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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권(49호-52호)
2014.01.20 17:24

49호(봄호)집중조명/이희원/깃털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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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겨울호)집중조명/이희원/깃털 외 5편

 

 

이희원

 

 

깃털 외 5편

 

 

저기 하늘을 놓친 깃털이 있다

족쇄 채워진 새의 일부가 있다

내가 지상으로 내려온 지는 수억 년이 넘었다

내가 이렇게 묶인 지도 한 1만 년은 되었다.

 

나는 처음부터 말의 노예가 아니었다.

내가 보고 온 하늘과 태양을 노래하고 싶었다.

 

나를 먹물 속에 담그거나

언제부턴가는, 내 몸에 먹물을 집어넣고는

내 몸에서 말즙을 짜내기 시작했다

 

어떤 기록은 왜곡의 産室이다

내 깃가지를 비틀어도

나는 그런 말을 토해낸 적이 없다.

 

내 거처는 저 텅 빈 하늘이다.

애초부터 나는 정착을 모른다.

결국 나는 처음부터 새다

 

1만 개의 깃털을 핥아 가지를 곧추 세운다.

한때 만년필이었던, 말이었던, 깃털이

백지 위에서 다시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왜곡은 왜곡일 뿐이다.

 

 

 

 

램프와 요정

 

 

모든 남자와 여자는 램프거나 요정

가두거나 갇힌다.

남자의 일상이란 램프를 만들거나 부수는 일,

 

여자는 램프의 또 다른 이름

항아리거나 청자 혹은 콜라병,

여자는 평생 숨을 항아리를 찾는다.

너도 알겠지만

여자의 전신은 갈비뼈가 아니라 항아리라는 사실,

 

여자는 램프 속에서 늘 주문을 외운다.

벗어나기를

누군가 와서 부드럽게 문질러 주기를

이 구질구질한 일상에서 도피시켜주기를,

 

램프는 언젠가 열리는 마법의 문이다

램프가 열리는 순간

지니는 “당신의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줄게” 하고 말한다.

그러나 그뿐,

이내 하늘을 난다

 

너도 알겠지만

하늘은 본래부터 여자들의 무덤이라는 사실,

지상에서 하늘을 지향하는

 

하늘에 걸친 한 다리가 추락하는 날,

어두운 골목에서 깃들일 새로운 램프를 찾는다.

 

여자는 램프를 벗어나기 위해 일생을 살고

남자는 램프 속에 여자를 가두기 위해 일생을 산다.

 

여자가 램프 속에 앉아 그대의 주문을 듣고 있을 때

그때 한순간은 그대의 여자가 된다.

 

 

 

 

 

말의 생존학

 

 

그들이 초파리로 돌격하기 시작했다

눈 속에 알집을 짓나 보다

초병을 보내더니

드디어 군단으로 쳐들어왔다.

어느새 내 몸에서 시취가 났다

 

나일강가의 파피루스껍질을

파고 들어가거나

황하의 거북등에서

겨우살이처럼 기생하더니,

 

바티칸의 오벨리스크에서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서

비명을 만난다.

 

그들은 언제부턴가

지배자의 무기가 되었다.

지폐에 남아

황제의 명령을 전하기도 하고

칙서에 남아

사약을 내리기도 했다

 

그들의 지문이 없이는

지상의 방 한 칸도 빌릴 수 없다

 

언젠가부터 그들은 다시 진화하기 시작했다

반도체라 불리는 플라스틱 딱지에

알집을 슬기 시작했다.

 

그들의 끝없는 탐욕의 시작은

단지, 사랑하는 당신의 귀에 남는 것이었을까?

 

 

 

 

불손한 schema*

 

당신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당신을 떠났어

 

핸드폰은 꺼둘 거야

자동차는 커버를 씌워 차고에 두었어

신발들은 신발장에서 꽃씨를 틔울지 몰라

 

오전 내 오래된 책들을 읽었어

낡은 서고는 꽉 차서 더는 공간이 없었어

먼지의 더께가 나를 웃자라게 했나봐

나는 책 한 권 뽑기도 어려웠어

 

이참에 서고 속 책들을 확 불사를까 봐

 

택배가 신간을 던지고 갔어

반짝하더니 오후 내 나비가 날아다녔어

착시처럼 나무가 보였어

 

어쩜 그 많던 책들이 순식간에 먼지로 변할 수 있어

 

약점을 까발리는 불손함은 없었지

당신을 떠난다는 건 불가능했어,

나는 그냥 그 길 끝에 죽 서있었던 거야.

 

 

*인간의 기억 속에 쌓인 배경지식.

 

 

 

오기誤記

 

 

붉고 좁은 입술에서 튀어나오는

해일 같은 쪽빛 슬픔을 생각해 봐

나는 그걸 이별의 전조로 기록하네

 

손이 부르터 오타를 치지만

아침은 늘 이별의 방식으로 오지

당신의 손이 수직으로 선 활자들을 더듬을 때

차갑게 식어버린 거웃에 손을 넣어봐

온기 잃은 구들장이라고 뿌리치지는 마

 

밤은 네 얼굴 위에 수많은 말을 지우지

달콤했던 네 입술을 기억해 보지만

내 노래는 천정에 가려 굴절되고

 

한때 누군가를 울렸던 눈빛을 기억하기 위해

손가락을 헤아려 보지만,

발은 허공에 둥둥 뜨고

가슴엔 수 천의 천공이 뚫리지

 

고랑, 고랑에서 쏟아져 나와

밤마다 가위눌리게 하는 물줄기들을 봐

 

당신이 현관문을 열 때,

태양을 가로질러 퍼붓던 폭설처럼

지금은 오타를 부풀려 찐 신문이 배달된 굶주린 아침

 

 

 

 

우리다, 그女

 

나는 한 고서를 만났다.

 

한 장 한 장 해체해 보려 했으나

곰팡이와 한 몸이 된 듯 틈을 주지 않았다.

 

문자와 문자, 방점과 방점이 널부러진 무덤,

입구를 찾았으나 갈색문은 열리지 않았다.

 

세상이 새로 열리던 한때,

한 여자의 붉은 입술과 푸른 눈물을 우려낸 적이 있었다.

 

뚝뚝 잘라낸 고서뭉치 위에 끓는 물을 부었다

순간, 차마고도의 방울소리 뒤로 라마경이 흘러나왔다

 

우린 물에 야크치즈를 섞어 먹는데

침묵의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또 다른 침묵,

내 가난한 언어로는 해독되지 않던 물비린내,

 

그녀의 환생을 만났다.

보이차가 익던 윈난성의 푸른 산하를 만났다.

 

 

 

 

시작메모

 

 

異邦人의 辯

로마시대에 살았던 ‘세네카’는 인류의 스승으로 자처했던 최초의 사람이었으며 네로황제의 제1대신이었습니다. 그는 “인간보다 더 침울한 동물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진수성찬과 호색에서 기쁨을 얻고자 하고, 다른 이는 야망과 수많은 평민을 돌보는 데서 기쁨을 구하려 합니다, 누구는 한 명의 애인에게서 기쁨을 구하고 누구는 학자의 과시적이고 부질없는 활동이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문학 작업에서 기쁨을 구합니다. 모두 다 똑같이 헛되고 일시적인 즐거움에 속은 사람들이지요 마치 장시간의 권태로 ‘한 시간의 희열과 광기’의 대가를 치르는 취기와도 같습니다.”*

 

늦깍이로 등단해 문단의 이방인으로서 살면서 느끼는 저의 고뇌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는 글을 최근 만났습니다. 절필과 문단과의 화해를 위해 얼마나 더 고민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다가 한해가 갔습니다.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또 한 해를 끌려가야할 것 같습니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글쓰기 작업, 아마도 제 글은 어디선가 들어줄 나르시스를 향한 요정 ‘에코’의 외침인지 모르겠습니다.

 

 

*파스칼 키냐르 “섹스와공포” 230쪽에서(문학과 지정사간, 2007년).

 

 

 

이희원∙2007년 ≪시와세계≫ 신인상. 공동 시집 <오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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