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규(2014년 봄호, 제53호)

by 백탄 posted Aug 1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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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

 

한줄 쓴 다음

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이며

병술년 봄을 보냈다

힐끗 들여다 본 아내는

허튼소리 말라는

눈치였다

물난리에 온 나라 시달리고

한 달 가까이 열대야 지새며 기나긴

여름 보내고 어느새

가을이 깊어갈 무렵

겨우 한 줄 더 보탰다

 

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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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

 

 

초등학생처럼 앳된 얼굴

다리 가느다란 여중생이

유진상가 의복 수선 코너에서

엉덩이에 짝 달라붙게

청바지를 고쳐 입었다

그리고 무릎이 나올 듯 말듯

교복치마를 짧게 줄여 달란다

그렇다

몸이다

마음은 혼자 싹트지 못 한다

몸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

해마다 변함없이 아름다운

봄꽃들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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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서울 생. 서울대 및 동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시인.

현재: 한양대 명예교수 (독문학)

*1975년 계간 《문학과 지성》을 통하여 데뷔.

*1979년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을 시작으로, <아니다 그렇지 않다>, <크낙산의 마음>, <좀팽이처럼>, <아니리>, <물길 >,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처음 만나던 때>, <시간의 부드러운 손>, <하루 또 하루> 등 10권의 시집과 <대장간의 유혹>,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누군가를 위하여>등 시선집을 출간했다. 영역시집 <Faint Shadows of Love>, <The Depths of a Clam>, <A Journey to Seoul>, <One Day, then Another>, 독역 시집 <Die Tiefe der Muschel>, <Botschaften vom gruenen Planeten>, 불역 시집 <La douce main du temps>. 일역시집 <金光圭 詩集>, 스페인어 시집<Tenues sombras del viejo amor>와 중국어 번역시집 <模糊的旧愛之影>등이 있다.

*산문집 <육성과 가성 >, <천천히 올라가는 계단 >을 간행했고, 베르톨트 브레히트 시선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하인리히 하이네 시선집, 귄터 아이히 시선집 등을 번역했다.

*오늘의 작가상, 녹원 문학상, 김수영 문학상, 편운 문학상, 대산 문학상, 이산 문학상, 시와 시학 작품상 수상, 그리고 2006년도 독일 언어문학 예술원의 프리드리히 군돌프 상과 2008년도 이미륵 상 수상. 2012년 유럽 문화교류 대상 (한국유럽학회)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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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가만히 지켜주는 사랑

 

시인이 끓여내는 커피는 순도 백의 명품이다. 알맞게 분쇄된 원두를 덜고, 물의 온도를 재고, 다시 천천히 원두가 부풀었다 꺼지는 그때를 기다린다. 싱싱한 원두의 순수 향을 그는 내게도 맛보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향이 은은한 커피가 잔에 팔부 쯤 채워지는 사이, 그는 여전히 말 없는 표정으로 많은 것들을 말했다. 무엇 하나 과장 없이 그윽했던 시간. 벌써 십년 이쪽 저쪽 부근의 일이다. 그 후로 가끔 어느 사석에서 만나 뵐 때마다 그의 표정은 한결 같았다. 소나무가 소나무의 격을 간직하듯, 그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가만히 사랑을 수행한다. 그의 시가 가만히 가슴에 스미듯, 그는 헛된 과장없이 삶을 이야기 한다.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비가 오면 비오시는 대로, 그의 시쓰기는 사람살이를 저버리지 않는다. 기표놀이에 이미 지친 문학판에 그는 장군처럼, 그러나 소란스럽지 않게 질문을 던진다. “자기가 쓴 글을 독자가 쉽게 이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시를 써서 발표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유행에 겁먹지 않는 그의 글쓰기는 채색을 벗어난 듯 담담하다. 매일 찾아오는 무심의 아침처럼, 그러나 선연해서 당당하다. - 2014. 1. 30. 손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