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2013년 가을호, 제51호)

by 백탄 posted Aug 1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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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므마을 1

푸른 이정표 선명한

즈므마을, 그곳으로 가는 산자락은 가파르다

화전을 일퀐음직한 산자락엔 하얀 찔레꽃 머위넝쿨 우거지고

저물녘이면, 어스름들이 모여들어

아늑한 풀섶둥지에 맨발의 새들을 불러모은다

즈므마을, 이미 지상에서 사라진

성소(聖所)를 세우고 싶은 곳, 나는

마을 입구에 들어서며 발에서 신발을 벗는다

벌써 얄팍한 상혼(商魂)들이 스쳐간 팻말이

더딘 내 발걸음을 가로막아도

울타리 없는 밤하늘에 뜬 별빛 몇 점

지팡이 삼아, 꼬불꼬불한 산모롱이를 돈다

지인이라곤 없는 마을, 송이버섯 같은

집들에서 새어나오는 가물거리는 불빛만이

날 반겨준다 저 사소한 반김에도

문뜩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내 지나온

산모롱이 쪽에서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

저 나직한 소리의 중심에, 말뚝 몇 개

박아보자, 이 가출(家出)의 하룻밤!

 

*즈므마을: '저무는 마을' 에서 유래된 강릉에 있는 작은 산골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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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질만으로 눈부시다, 후투티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친 마천루 숲속, 아크릴에 새겨진

'조류연구소'란 입간판 아래

검은 점이 또렷이 빛나는 눈부신 황금빛 관(冠)을 뽐내며

쏘는 듯 노려보는 후투티 눈빛이

이상한 광채를 뿜는다, 캄캄한 무덤들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섬뜩한 인광(燐光) 같은

 

푸른 광채. 인공의 눈알에서 저런, 저런 광채가

새어나오다니.

짚이나 솜 혹은 방부제 따위로 가득 채웠을 박제된

후투티, 하얀 고사목 뾰족한 가지 끝에

실처럼 가는 다리를 꽁꽁 묶인 채, 그러나

당당한 비상의 기품을 잃지 않고 서 있는, 저 자그마한 새에 끌리는

떨칠 수 없는 이 매혹감은 무엇인가. 잿빛 공기 속에

딱딱하게, 아니 부드럽게 펼쳐진

화려한 깃털에서 느끼는 형언할 수 없는 친밀감은.

 

오, 그렇다면

나도 이제 허울 좋은 이 조류연구소 주인처럼

박제를 즐길 수 있을 것인가. 피와 살과

푸들푸들 떨리는 내장을 송두리째 긁어내고 짚이나 솜

혹은 방부제 따위를 가득 채운, 잘 길들여진 행복에

더 이상 소금 뿌리지 않아도 될 것인가. 때때로

까마득한 마천루 위에서 상한 죽지를 퍼덕이며 날아 내리는

풋내 나는 주검들마저 완벽하게 포장하는 그의,

그의 도제(徒弟)로 입문하기만 하면

 

과연 나도 박제를 즐길 수 있을 것인가. 껍질만으로도 눈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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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영월 생.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프란체스코의 새들>, <얼음수도원>, <수탉>, <거룩한 낭비> 등. 1997년 김달진 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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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시간표를 읽는다

 

아주 오래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다. 어느 행사장에 주머니 하나 챙기지 않은 모습으로 그가 나타났다. 단상에 올라서자마자, 자기 수중에는 일원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말씀. 소지품을 몽땅 도둑맞고도 무척이나 태연했던 그의 모습은 내게 이상한 풍경의 자유였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원하는 것이 없으면 두려운 것이 없고, 두려운 것이 없으면 자유 할 수 있다는 조르바의 이야기는 그대로 그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슬픔도 농담처럼, 빈 몸으로 와서 빈 몸으로 돌아가는 생의 의미를 그는 들숨과 날숨의 운행처럼 가볍게 풀어놓았다. 키 크고 살 점 하나 없는 자코메티의 조각처럼 그는 그렇게 생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스님인데, 사람들은 그를 ‘목사시인’ 이라 불렀다. 종교도 넘어선 그의 무연한 눈길은 아픈 가을 하늘을 닮아 있었다. 이상한 슬픔의 촉수가 만져졌다. 그날 그는 내게 내 생의 화두처럼 말씀 하나를 건네기도 했는데. 라마스떼! 당신 속의 신을 내가 알아본다는 뜻. 크고 높고 멀고 아름다운 시인, 그래서 그의 일평생은 하루처럼 담담할지도 모르겠다./손현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