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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문학 수록작품(전체)

19호/특집Ⅱ 봄, 시의 에너지/천세진/‘봄의 언어’를 선언한다


‘봄의 언어’를 선언한다


천세진



  1. 디자이너의 ‘봄의 언어’
  겨우내 형상의 두터운 갑옷 속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던 세계가 마침내 형상을 바꾸기 시작했다. 계절마다 열리는 시장은 이제 한산함에서 분주함으로 옮겨갈 것이고, 늘어난 분주함만큼의 언어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겨울이나 가을, 여름의 언어로는 이 계절을 설명할 수 없다. 계절의 세계를 기웃거리며 그 세계로 들어간 하나의 단어는 4개의 다른 옷을 선물 받는다. 매번의 잔치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참석하라는 조건이 달린다. 그 중 하나의 옷인 ‘봄의 언어’가 봄을 이야기할 자격을 갖는다. 
  사람들이 환호하고 추앙하는 ‘봄의 언어’는 서민들은 입을 수 없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기이한 옷을 만드는 명성이 자자한 의상실에서 탄생한다. 그들은 언제나 겨울이 시작되면서 이미 ‘겨울의 언어’가 더 이상 쓸모없다고 선언했고, 봄이 시작되면서 ‘봄의 언어’가 더 이상 쓸모없다고 선언해 왔다. 시작되었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이미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이다. 더 이상 유효하지 않기 때문에 디자이너들은 이전의 봄을 흔적 없이 폐기하는 것에 열중해 왔다. 그래야 새로운 ‘봄의 언어’가 창조의 산물이 되는 것이다. 

  창조란 새로운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동시에 은폐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면, 5분 전에 만들어진 것을 다시 만들어도 그것은 창조가 된다. 창조는 또한 앞선 시간이기도 하다. 가장 앞선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 복제와 복사가 된다.
  디자이너들은 ‘봄의 언어’를 자신들이 누구보다 앞서서 탄생시킨다고 말해왔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전에 탄생한 모든 ‘봄의 언어’를 카타콤에 처박았다. 그리고 다가오는 ‘봄의 언어’도 재빨리 카타콤에 처박을 것이다. 디자이너의 ‘봄의 언어’는 봄이 되기 전에만 유효하다. 시인은 결코 언어의 디자이너여서는 안 되지만, 일단의 무리들은 의상실에서 시인의 자격을 얻었다. 


  2. 대장간에서 태어난 ‘봄의 언어’ 
  또 다른 ‘봄의 언어’가 대장간에서 탄생한다. 언어를 연금鍊金하는 이들이 겨우내 쉬고 있던 아궁이에 지하 깊은 곳에서 끌어온 갈탄을 넣고 불을 붙인다. 갈탄 깊숙이에 화석으로 잠겨 있던 태고의 언어가 재가 되기 전에, 비상하여 우주로 다시 돌아가기 전에, 땀으로 사계四季의 언어를 익힌 웃통 벗은 사내들은 분주하게 ‘가슴’이라는 풀무로 벌겋게 달군 문자의 돌을 머리로 옮겨 메질을 하고 담금질을 하여 ‘봄의 언어’를 준비한다.

  대장간에서는 ‘봄의 언어’를 선언하지 않는다. 처마에 더는 고드름이 열리지 않고, 대장간 옆 밭에서 냉기로 높아졌던 흙들이 가라앉고 있었을 뿐이다. 그걸 눈치 챈 사내들이 분주하게 망치를 두드린 것이다. 그래, 그럴 수는 있다. 망치 소리가 두터운 계절의 문을 두드려 봄의 전령사가 소란함을 못 견디고 “그래 알았다! 이제 봄의 언어를 담금질 하라!”고 하루나 이틀 쯤 서둘렀을 수는 있다.   
  대장간 사내들이 땀으로 빚은 ‘봄의 언어’는 오일장이 열리는 날, 대장간 좌판에서 볕을 쬐며   밭을 ‘봄의 언어’로 치장하려는 말 수 적은 농부에게 팔려가길 기다릴 것이다. 농부가 밭에 씨앗을 심으면 비로소 ‘봄의 언어’의 때가 오는 것이다. 대장간에서 탄생한 ‘봄의 언어’는 봄이 시작되면 쓸모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쓸모가 시작된다.
  대장간의 ‘봄의 언어’도 디자이너의 ‘봄의 언어’처럼 겨울에 준비되었다. 디자이너의 ‘봄의 언어’는 뿌리를 내릴 밭을 지니지 못했으나, 대장간의 ‘봄의 언어’는 뿌리 내릴 밭을 부여받았다. 디자이너의 ‘봄의 언어’는 너무 빨리 고치를 만들어야 하지만, 대장간의 ‘봄의 언어’는 가을이 지나서야 겨우 고치를 만들 것이다.    


  3. ‘무리’와 ‘개별자’의 언어 
  파스칼 키냐르는 말했다. “인간에게 원칙적 시간성은 두 시간대 사이의 왕복이다. 잃은 것과 곧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봄의 언어’는 왕복하는 것인가? 왕복하는 느낌을 주는 것인가? ‘봄의 언어’는 진정 잃은 것과 올 것의 사이에 있는가? ‘잃은 것’은 어느 계절의 언어이고, ‘올 것’은 어느 계절의 뒤에 이어서인가?
‘시간성이 두 시간대 사이의 왕복’인 것은 ‘무리의 언어’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특질이다. ‘무리의 언어’에서 ‘봄의 언어’는 다른 치장을 하고 돌아온다. 잃은 것은 치장(스타일)이다. 얻은 것도 곧 잃어버릴 치장(스타일)이다. ‘개별자의 언어’에서 봄의 언어는 잃은 후에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치장(스타일)이 다른 본래의 그 ‘봄의 언어’가 아니라, 떠나가며 남긴 아들이자 딸이 아비의 어미의 시간으로 걸어오는 것이다.  
  봄의 언어는 개별자의 언어다. 무리의 언어가 아니다. ‘얻은 것’과 ‘갈 것’의 언어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눈물로 떨어지는 것은 ‘얻은 것’과 ‘갈 것’이기 때문이다. 갈 것은 왕복하는 시간이 아니다. 무리의 언어에서는 ‘잃은 것’이 다시 돌아오지만, 개별자의 언어에서는 ‘얻은 것’도 끝내 떠나가 버린다. 그 때문에 봄의 언어는 그토록 가볍게 하늘거리지만, 그토록 무거운 것이다.
  높다란 망루에 올라 ‘무리의 언어’로 바라보면 ‘봄의 언어’는 완전한 새로움이 아니라 회귀의 언어다. 다른 옷을 갈아입는 언어다. 꽃 앞에 쪼그려 앉은 개별자의 ‘봄의 언어’는 여름에 달구어지고, 가을에 메질 당하고, 겨울에 담금질을 해서 태어나는 언어다. 무리의 언어는 철을 품은 돌 위에 녹을 두껍게 슬게 한다. 개별자의 봄의 언어는 녹을 갈아내고 나서야 빛을 얻고 가벼워진다. 봄의 언어는 무거움을 뚫고, 무리가 덧씌운 녹을 갈아내고 탄생한다.   


  4. ‘봄의 언어’는 상상이다 
  파스칼 키냐르의 생각을 이렇게 변용한다. “시인, 작가에게 원칙적 시간성은 두 시간대 사이의 왕복이다. 상상되는 것과 상상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이다. 상상의 시간에는 ‘잃은 것과 곧 올 것’이라는 키냐르의 아포리즘이 적용되지 않는다. 상상의 시간도 분명 잃은 것을 갖게 되지만, 잃은 것은 언제든지 복구될 수 있고, 복구된 지점에서 연장되기 때문이다.
  원칙적 시간성에서 시간은 가면 올 수 없다. 곧 올 것이라는 자명함은 곧 갈 것이라는 자명함으로도 연결된다. 우리의 시간은 그 선상에서 다른 곳으로 튕겨나갈 수 없다. 하지만 상상의 시간은 갔다가 다시 온다. 잃은 것이 다시 온다. 잃은 것이 다시 온다는 것은 ‘무리의 시간’에서는 복제일 수 있지만, ‘개별자의 시간’에서는 다시 오는 것은 복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완성되지 않은 꿈을 위해서다. 상상은 끊임없이 다시 돌아와서 미진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채운다. 그러나 그 채움은 영원한 공복空腹이다. 상상은 늘 이야기의 가능성에 굶주려 있다. 그래서 시인들은 봄에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밭에 문자를 뿌려야 한다.
  상상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만 우리는 ‘잃은 것과 곧 올 것’을 갖는다. 원칙적 시간성과 상상의 시간은 불화不和하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한다. 상상은 어느 시간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 동시에 시간을 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대(시인)가 상상의 시간성과 원칙적 시간성을 어떻게 교직交織하여 옷감을 짜느냐에 따라 당신의 ‘시간의 옷’이 달라질 것이다.


  5. ‘봄의 언어’는 태어난다 
  파스칼 키냐르는 또 말한다. “시간이 다시 태어난다. 봄이 다시 태어난다. 분리가 다시 태어난다. 차이가 다시 태어난다.” 계속해서 말한다. “초기 문명을 되돌아오게 하려고 귀가 솔깃한, 신비하고 망상적인, 지독하게 퇴행적인 수사修辭를 쓰며 최초의 봄을, 탄생을 인질로 삼았다.”고.
  봄이 태어난 시간이라면, 봄을 인질로 삼았다면, 어떤 마술이나 저주가 봄을 볼모로 붙잡았나? ‘봄의 언어’는 무엇이 잉태했나. 여름, 가을, 겨울이 그 임무를 했을 것이다.
  ‘여름의 언어’는 어떤 언어였던가. 여름은 웃자라는 언어다. 여름의 언어는 열정의 언어다. 열정은 늘 과도하여 몸을 가렸다. 과도한 욕정과 열정이 언어의 몸을 가렸다. ‘문자’라는 잎들이 무성했는데, 열정이 욕정으로 자주 바뀐 것은 영원하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가을의 언어’는 어떤 언어였던가. 가을은 결과를 향하여 다가가는 언어다. ‘가을의 언어’는 결과의 언어다. 가을은 붉어지거나 노래지거나 갈색이 되어야 한다. 풀들은 갈색으로 자신의 결과를 이야기하고, 나무들은 붉고, 노란 언어로 결과를 이야기한다. 무수한 과정의 언어들이 결과를 이야기해야 하는 시간으로 옮겨간다. ‘가을의 언어’는 단출해진다. 지난했던 과정이 하나의 단단한 알로 응축되기 때문이다. ‘가을의 언어’는 실패와 성공을 가늠하는 언어다. 버릴 것과 남길 것의 언어다.  


6. 겨울의 언어 
  ‘겨울의 언어’는 어떤 언어였던가. 어느 대장간에서 벼려졌던 것인가. 겨울은 윤곽의 시간이다. 땅은 자신을 가리던 겉치레의 것들을 말라붙게 했으며, 잎들로 가려졌던 산등성이와 밭들은 자신의 높낮이를 명확한 지도라도 만들겠다는 듯이 등고선等高線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겨울은 개별자가 아니며, 오로지 윤곽이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본 하나의 나무들도 윤곽이다. 잎들이 사라진 가지들은 지향점을 명확히 보여주며, 나무는 몇 개의 가지들로 세상을 구획하고 있었는지를 속이지 않고 보여준다.
  ‘겨울의 언어’는 어떤 언어였던가. 우린 중세를 겨울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로마의 언어는 가을이었던가? 그리스의 언어는 여름이었던가? 로마에서 날리기 시작한 진눈깨비는 중세에 눈이 되어 내렸다. 하얗고 두꺼운 눈이 오래 내렸다. 세계는 눈부신 단색이었다. 세계는 하얀색으로 규정되었고, 삶은 윤곽으로 평가되었다. 설맹雪盲의 시대였고, 하얀 언어의 시대였다.
  ‘겨울의 언어’는 눈의 언어다. 모든 사물을, 개별자를 덮어 오로지 형상과 윤곽으로만 해석하는 언어다. 그것은 면적의 언어다. 겨울은 경계를 나누는 개별자를 나누는 색깔이 없기 때문이다. 얼마만큼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느냐 하는 ‘점령의 언어’다. ‘겨울의 언어’는 흰색의 언어다. 암흑의 언어다. 흰색도 암흑도 오로지 하나의 색이며, 그 색 속의 모든 개별자들은 형태만을 갖는다. 흰색에서의 형태는 암흑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오로지 바람에 흔들릴 뿐이며, 바람에 흔들려 나무를 가렸던 눈이 떨어진다고 해도, 형상은 다만 드러날 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다. 오로지 깊은 내면에서만 움직임이 있을 뿐이다.    
  겨울은 개별자가 아닌 무리의 언어다. 집단의 언어이자 형상의 언어다. 언덕과 산을 집들을 거리를 하얀 눈이 덮는다. 어떤 개별의 언어들도 하얀 눈을 쉽게 뚫고 나오지 못한다. 겨울은 죽은 거시의 언어다. 심연의 언어다. ‘봄의 언어’는 겨울의 만삭 여인의 윤곽과 무거움에서 탄생한 것이다.  
 
  7. 우리의 언어 
  우리의 언어는 물리적 계절과 다르다. 여름은 지나치게 뜨거웠다. 여름은 언어를 익히지 못하고, 다만 열에 들뜨게 하였을 뿐이다. 가을은 시간을 제대로 부여받지 못했으며 그 때문에 쭉정이가 태반을 넘었다. 우리는 이전보다 더 누적된 겨울의 언어를 갖고 있다. 겨울이 지나치게 긴 때문이었다. 냉기는 지하 깊은 곳까지 얼려버려 봄의 기운이 얼음벽을 깨기까지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봄의 언어는 점점 더 태어나기가 어렵다. 봄은 미래의 언어지만, ‘무리의 언어’가 족쇄를 너무 많이 만들어 곳곳에 잠금장치를 해둔 때문이다. 봄의 언어는 자신을 풍성하게 해 줄 같은 피를 나눈 여름과 열매를 익혀줄, 같은 피血의 가을이 있어야 했다. 형제들이라면 시간을 공평하게 안배해 줄 것이었지만, 이복異腹의 여름과 가을이 너무 자주 찾아들었다. 미래는 너무 불안했다.
  파스칼 키냐르는 말한다. “미래의 기원은 몽상적 영상이다. 이어 환각적 영상. 이어 상실의 슬픔. 세 가지 단계가 있다. 잡아먹는 것, 잡아먹히는 것, 죽음.”이라고. 미래를 두려워하면 봄의 언어는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빈약한 가지로 꽃을 피우려 한다. 그러나 그 꽃도 빈약할 뿐이다. 미래의 언어는 힘을 가져야 세 가지 단계, 누군가를 잡아먹고, 잡아먹히고, 죽음을 맞는 단계를 최대한 피할 수 있다. 그(시인)의 언어가 그 힘을 갖지 못한다면, 그는 아직 ‘봄의 언어’를 두드릴 대장간 사내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8. ‘봄의 언어’는 흙에서 태어난다 
  파스칼 키냐르는 말한다. “인간은 지난 세기에서 파낸 흙이다.”

  그렇다!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지난 세기에서 파낸 흙이다. 무리로도 개별자로도 지난 세기에서 ‘파낸 흙’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흙인 점이 중요하다. 흙 위로 몸을 내미는 ‘봄의 언어’의 싹들은 처음에는 구별하기 어렵다.
  흙이 다르고, 씨앗을 뿌린 가을이 달랐다. 흙마다 겨울의 냉기를 견뎌내는 힘도 달랐다. 삽을 들고 깊은 땅을 한 삽 떠내 보면 우리가 얼마나 다른 흙인지 알게 된다. 한 삽 떠  낸 흙속에는 무수한 지층이 쌓여있고, 무수한 언어들이 화석을 향해 압축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흙은 다 다르다. 어떤 흙은 가시를 자라게 할 것이고, 독초를 키워낼 것이다. 어떤 흙은 보리를 키워낸 후에, 다시 벼를 키워낼 것이다. 겨울이 우리를 같은 것으로 만들었고, 몇몇은 그 겨울을 위해 복무하기도 했지만, 우린 그렇게 다 다른 언어였다.   
선언한다! ‘봄의 언어’는 지난 세기의 흙에서 탄생한 미래의 언어다!



 1) 『심연들』, 파스칼 키냐르, 류재화 역, 문학과지성사, 2010, 34쪽. 

 2) 같은 책, 21쪽.

 3) 같은 책, 21쪽.  





*천세진 2005년 계간 《애지》 신인문학상. 시집 『순간의 젤리』(천년의 시작), 문화비평가, 인문학칼럼니스트. frei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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