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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문학 수록작품(전체)

19호/신작특선/임호상/홍어 외 4편


홍어 외 4편


임호상



옆구리 살짝 들쳐봤을 뿐인데

달려든다
한 점 가득 풀리는
아버지,
참 진하게도 취하셨구나





거문리 서巨文理書



귤은 서書
별 더욱 밝으니 어둠 더 짙었구나
이곳 유촌에선 그 빛 다 내 별
아 저 별들 깎는 파도 소리 그치면
그 소리 그치면 누굴 주랴
칼바위 파도 소리에 깨어보니
달 밝은 밤 그 별 다 어디 갔나
목넘애에서 등대 가는 길 수월산
저리도 붉게 동백으로 뚝뚝 내려
죽어서도 모여 사네
붉은 배경이거나, 거름이거나


만회 서書
모르지 재 넘어보지 않으면
바다 넘어보지 않으면 모르지
떠나보지 않으면 내 골목길 신작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지
짓궂은 파도 장난질 귀띔이라도 하러 가세
삼부도, 백도 쓰다듬던 앞바다
조실모친 신지께로 다시 사네
은갈치처럼 반짝거리던 것 당신 맞네
이제 보니 알겠는가
파도가 매일 오는 이유를 알겠는가


   *거문도를 대표하는 두 문장가로 유촌 출신의 귤은 김유 선생과 서도리 출신의 만회 김양록 선생.





똥빨



부드럽게 쑥 빠질 때가 있다.
느낌 아니까
뒤돌아 안을 들여다보게 된다.
오호! 예술이군
아주 멋진 구성
이럴 땐 물도 내리기 아깝지
어느 설치미술 작가라도 부르고 싶다.


인생도 때때로 멋진 똥빨처럼
잘 쏟아져 내릴 때가 있지

가끔 뒤를 한 번 보자
어제 통쾌하게 먹어치운 보고서의 힘
그 색 그 냄새가 내 속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하, 오늘 똥빨 좋군
 
참 꼬들꼬들한 아침이다





와인



커튼도 없이
환히 들여다 보이는
당신의 계곡
벌거벗은 심장 풀어놓고
가슴 속
신의 물방울* 스며들도록
빠알간 대화를
훅 마시면
오늘 밤
당신, 젖는다


   *와인을 소재로 한 일본 아기 타다시 원작의 연재 만화 제목.





가을



저 세월의 표정
검버섯 짙은 사연들
크고 작은 구멍들 사이
얼마나 닳고 닳아 저리도 숙연한가
사연 많은 낙엽 만나기 위해
우리 한참을 물들며 가야 한다
바스락 바스락
풀어 놓으며
노을 진 뻘겋게 짙은 내 사연도
오래도록 함께 걸어가야 한다





<시작메모>


유난히 긴 겨울을 보낸다



겨울을 겨우 보냈다


봄, 여름, 가을 사실 그리 따뜻하기만 했던 것도 아니지만
지난 겨울은
유난히 얼었다, 추웠다
오래된 겨울이 심하게 불었다, 울었다
그러고보니 흐르는 물이 그리웠다
얼지 않고 쏟아져 나오는 물이 참 반가웠다


언젠가부터 꼭 필요한 게 아니면
기억하지 않고 버리는 습관이 생겼다
아니 그동안 기억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은 까닭인지
잘 기억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 때문인지 자꾸 말해줘도 잊어버린다고 딸이 구박을 자주 한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연스러운 일상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기억해야 할까 기억하지 않아야 할까
그래도 꼭 기억되어야 할 사람은 곁에 있고
꼭 기억하여야 할 것은 잊혀지지 않는다
잘 기억되는, 잘 잊혀지는 연습을 하자
오래 기억되는 시인, 오래 남을 시
그러기 위해 자꾸 버리자 빨리 버리자





*임호상 2016 젊은예술가상 수상. 시집 『조금새끼로운다』, 시화집 『오여수의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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