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수(2014년 여름호, 제54호)

by 백탄 posted Aug 1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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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事物들, 그 눈과 귀

 

 

사물에는 눈이 있다

문 돌쩌귀 같은 것, 손거울 같은 것 또는 옷장 같은 것

모두 퍼렇게 눈을 뜨고 있다

이승 시인이 이승 너머로 눈을 뜨고 있듯

저승 시인이 저승 너머로 눈을 뜨고 있듯

사물들은 모두 눈을 뜨고 있다

형태가 없는 것들을 찾아 눈을 뜨고 있다

목소리 없는 것들을 찾아 눈을 뜨고 있다

제 속의 눈먼 존재를 향하여 눈을 뜨고 있다

 

사물에는 귀가 있다

손거울 같은 것, 참빗 같은 것, 빗자루 같은 것

모두 숨죽이며 귀 기울이고 있다.

이승 사람들이 저 세상 일에 귀 기울이고 있듯

저승 사람들이 이세상 일에 귀 기울이고 있듯

사물들은 모두 귀 기울이고 있다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을 찾아 귀 기울이고 있다

제 속의 미망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

 

사물의 귀는 모두 열려 있다

마음이 헤매는 사람의 귀가 늘 열려 있듯

소리 뒤에 숨어 있는

형상이 없는 고요를 향하여

사물의 귀는 열려 있다

자기 내부의 가장 깊숙한 곳의 형상 없는 고요를 향하여

사물의 귀는 모두 열려 있다

 

아 늘 뜨고 있어라, 열려 있어라

사물의 눈이여 귀여

우리가 보지 못하는 無明을 뚫어 보아라

우리를 향하여 손을 흔들며 오는

눈 먼, 귀 먼 사람들을 향하여 손을 흔들어 주어라

우리가 오래도록 기다려온 눈 먼, 귀 먼 시간을 향하여

손을 흔들어 주어라

빈 접시에 고여있는 우리의 답답한 시간을 향하여

빈 접시에 고여 있는 우리의 심장深長한 의미를 향하여

사물이여, 눈이 떠 있는, 귀가 열려 있는 사물이여

손을 흔들어 주어라

우리의 하염없는 무명無明을 틔어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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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노래

 

 

목청에 피맺히는 육자배기 가락에 맞추어

배는 뭍을 떠났습니다.

바람에 팽팽한 돛의 서정은 없어도

뱃길 위에 기러기가 꾸미는 서정은 없어도

그림 속 같이 순수한 빛 속에

보내는 사람도 슬픔도 없는 순수한 이별 속에

배는 떠났습니다.

사람의 소리는 돌려보내지 않는

별빛만 빛나는 고요 속으로

떠났습니다.

우리 속에 번쩍이는 아픔을 남겨두고

배는 떠났습니다.

심청의 넋이 끝없이 가고 있는

그 수심을 헤아리며

떠나는 심청의 가락으로 흔들리며

용골龍骨을 언뜻 언뜻 물 위에 번뜩이며

배는 9 만리 길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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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파편 줍는 노래, 산보로, 몇 가지 풍경, 시네포엠, 소리와 고요 사이, 사물들, 그 눈과 귀. 영문시집 Landscapes, Seattle Poems, What the Spider Said. 번역시집 Korean Poetry Anthologies, Sending the Ship to the Stars(박제천 영역시집). 시문학상, 정문문학상,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 바움문학상, 성균문학상, 코리아타임즈 및 펜클럽한국본부 번역문학상, 루마니아 Lucian Blaga 세계시축제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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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수, 그림자의 두께를 응시한다

 

사진과 시는 어떻게 다른가. 아니다, 사진과 시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본질을 향한 거친 걸음일 것이다. 시가 본질을 바라보는 작업이라면 사진 또한 사물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묵언수행이다. 선생에게 사진은 시의 또 다른 이름. 그는 왼쪽 어깨쪽으로 삐뚜름하게 맨 작은 가방 안에 항상 사진기를 넣고 다닌다. 오전에는 도시를, 오후에는 또 경기도 어디를 그의 발은 정처를 모른다. 그가 파인더 안으로 불러들인 세상의 고요는 우주 밖에서 들리는 소리없는 음악이다. 흑과 백이 겹치고 겹치면서 사람의 눈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그림자의 두께를 그는 사진으로, 시로 누빈다. 그렇게 선생의 예술은 밤이 낮으로 몸을 뒤집는 우주의 전율이다. 그의 시가 나라와 나라의 경계를 허물어서 웅혼한 문자의 세상을 이루듯이 사진은 침묵의 향연, 묵언으로 사물의 형상을 짓는 선생의 전위이다./손현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