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규 시인(2020년 봄호 제77호)

by 백탄 posted Aug 0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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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 출생. 1996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 『아침시집』, 『나를 오른다』, 『크레바스』. 한국시문학상, 경기문학상, 바움작품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사무총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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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되어, 바람의 소리가 되어



새벽까지도 바람은 텐트를 잡아 흔든다
정신에 섬뜩 불이 켜지고
밤새 어둠을 밟고 온 새벽은 칼날처럼 선연하다


고요한 함성,
명치 끝 어디쯤에 뭉쳐 있던 불꽃인가


라마제 때 건 불경佛經 빼곡히 적은 깃발들이
바람 앞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온몸을 뒤척이던 바람은 나를 흔들어 세우고
낭파라를, 갸브락 빙하를, 끝없는 티베트 설원을 간다
내가 딛고 서 있는 여기, 이 땅의 끝
초오유 정상 너머로까지 뜨거운 갈기를 세운다


아, 거대한 빙하와 속을 알 수 없는 높고 거친 설산들
그들 앞에 내팽개쳐진 듯
나는 혼자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러나 가고 싶은 그곳으로
바람이 되어,
그 바람의 소리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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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규, 혼자를 연습하며 신독愼獨하는 사내


그에게서 문자가 한 통 왔다. 이번에는 네팔 어디라던가, 에베레스트 8,848m 산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어느 부근이라던가. 초오유Cho Oyu, 나는 살아서 갈 수 없는 그곳을 그는 벌써 몇 번을 오르고 또 내려왔다. 이번에도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문자의 내용은 농담처럼 간단했다. 그러나 나는 서쪽이라는 말에 오래도록 목이 탔다. 그러니까 그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을 향해 한 발 한 발 자기 발자국을 찍으며 오르고 또 오르는 사내다. 사람의 냄새가 사라진 하늘땅에서는 몸서리치게 외로운 시간도 만났을 터이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기가 걸어온 발자국을 뒤돌아서 확인한다고 했다. 천천히 따라오는 마음을 기다려주듯 걸음을 멈춘 채 오래도록 자신을 돌아다보았을 것이다.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하늘문을 확인하듯, 그는 다시 높은 곳을 향해 한 발짝씩 걸음을 옮겼겠다. 그렇게 삶과 죽음이 정확하게 겹치는 설산의 정상에서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들은 모두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시간의 여행자들. 그는 이 끝을 알 수 없는 여행길에서 산이라는 질문을 동반자로 삼은 것은 아닐까. 진정한 예술가는 자기가 겪지 않은 일은 절대로 표현할 수 없는 법이라는데. 그렇게 그는 매 순간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첨예한 자기 발자국을 흰 종이 위에 또박또박 기록한다. 혼자를 예감하며 맹렬하게 죽음을 연습하는 시인. 밝고, 환하고, 단정하면서도 아름다운 그의 문체는 그러니까, 그가 매번 죽음을 담보하면서 받아쓴 정직한 몸의 기록이다./손현숙(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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