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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겨울호)집중조명/박선우/결별을 선언한다 외 4편

 

 

박선우

 

 

결별을 선언한다 외 4편

 

 

여름은 가을을 견제하고 가을은 겨울을 견제하는 쓸쓸함에 대해 결별을 선언한다 반쯤 헐린 빈 집을 제집처럼 찾아오는 햇볕과도 결별이고 아무나 옷섶에 파고드는 소슬바람과도 결별이고 마른 뼈들만 남은 갈대숲과도 결별이고 헐겁게 서있는 침엽수와도 결별이고 배춧잎을 야금야금 도둑질하고 있는 달팽이와도 결별이고 저만 살겠다고 가을을 비축하고 있는 사람들과도 결별이고 산 속에서 마주친 산노루와도 결별이고 빨갛게 익은 명감과도 결별이고 여름을 지우고 가을을 지우고 풍경을 지우고 나를 지우면서 결별을 통해 아픔을 본다 아픔을 돌아본다 더는 아프지 않기 위해 더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 이 가을에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결별을 선언한다

 

 

 

오월과 유월 사이

 

 

물컹한 고구마 같은 어둠이다

야생 고양이 담을 훌쩍 넘고

하늘엔 별꽃이 하나둘 개화를 시작

밥상에 앉은 마을들 도란도란

보리가 익어가는 냄새에 이끌려

설거지를 놔두고 들길을 걷는다

서로를 기대고 누워 있던 들풀들이

모조리 일어나 경계태세를 한다

미안하다는 손짓을 보내며

돌아오는데 농축된 어둠이 제법 딱딱하다

실실 불어오는 실바람이 좋고

풀물이 들어도 풀냄새가 좋고

농축된 고형물질 같은 어둠이 좋은

오월과 유월 사이

 

 

 

ktx

 

시간은 속도를 따라 잡지 못한다

시속 300킬로로 질주하는 속도 앞에

시간은 벌목처럼 쓰러진다

어둠도 바람도 결절된 부위에

지혈도 안 되는 피가 흐르고

ktx가 지나는 곳마다

휘어지고 꺾이고 넘어지고

그래도 속도를 지향해야 한다면

시간과 함께 동승할 수 있는

대안은 없는 것일까

속도 속도를 외치다 보니

세상이 온통 속도에 올인하기 위해

속도 속으로 머리를 처박고

ktx처럼 질주한다

 

 

 

불온한 밤

 

 

공포가 나사를 조이듯 조여 오고 있는 밤

못 볼 것을 보고야 만 보름달은 경직된 채 사산을 하고

 

애기 동백꽃 같은 사산아를 안고 보름달은 짐승처럼 운다 후두염을 앓는 쉰 소리로 일제히 개들은 짖어대고

 

대숲에서 은신 중인 바람이 술렁인다 기립으로 대숲이 휘청인다 공포를 방관하고 있는 밤도 휘청인다

 

휘청이는 밤의 가랑이 사이로 파고드는 여린 짐승

소리로 밤을 장악하려는 사냥견의 맹공

 

정복과 피정복의 대립도 필사이다

공포가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릴 때마다

 

여린 심장에선 한 움큼씩 뜨거운 피가 빠져 나가고

그 피를 겨냥하는 공포는 사정없이 비수를 꽃는다

 

 

 

매실밭에서

 

 

청매실이 탱글탱글 영글고 있는 매실밭을 휘둘러보는데 뒷산 골짜기에서 꿔꿔꿔꿩 꿔꿔꿔꿔꿩 암꿩의 앙탈이 속사포다 간이 얼마나 크기에 남편을 쥐 잡듯 하나 밭두렁에 앉아 전라도 버전으로 해독해 보면 셀셀 웃음친께 헬렐레 풀어지는 꼴이라니 꼭 발정난 개들맨키로 느그들은 짐생이어야 암만 짐생이고 말고 인자는 나도 못 참은께로 나가서 논꼬랑에 처박고 죽든가 살든가 알어서 허고이 음마 대자로 뻗으먼 눈 하나 깜짝 할 줄 안디 나도 이판사판 공사판인께 성냥불 확 댕겨블기 전에 나가더라고이 와장창 세간 부서지는 소리 애들 우는 소리 골짜기가 우렁우렁 소리를 재생한다 반전이 궁금해 자리를 뜨지 못하는데 나 간 큰 남자 안 될 탠께 나 좀 봐주믄 안되겄는가이 잉잉 요번 딱 한 번만

 

 

 

 

이미지

 

킬링필드를 연상했다

가는 곳마다 세워진 사원 안에 해골들은 추정도 어렵다

폴포트의 이상이 궁금해진다

배추밭 주인의 이상도 궁금해진다

폭락이라는 명분은 폴포트 이상에 걸림돌이 된다

작대기로 목을 치고 삽자루로 살점을 찍어내는 잔인한 학살이다

분풀이로 처단, 살이 찼다고 처단

이래저래 처단한 배추의 해골들이 사원 안에

눈을 부릅뜨고 잠들고 있다

 

시작메모

 

 

막상스 페르민의 눈neige 중에서

 

 

아무 것도 꾸미지 말 것 말하지 말 것

바라보고 그리고 쓸 것

몇 개의 낱말 열일곱 음절만을 한 편의 하이쿠

세상에서 비켜 앉아야 할 시간이 온다.

우리는 자신의 삶이 어떤 무늬를 그리는가를 천천히

바라보기 시작한다

시는 무엇보다도 영혼의 그림이고 영혼의 안무이며 영혼의 음악이고

영혼의 서예인 것이다

아름다움의 음악이고 아름다움의 글씨인 것이다

땅에서 몸을 띄워 언어의 줄 위에 올라서는 것

쉼표의 낙하

마침표의 장애물

상상의 줄에서 땅으로 내려오지 않는 것

 

 시인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언어의 줄 위에 팽팽하게 딛고 서는 것 상상의 줄에서 땅으로 내려오지 않는 것이라는 막상스 페르민처럼 나에게 시는 신앙이며 종교이다. 날마다 시를 쓰지 않고는 시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의 빈곤은 늘 허기지다. 굶주린 짐승처럼 허기를 채우기 위해 벌판을 쏘다닌다. 설원을 건너온 바람이 자꾸 동행을 하자 한다. 바람을 데리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보면 눈이 은유가 되고 바람이 은유가 된다. 거룩한 성자처럼 세상의 은유를 받아 적는다. 끝으로 시를 쓰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이지만 시를 읽어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박선우∙신안 출생. 2008년 ≪리토피아≫로 재등단. 시집 <찬란한 목련의 슬픔>,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 <홍도는 리얼리스트인가 로맨티스트인가>. 제주기독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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