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2015년 겨울호, 제56호)

by 백탄 posted Jun 1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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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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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시 2편

‘스미다’라는 말

―주역시편·295

 

 

스며라, 작약꽃들아, 입맞춤 속으로!

스며라, 모란꽃들아, 여름으로!

늑대에게 곗돈과 밥이 스미면 개가 되고

고라니에게 눈 먼 새끼가 스미면

안개가 되리.

 

눈썹 같은 환등(幻燈)을 달고

기차가 달릴 때

스며라, 첫번째 저녁은 두 번째 저녁으로

스며라, 당신과 내가 서로 스민다면

우리는 호젓한 호밀밭이 되리.

 

3월에 폭설이 내리는데,

여름 성경학교가 스며 진눈개비로 변하네.

당신에게 스미는 것은

오직 나의 할 일,

물옥잠화 같이 웃으리, 나와 당신!

 

‘스미다’라는 말은

빨래 마르는 일보다 숭고하네.

어깨 잇자국 때문에 당신은

웃을까, 안 웃을까? 당신이 웃지 않는다면

이 마음 차마 가여운 당신에게로

먼저 스밀 수밖에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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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주역시편·177

 

 

산수유 붉은 열매를 등 뒤에 두고

돌부처 한 분.

무형의 세월을 빚는 장인(匠人)은

청맹과니로구나.

눈도 코도 뭉개지고

남은 건 초심뿐이구나.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으니

무심하구나.

꽃 지고 붉은 열매가 떨어지기를

기 백 번,

또 다시 꽃 없는 가을이

저 목련존자의 얼굴 위로

지나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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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 문장노동자, 독서광. 충남 논산에서 출생하고 서울에서 성장했다.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하면서 등단했다. 도서출판 ‘고려원’의 편집장을 거쳐 ‘청하’를 설립해 13년 동안 대표로 일했다. 2002년부터 동덕여대, 명지전문대, 경희사이버대학교에서 강의하고, EBS 라디오와 국악방송 등에서 ‘문화사랑방’, ‘행복한 문학’ 등의 프로그램 진행자로 활동했다. 그밖에 KBS 1TV ‘TV-책을 말하다’ 자문위원, 조선일보 ‘이달의 책’ 선정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동서고금의 고전들에 대한 폭넓은 독서력을 바탕으로 세계일보(2010.3~2012.11)에 ‘장석주의 인문학 산책’을, 월간 《신동아》(2011.1~2011.12)에 ‘장석주의 크로스인문학’을 연재하고, MBC 라디오의 ‘성경섭이 만난 사람들’에서 ‘인문학카페’를 1년 동안 꾸렸다. 《이상과 모던뽀이들》(2010), 《일상의 인문학》(2012), 《마흔의 서재》(2012), 《동물원과 유토피아》(2013), 《철학자의 사물들》(2013) 같은 감성적 문장과 인문학적 통찰이 돋보이는 책들을 내서 주목을 받았다. 인문학 강연 전도사로도 활동했는데, 그동안 금융연수원, 전경련, 서울상공회의소, 한국능률협회, 국립중앙도서관, 강진도서관, 토평도서관, 영등포도서관, 광명도서관, 당진문화원, 안성도서관, 평택도서관, 연세대, 강남대, 목원대, 백석대, 인하대, 충북대, 충남대, 한국교통대, 대진대, 서울디저털대, 이밖에 기업체와 지자체 등 200여 곳에서 초청 강연을 했다. 애지문학상(2003), 질마재문학상(2010), 동북아역사재단의 독도사랑상(2012), 영랑시문학상(2013) 등을 수상한다. 지금은 서울 서교동의 집필실과 안성의 ‘수졸재’를 오가며 책을 읽고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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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게티에 적포도주 한 잔, 어떠세요?

 

그의 서재는 어마어마하다. 조금 큰 도서관의 책들만큼이나 많은 장서를 구비하고 있다. 더 놀라운 일은 그 많고 많은 책들을 거의 모두 읽었다는 사실이다. 남들보다 열 배는 빨리 읽는 속독법을 알아서 그는 하루에도 여러 권의 책을 섭렵할 수 있다. 그가 책을 읽을 때는 지나가는 바람도 그에게는 공손하더라. 그의 행동은 한 번에 딱 한가지씩이다. 생각과 동시에 행동으로 옮기는 그의 수행 능력은 속독법을 닮아서 거침이 없다. 그가 뭔가에 집중 할 때는 그의 내부에서는 이미 화학반응이 일어난 후일 터. 곁에서 누가 죽어나가도 모를 정도로 그의 집중력은 무섭고도 두렵다. 음악 또한 전문가의 수준을 넘어서 경계를 탐하지 않는 리듬의 세상은 고혹적이고도 아름답다. 수졸재, 이름만큼이나 품이 넉넉한 그의 안성 집은 아침이면 물안개가 올라오고 저녁이면 노을이 은총처럼 그를 둘러싸는데. 그가 매일 쌓고 있는 문장노동은 수도사의 그것과 전혀 다름이 없다. 나는 그의 집을 여러 번 방문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내게 손수 조리한 스파게티를 먹여주었다. 웬만한 요리사 뺨치는 그의 요리 솜씨는 예리한 감성이 빚은 하나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함께 곁들이는 장석주표 와인 한 잔은, 글쎄 뭐랄까…, 나는 그 모든 것을 그저 하나로 보았다. 독서도 요리도 글쓰기도 그에게는 오직 한 가지의 열정. 그는 이번 생은 문학의 올가미에 걸려서 문학이라는 꽃밭에 주저앉아 놀다 가는 유유자적의 소요유! 내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매 순간이 텅 비어서 꽉 차 보인다. 포정이 소의 각을 뜰 때 살과 뼈의 틈을 보듯이 그는 아마도 매일매일 좌망하고 심재 하는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그 속에서 그의 시는 탄생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결을 따라 매 순간 시의 갈피를 잡아내는 일. 그것은 아마도 그의 신을 보는 그만의 독심술일 텐데. 가끔씩 그에게서 찬바람의 냄새가 나는 것은 그의 신과 은밀한 저만의 대화를 나누기 때문이다.

-2014. 11. 1. 손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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