 붓을 들었었다. (중략) 내 작품의 거의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 중에 쓰여 졌으며 문학과도 달리 도경찰부, 경무국, 관할서의 삼중사중의 주선朱線과 헌병대, 군보도부의 부전符箋을 뚫지 않으면 안 되는 야만적 검열망은 뻗어 나갈려는 나를 문자 그대로 질식거세窒息去勢하고 말았다. 혁명가가 못되는 옹졸한 나는 무영탑, 낙화암, 에밀레종 등의 낭만극으로 향수와 회고적인 민족감정에 호소하여 일제에 소극적이나마 반항하였고 추장의 말로, 뿌뿌랑殉死 등을 극화하여 약소민족의 비분을 노래했지만 결과에 있어서는 조선문화의 발전에 역행적 역할을 한 것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위 국민연극 속에서 한 가지 얻은 것은 기술이었다. 이것만은 참으로 불행 중의 다행이리라. 나는 이 기술을 토대하여 인민의 한 구석에 서서 앞으로의 새로운 민족연극을 창조하기에 부심하려고 한다. 내선일체, 징병, 징용, 증산, 일어상용日語常用, 미영격멸米英擊滅 이것이 작가에게 명령된 놈들의 강제적 내용이었다. 이 명령을 피하는 길과 또 한 가지 상실된 희곡의 문학성을 찾기 위하여 한 편 두 편 씌어진 것이 10여 편의 1막幕물이고, 그 중 선택된 5편이 이 소책자이다. 1막물이란 대체로 30~40분이 근대극 이후의 통례이다. 그러나 다막多幕물로 분할될 내용을 1막에다 통째로 담은 것도 있다. (중략) 여기 수록된 작품은 전부가 내용에 있어 다막물이 될 수 있는 양이다. 시간에 있어 1시간 20분을 요하는 것들이다. 이 점이 소위 단편에 속하는 1막물과 약간 다른 점이다.


  1945년 광복에 즈음하여 그의 가족은 서울 종로구 동숭동 2번지의 19로 이사한다. 그리고 함세덕은 1946년 연극이 인연되어 만난 10세 연하의 여인과 결혼을 한다. 그러나 결혼 직후인 1947년 봄 열기로 한 「제2차 전국문학자대회」가 실패하면서 좌익 문인들이 대거 월북하는데 그도 그 일원이 되어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약 1년 후 그의 아내도 남편을 따라 북으로 갔다. 그의 아내는 북에서 아이를 하나 낳았으나 곧 죽고 말았다. 그를 비롯한 월북 연극인들은 북한연극의 발판을 세웠다. 이들은 당의 노선에 따라 목적극을 즐겨 썼는데 즐겨 다룬 내용은 남한의 반정부 투쟁이었다. 함세덕 역시 제주 4·3항쟁을 다룬 「산山사람들(1949년 12월 『문학예술』 12호)」과 이승만을 타도 대상으로 삼은 「소위 대통령(1950년 5월 『종합단막희곡집』)」 등 두 작품을 창작했는데 현재 이 작품들은 북한의 문학사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월북 전 남쪽에서 쓴 「동승」이 언급되는 정도이다.


  함세덕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50년 6월 29일 사망했다. 북한 인민군 선무반 제2진으로 남하하다가 서울 신촌 부근에서 수류탄 오발사고로 큰 부상을 당한다. 트럭에 실려 서대문 적십자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복강내출혈로 혈액이 부족해 수술 도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적십자병원의 연락을 받고 동생인 성덕이 달려갔을 때는 이미 사망한 후였다. 6개월 후 만삭이 된 그의 아내가 남으로 내려 왔다.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에 배급이 끊겨 살 수가 없었다며 친정과 시댁을 오가던 그녀는 온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함께 왔던 일행과 다시 북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처음에는 장충단 뒷산에 있는 임시묘지에 묻혔다가 수복 후인 1954년 6월 1일  망우리에 있는 가족묘지로 이장했다. 죽산 조봉암의 묘 앞에 난 산책로에 있는 동천원 입구 표지판에서 산 아래쪽으로 1~2분 정도 가면 그의 묘를 찾을 수 있다. 그의 부모와 동생 성덕의 옆에 안치된 그의 묘지번호는 109506이다. 그의 비석 뒷면에 는 ‘삶은 누군가의 손을 붙잡는 일이고,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일이다’라는 구절이 쓰여 있다.


  함세덕의 작품은 한국전쟁 이후 남쪽에서는 금기시되다가 1988년 월북문인들의 작품이 해금될 때 함께 풀렸다. 이전에는 소수의 연구자 외 일반인들은 함세덕이 누구인지조차도 몰랐던 것이 해금이 되자 여러 가지 관련 서적이 발간되기 시작했다. 1991년 유민영이 처음으로 『함세덕 희곡선(새문사)』을 발간한 것을 비롯하여 예술연구회에서 「함세덕 연극의 재조명」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는가 하면 1998년에는 2권으로 된 『함세덕 문학전집』이 발간(노제운 편, 지식산업사)되기도 했다. 이 밖에도 「함세덕 연구소」가 설립되는가 하면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함께 연구논문들이 계속 발표되는 등 큰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참고문헌]
『문학으로 인천을 읽다』, 이희환, 작가들, 2010년.
『인천인물 100인』, 경인일보 특별취재팀, 도서출판 다인아트, 2009년.
『인천문화를 찾아서』, 이희환, 도서출판 다인아트, 2003년
『인천문학사』, 한상렬, 도서출판 서해, 1999년.
『동승』, 함세덕, 박문출판사, 1947년
 오애리, 「새 자료로 본 함세덕」, 『한국극예술연구』 1집, 한국극예술학회, 1991년





*신연수 시인. 인천문협 회원, 근대서지학회 회원. 법률신문사 이사 겸 총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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