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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권(49호-52호)
2014.01.20 17:53

49호(봄호)신작특선/정승열/빙하기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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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겨울호)신작특선/정승열/빙하기 외 5편

 

 

정승열

 

 

빙하기 외 5편

 

그것은 온 도시와 마을을 한꺼번에 얼려버린 것이 아니라

저 멀리 산골짜기나 외진 바닷가에서부터 천천히 얼려 온 것이다.

그래서 그 옛날 공룡들이 전전긍긍하다 서서히 멸종되어 간 것이다

 

밤이면 도시가 온통 화산으로 연신 폭발하고 있을 때

하늘이 노숙하는 저녁해를 들판에 내다 버렸다

나무들이 부르르 떨기 시작하며 말문을 닫았다

 

누구도 손을 들고 질문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대를 이을 아이를 더 나야 하는지 몰라

우물쭈물 하다가 하나씩만 낳기로 했다.

아무도 얼음덩이를 보지는 못했지만 몰려드는 추위 때문에

서둘러 짐을 싸들고 농촌을 떠났다.

농촌에는 옛날에 써둔 전설 몇 편과 노인들만 남았다.

마을에는 빈집이 늘고 온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누구도 이 냉기가 도시로 향하고 있는지를 몰랐다.

누구도 아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도 질문하지 못했다.

 

 

 

바람꽃

 

꽃잎을 열어 하늘을 받아드리기 전에

먼저 바람의 귀를 열어야 한다

태중胎中 정혼定婚한 미지未知의 그대가

바람결에 보내는 문자를 수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믐날 밤이 좋을 것이다

수많은 별들 속에서 그대를 헤아리는 것은

 

천상의 별을 떠나 희미한 빛줄기로 먹구름을 뚫고

천둥과 번개에 휘둘리면서도 그대가

애끓게 보내는 구애의 목소리를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머나먼 계곡에서 굴러 떨어지는

그대의 미세한 발걸음이나

폭포에 휩싸여 점점 미약해져 가는 그대의 신음 한 점이라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아침 이슬방울이 좋을 것이다

그대의 목소리를 분광分光하여 온갖 색깔로 거르기에는

 

지친 그대가 다가오기 수월한

섬세한 문양을 만들어 흔들기에는

 

모든 꽃잎을 활짝 열어

바람결에 쉼 없이 흔들려야 한다

 

행여 고개를 너무 숙여서는 아니 된다

행여 고개를 너무 빳빳히 들어서도 아니 된다

행여 그대가 놓치지 않도록, 고개를 조금만 숙이고 흔들려야 한다

 

먼 길에서 쇠잔한 그대의 몸체가 안개처럼 부서져

바람결에 음성만 간신히 이어지고

수신하던 꽃잎마저 시들어 가더라도 함부로

삶이 허무하다고 독백을 해선 아니 된다

 

전능한 제약사가 약제를 다루듯

그대가 보낸 문자들을 바람결에 거르고 걸러서,

영원한 언약의 환을 하나 만들 일이다

긴 기다림과 그리움의 통로를 열어 그 언약의 환

자궁에 깊숙이 심을 일이다

 

이승에서 만나지 못한 사연들을 청홍 색실로 뽑아

그 언약의 환에 칭칭 감아서

장차 새별에서 태어날 탯줄로 쓸 일이다.

 

 

 

 

달맞이꽃

 

 

달빛 아래 허리춤을 내리고

희멀건 허벅지로 춤 한 번 추고나면

이리들 야단이다 시인은

눈물을 찔끔거리며 가엽단다 뽀얀 얼굴이

어둠에서 익은 달뜬 유혹의 목소리가

너무 앳되어 안쓰럽단다

꿈길에 들어서는 달밤이란 무대에 알몸으로

우유빛 안개를 휘감고 서면

나는 낮에는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별이다

 

 

 

 

돌 쌓기

 

너무 둥근 돌은 쓸모가 없다

잘 생긴 괴석도 버려야 한다

좀 못 생겨도

아랫돌을 잘 받치고

윗돌을 괴일 수 있는 품새라야

쓸모가 있는 돌이다

쌓이고 싸이려면 모양새도 이웃과 맞추어야 한다

그래야 함께 높이높이 탑을 이루고

시간을 멈추게 하는 몸짓에 다다를 수 있다.

나 혼자 잘생긴 돌은

어깨를 걸칠 친구가 필요하지 않아

홀로 굴러다닐 뿐, 종내

함께하는 시간의 종을 칠 수 없다.

 

 

 

나문재

 

한때는 맑고 순수한 빗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세월에 긁혀 짬쪼름한 얼굴이 되기 이전에는

 

한때는 몸체도 부드럽고 가벼운

바람의 아이로

깔깔거리며 들판을 뛰어다녔을 것이다

그대 간간한 목소리를 찾아 이 염전 모퉁이에 서기 전에는

 

한때는 백합보다도 더 진한 향기였을 것이다

햇볕에 구워지는 그대 간난艱難한 삶에 가슴이 무너지기 전에는

 

한때는 민들레 깃털보다 포근한 날개였을 것이다

점점 경직되어 가는 그대 몸체를 어쩌지 못해

눈물로 퉁퉁 불은 손 마디마디를 뻗어내기 전에는

 

한때는 솜털구름보다도 더 하얀 피부였을 것이다

소금으로 건조되어 가는 그대를 마주보며

바람도 식히지 못하는 열병으로 볼까지 붉게 달아오르기 전에는

 

바다, 그대를 사랑하기 전에는

 

 

 

 

 

보름달로 커가는 모습을

사람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하루하루 배를 불리며 뿜어내는 빛으로

세상이 점점 밝아져 감을, 그러나

달이 하루하루 기울어 점점 빛을 잃어가는 속내를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그동안 그 안에서

왜 제살을 베어가며 힘겨운 걸음을 걸어야 했는지

그대가 남기고간 편지 한 줄에

솜사탕 같던 사랑이 녹아

점점이 눈물로 기화하고 있는지

 

마침내 깡마른 뼈대로 남아

이를 악다물고 한 줄기 예리한 칼날이 되어

스스로의 멱줄을 자르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야 하는 지를

사람들은 모른다

사라졌던 달이 무슨 생각으로

독한 눈망울에 냉소를 쏟아내고

대쪽 같은 머리를 풀어 헤치며

다시 보름달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지를

 

 

 

시작메모

 

 

기다림을 에너지원으로 삼아

기다림이란 우리 시에서 오래 이어져 온 주제 중 하나이다. 고려가요의 「가시리」가 그렇고 <춘향전>이 또한 그런 정서다. 김소월의 「진달래 꽃」, 그리고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도 기다림의 미학이 꽃피운 작품이다. 이런 작품들에서 기다림을 아름답게 한국적 정서로 형상화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기다림이 희생과 한의 상처로 남는 것이 싫다. 기다림 자체를 에너지원으로 해서 무언가 새로운 생성물을 생산해 내고 싶다.

바람꽃(학명Anemone narcissiflora L.)은 그 유래가 어떻든 바람과 꽃의 이미지를 섞어 놓고 보면 매우 매력적인 이름이다. 허허로우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들로 꽉 채워진 느낌이다. 나는 서양의 아네모네라는 이름보다 우리말 이름 바람꽃이 더 매력적이고 좋아서 이 이름을 가슴에 안고 몇 개월을 지냈다. 나문재는 뻘이 있는 바닷가 가장자리나 염전 근처 염분이 많은 땅에서 자라는 작은 식물이다. 비록 볼품은 없으나 고려가요 청산별곡에 등장하는 식물로 오랫동안 서민들과 친근한 식물이다.

나는 문명에 대한 불안감을 늘 가지고 있다. 특히 과학문명이라는 게 언제 한꺼번에 무너질지 몰라 불안하기 짝이 없다. 가령 일시에 전기가 중단된다면, 석유가 고갈되어 갑자기 공급이 안 된다면, 거기다 기후가 변하여 몇 년 동안 쌀 한 톨 수확하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면 우리는 어떤 지경에 처할까 걱정이다. 빙하기는 그런 불안을 그려보려고 했다.

 

 

 

 

정승열∙1947년 인천 출생. 1979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새가 날개를 퍼덕여도 숲은 공간을 주지 않았다>, <단풍>, <단풍2>. 인천시문화상 수상. 삼산중학교 교장 역임. 현재 인천문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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