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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권(53호-56호)
2015.07.09 16:06

56호/연재산문/이경림/50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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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산문 
이경림

50일


*사람들


  누가 끙끙 앓는 소리에 잠이 깼다. 조금 열린 블라인드와 창틀이 재단해 낸 비스듬하고 길쭉한 햇살이 거실 바닥의 잿빛 카펫을 지나 내가 누운 소파의 끝에 걸쳐 있다. 새우처럼 구부리고 잠들었던 무릎이 따듯하다. 집은 여전히 텅 비었는데 누가 앓는 소리를 낸 것일까? 내가? 

 일주일 째 되는 날이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의 덩이가 어미 뱃속에서 아이가 빠져 나가듯 미끈덩, 어디론가 빠져 나간 것 같다. 일주일...... 그 안에서 나는(?) 아니, 나라고 밖에 마땅히 부를 것이 없는 그는, 무얼 했던 것일까? 
 그래, 토렌스에 사는 친구 경이와 한 차례 전화를 한 것이 생각난다, 몇 달 전, 서른 한 살의 아들을 사고로 잃은 친구. UCLA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구한 첫 직장에서 첫 휴가를 얻어 여행 중이었다는데....... 
-미시간에 사는 고모집에 들려 부근 호수에서 낚시를 하다가 그만.......
그녀는 울먹였다. 
동양인으로는 드문 흑인같은 곱슬머리를 하고 눈이 동그란 여고 때 그녀가 생각난다. 
그녀는 s대에서 무용을 전공하고 어느 고등학교에서 잠깐 교편을 잡기도 했었다. 
-경찰이 동원되어 사흘 만에 찾았어...... 고모 집에서 불과 몇 분 거리에 있는 호순데......     지금도 알 수 없어, 왜 생전 해보지도 않던 낚시를 하겠다고 생각했는지......그 밤중에 
  그 애, 낚시를 던져 놓고 뭘 기다린 걸까.......운동감각도 뛰어난 아이 였는데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아아 모두 꿈같아......
 수화기 속의 그녀는 한 시간이 다 되도록 거의 혼자 중얼거리렸다. 

그리고는.......산책길에서 몇 개의 샛길을 발견한 것, 아래층 세탁실에서 ‘아서’라는 이름의 뚱뚱한 할아버지를 만난 것, 한 밤 중 a와 가까운 마트에 다녀온 것,  텅 빈 마트에서 마치 유령처럼 걸어가는 노인을 본 것, 뭐 대충 그런 것들이 지난 일주일의 내용 속에 포함되어 있다. 
 
아, 산책길에 발견한 몇 개의 길 중 모레라 에비뉴 라는 길도 생각난다. <모레라> 라는 다소 모호한 뉘앙스의 이름을 따라가다 발부리에 걸리듯 만난 어느 집 정원의 잔디. 
용두사미라는 사자성어를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 그 때 그 정원은 느닷없고 우스광스러웠다. 아니 우스꽝스러운 것은 정원이 아니라 길이었다. 거창하게 시작한 연속극이 생각지도 않은곳에서 지지부진 끝나버린 것 같은 그 길. 
 만약 지나온 날들을 지도로 그린다면 십중팔구는 그러리라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래, 여행 전의 설렘은 새로운 길들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길에서 만나는 바람은 매일 반복되던 일상에 취해있던 나른한 세포들을 깨우며 그 시간을 알 수 없는 희열 속으로 데려간다. 그 때 그 바람은 太初이며 終末이며 只今의 유구하고 찰나적인 손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한 마리의 짐승이다.   
 
 오전 열한 시, 이곳에 올 때마다 이용하는 놀스 할리우드 도서관을 찾아 가기로 한 시간. 이년 전에 살던 집에서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a는 말했다. 지도대로라면 그곳으로가는 길은 둘이다. 그 하나는 남쪽으로 두 불록 떨어진 콜펙스 에비뉴 네거리에서 서쪽으로 꺾어 4킬로 쯤 가면 된다. 또 하나는 북쪽으로 여섯 불록을 가면 만나는 터헝하에비뉴에서 북쪽으로 꺾어 3킬로 쯤 가면 된다. 어느 길이든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으리라. 
 오늘 나는 콜팩스 에비뉴를 더듬어 갈 것이다. 6차선 도로의 길 4킬로를 도보로 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곳의 대로는 아얘 인도가 끊어진 곳이 많기 때문이다. 인도가 끊어지는 곳에서 쩔쩔매다 남의 집 마당을 지나가기도 한다. 모든 길은 넓을수록 삭막하다. 
 
 도서관의 분위기는 어디나 비슷하다. 이 도서관에는 늘 노인들이 많았다.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아 놓고 서가를 기웃거린다. 버지니아 울프의 책들이 꽂혀 있는 책장 앞에서 발이 멈춘다. <A Room of One’s Own> 그녀의 산문집을 빼들고 막 돌아서는데 주름이 자글자글한 백인여성이 옆에서 웃으며 묻는다. 
-버지니아 울프를  좋아 하세요?’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상냥하게 웃었다. 

 나의 영어 실력으로 원서는 읽는다기 보다는 탐구한다는 편이 적합할 것 같다. 낯선 단어들과의 씨름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꼭 원서로 읽어 보고 싶다. 늘 그랬지만 그녀의 글을 읽다 보면 그곳이 서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19세기 말의 서울 쯤? 여성에 대한 편견과 잘못된 인습의 굴레 속에서 자아에 눈 뜨게된 슬픈 여인이 거기 있을 뿐이다. 흑백사진 속에는 오똑한 콧날과 도도하리만큼 지적인 여성의 옆모습이 있다. 이 아름다운 여인을 흐르는 강물 속으로 뛰어들게 한 것은 무엇인가. 
 문득 런던의 블룸즈베리라는 마을이 궁금하다. 온갖 사회적 편견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학으로 몸부림치며 그녀가 걷던 거리, 그녀가 숨어들던 골목들이 어떻게 구부러지고 이어졌는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그 곳에서 케인즈나 E. M. 포스터 등 몇몇 지식인들과 교류하기도 하고 울프라는 성을 가진 헌신적인 남편을 만나기도 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당한 성추행의 기억이 그녀를 일생, 우울과 불안 속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녀는 일생 남성에 대한 혐오감과 자신에 대한 수치심으로 떨었으리라.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이 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일 년에 오백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한 그녀의 말은 옳다. 그녀가 말하는 오백파운드는 꼭 돈의 가치로 오백파운드가 아니라 여성이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말 한 것이리라. 어떤 의미에서 여성은 영원히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한 채 죽어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따라 가고 그녀의 불행은 상품화되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불행을 즐기고 있다. 겉으로는 쯧쯧.....혀를 차며. 문득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가 생각난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木馬를 타고 떠난 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木馬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잠시 내가 알던 少女는 정원의 초록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보아야 한다.
                    -중략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오후 4시. 
이곳의 해는 유난히 짧다. 서늘한 저녁 공기가 잠시 느껴지는가 하더니 삽시간에 어두워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로터리 햄버거집 앞에 엔틱샵이 하나 있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춰져 이것저것 기웃거린다. 누군가의 손때가 오래 묻은 것들.
 
 엄청 큰 서양인두, 금으로 도금 된 화병, 은수저, 티스푼, 이오니아식 건축의 기둥에서 본 문양이 있는 접시세트, 장미문양의 커피 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에서 본 18세기 식의 웨딩드레스도 있다. 그리고, 그림들....... 그리 오래 되어 보이지 않는 가방도 있다. 
 정면 벽에 ‘3rd eye’ 라는 제목의 그림 속에서 한 아름다운 여인의 이마 중앙에 있는 커다란 눈이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모든 것들은 각각이 지닌 시간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한 구석에서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를 만난다. 만지면 아스스 부서져 내릴 것 같은 책의 맨 뒷장을 넘겨보니 1900년 판. 그것들을 만지다간 사람들이 어른거린다. 19세기 혹은 20세기 초의 사람들이 인두질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정원의 장미를 꺾어다 화병에 꽃고 있다. 뚱뚱한 허리를 잘록하게 졸라맨 19세기 식 원피스를 입고 흰 에이프런을 두른 흑인 하녀들이 어른거린다. 갖난 아들을 알몸으로 번쩍 들어 올리며 할레를 하는 흑인가장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 바로 도서관이다. 시간의 도서관.
 
 저쪽 구석진 의자에 앉아 누군가 책을 읽고 있다. 낯이 익다. 생각해 보니 아까 도서관에서 만난 그녀다. 역시 버지니아 울프의<moment of being>을 읽고 있다. 
-하이
그녀가 환히 웃으며 아는 채를 한다.
-버지니아 울프를 좋아하세요?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네 아주 많이
그녀가 사람 좋은 웃음을 웃는다 
-도서관이 바로 곁에 있어서 가끔 빌려다 읽어요
그녀가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린다. 
나는 아까부터 관심이 있던 6달러짜리 택이 붙은 검은 가방 하나를 골라 계산대로 가져간다.
-이건 내가 쓰던 거예요
그녀가 수줍은 듯 말한다. 
-크기가 딱 좋아요. 잘 쓸게요.

 5시가 채 못 되었는데 거리에는 벌써 어둠이 깔리고 있다. 맞은 편 건물 꼭데기 대형 광고판 속에서 마리린 먼로가 윙크를 시작한다. 어둑한 이국의 거리를 혼자 걷자니 알 수 없는 공포가 밀려온다. 해가 지면 거짓말처럼 인적이 사라지고 질주하는 차들의 헤드라이트만 휘황한 곳. 직진의 길이 죽창처럼 뻗어 있다. 
 
 한참을 걸은 것 같은데 이정표를 보니 아직 3킬로는 더 걸어야 집에 닿을 수 있다. 기계처럼 움직이는 두 다리를 따라 걷다보니 잡다한 생각들이 사라진다. 흰자위가 유난히 번쩍이는 흑인 하나가 다가오고 스쳐간다. 마치 어둠이 눈을 달고 걸어오는 것 같다. 가까이 보니 엄청나게 큰 체구에 분홍 립스틱을 바른 것 같은 두툼한 입술의 남자다. 조금 전 읽은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속에서 만난 glance란 단어가 떠오른다. glance.......방금 지나간 그 흑인의 눈빛 같은 ? 엔틱 가게에 걸려 있던 3rd eye의 안광 같은?  아뭏튼.   

 집에 도착하니 하늘은 진보라 빛으로 변해 있었다. 집들의 아우트라인은 더 검고 선명해지고 멀리 산등성이에 훌쭉하게 키만 큰 측백나무들이 검은 장승처럼 솟아올랐다. 정수리에 노랗게 초승달을 걸고. 
 눈 깜빡할 사이 마을이 어둠에 휩싸였다. 집집의 창들이 호박 빛 불빛을 켜들고 있다. 낮과는 다른 설명할 수 없는 기류가 마을을 싸고 있다. 컹컹, 골목을 울리며 개가 짖는다, 옆집에서 아이들 깔깔대는 소리가 들린다. 어느 집인지, 카레 섞인 동양 음식 냄새가 번져 나온다. 팜츄리 사이로 흘러나오는 a의 방 불빛을 본다.  a는 예상외로 일찍 퇴근해 있다. 

 -낯선 길을 왜 어두울 때 다녀요?
걱정했다는 듯 그녀가 말한다.
-저녁은 뭘 해먹을까? 맛있는 거 해먹자 우리
어린아이처럼 종알거리며 그녀는 주방 냉장고 문을 연다. 
- 참, 아까 경이 아줌마한테서 전화 왔어 
  내일 시간되면 토팡가 주립공원에 가자던데?
-내일? 생각해 보고. 
내가 시큰둥 하자 a가 거든다.
-토팡가 좋아. 그냥 등산하는 셈치고 갔다 와요. 
 a는 어제부터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며 자정이 되어야 돌아올 수 있다 한다. 
-근데 오늘은 어떻게 이렇게 일찍 왔어?
-어 밥먹고 일 해야지, 엄마 냄새 맡으면서.
웃는다. 그 애가 웃는데 왜 나는 아프다.  

 데니도 티모시도 밤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모두 각자의 스케줄에 칭칭 감겨 있다. 내일 토팡가에 가려면 밤에 세탁을 해 두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탁실에 내려가니 아래층 아서 할아버지가 세탁물을 꺼내고 있다가 아는 척을 한다.
-하이 
-하이
-당신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저펜? 차이나? 
-코리아 
-아하, 코리아? 싸이?
하면서 장난스레 말춤 추는 흉내를 낸다. 
-비지네스? 여행? 
-여행, 50일간.
나는 짧게 대답한다.
-이 마을은 동양 사람이 많지 않아요. 나는 한국을 좋아하죠. 젊었을 때 난 할리우드에서     영화관계 일을 했죠. 지금은 혼자 살아요.

묻지도 않았는데 그가 주절주절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래, 모두 얘기 상대가 필요한 거다. 나는 말없이 세탁기에 가루비누를 넣고 타이머를 돌린다. 웅웅 세탁기가 돌아간다. 
외로움이 돌아간다. 아서 할아버지처럼, 아니 지구처럼.
-또 봐요
그가 세탁물이 든 통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울린다. 
퉁, 퉁, 퉁......나무계단이 운다.

빨래를 널고 a의 방문을 여니 a가 아이페드로 한국드라마를 보다가 잠들어 있다
매일 이 깜깜한 방에서 아이페드 불빛을 마주한 채 잠들었을 a의 고독이 
그녀의 코언저리를 희미하게 밝히고 있다.  

 오전 열시 쯤 경이 왔다.  그녀는 지난 해 만날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늙어 있다. 파도가 핥고 지나간 뻘처럼 쭈글쭈글해 진 얼굴로 그녀는 겨우 웃고 있는 듯 보인다. 그 사고 소식을 들은 후 사실 나는 그녀와 대면하는 일에 자신이 없었다.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혹 뜻하지 않은 말이 불쑥 튀어나와 그녀의 상처를 건드리지나 않을지,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보다 담담하다.   

-아무것도 가져갈 거 없어. 거긴 4시 반까지 하산해야 하니까 서둘러야 해
-내가 센드위치 몇 개 만들었어. 그거면 되겠지?
-오케이
 
1번 도로의 소문난 트레픽에 대한 그녀의 툴툴거림 빼고는 토팡가에 도착 할 때까지 우리는 말이 없었다.
차 안의 공기는 조심스럽고 무거웠다. 산타모니카 산맥을 따라 오르는 등산로인 토팡가 주립공원은 집에서 20분 거리에 있었다.  

-도심에 이렇게 근사한  등산로가 있다니 축복이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서울도 좋은 산이 많잖아. 북한산, 도봉산, 인왕산, 남한산성..... 사실 서울만큼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도 흔하지 않지. 너무 복잡해져서 문제지만. 너희 아이들은 별 문제 없지?
-그렇지 뭐 
‘넌 어때?’ 하는 말이 입술까지 나오다가 멈춘다. 
-산이 가파르지 않아서 좋네. 하긴 중턱 이상을 차로 올라 왔으니.
-이 길을 따라 4킬로 쯤 가면 이글락이라는 바위가 있어 오늘은 거기까지만 가자.
-좋아

등산로는 생각보다 험하지 않았다. 산등성이를 따라 차가 들어가도 좋을 만한 넓은 길이 펼쳐져 있다. 12월인데 민소매 티셔츠만 걸친 여성이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기도 한다. 가족 혹은 연인의 모습을 하고 사람들이 다가오고 스쳐간다. 반대편에도 또 다른 쪽 산의 옆구리에도 길은 있다 한다. 그러나 그 때 그 시간 길은 완강하게 외길이었다. 30분 쯤 오르니 시야가 툭 트이고 멀리 산타모니카만의 그림 같은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등 뒤에는 벨리 지역의 동화 속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다. 
-참 아름답지? 저런 것들에 빠져서 내가 여기서 35년이나 살았던 것 같아.
경이 먼저 입을 뗐다.
-이제 생각하니 다 구름 같은 건데 말야. 저 속에 내 집 하나 갖겠다고 참 별별 고생을 다 했다. 나도 한국에서는 그래도 명문대 출신인데 말야.
-그러엄, 넌 아름답고 스펙도 좋고 부잣집 딸이고....... 시쳇말로 엄친 딸이었지. 근데 대학    졸업하고 너 몇 년이나 학교에 있었지? 
-고작 2년이다. 왜 그랬는지, 뭣에 홀린 것처럼 결혼하고 미국으로 와 버렸어. 뭐 구체적인 계획이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야. 미국 바람이 든 남편을 따라 무작정 온 거지. 지금 네 딸이 사는 그곳에서 한 정거장 더 가면 있는.....맞아 너희 이사 오기 전에 살던 그 마을, 거기 그림 공장이 많아. 처음 도착해서 나 거기도 몇 년 다녔다?   
-그래? 지나다 보면 picther's factory라고 씌어 있는 벙커형의 큰 건물들이 많더라. 거긴 뭘하는 곳이니?
-말 그대로 그림공장이야. 상업용 그림을 그리는 곳. 거기서 공장의 여공처럼 종일 휘발유    냄새를 맡으며 페인팅을 하고 나면 어질어질하고 구토가 났어. 
-고생이 많았구나. 그래도 한국에서는 최고의 대학을 나온 사람인데.....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지 뭐 같은 학교 출신이니까 그런데 여긴 말을 못하면 그런 게 다 필요없어. 귀가 트이는데 딱 3년 걸리더라. 근데 말야, 내가 슬픈 건 그 애가 그 무렵에 생  긴 아이라는 거야. 뱃속에 있을 때부터 너무 고생을 시켰어. 그게 미안해. 그 아이가 가고 생각해 보니 그 앤 내가 키운 게 아니었어. 멕시칸 베이비시터가 키운 거고 좀 커서는 저 혼자 자란 거야. 잊어버려지지도 않아 그 아이 유아원에 다닐 때 열이 39도가 넘는다고 전화가 왔는데 직장에서 몸을 뺄 수가 없었어. 저녁에 가 보니 아이는 겨우 숨만 할딱이고 있는 거야,....... 그 아이 가고 처음에는 매일 그 애 무덤에 갔어. 거기서 종일 그 애와 이야기하다 돌아오곤 했지.   
-무슨 얘기? 
-그냥........살아있을 때 따뜻하게 손잡고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들.....미안하다........미안하다    고...... 그렇게 몇 개월을 보내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니 귀신같은 할미가 하나가 서 있는     거야, 나를 닮았는데 나는 아니야. 저게 날 끌고 다니던 귀신이구나. 머리끝이 쭈뼛 서더    라. 주저앉아 또 한참을 울고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궜어. 목욕재개 한 거지. 
-왜? 따라가려고?
  내가 비아냥거리듯 말하자 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 살려고. 살고 싶었어. 이유는 몰라. 뭔가 속에서 욕설 같은 힘이 솟아오르더라.
  그게 뭔지 모르겠어. 내 운명에 대한 반항인가? 그 날, 그 애 죽고 나서 처음으로 밥을     먹었어. 고추장에 새빨갛게 비빈 밥을 꾸역꾸역 먹었어. 육개월 동안 요구르트와 죽만 먹    던 위장에 엿 먹어라 하고 퍼 넣은 거야. 물론 그날 밤 밤새 토했지.  
-씻김굿을 한 거구나
그는 그저 하염없이 웃었다.       

 독수리가 막 날개를 펼치고 있는 듯한 바위, 이글락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올라 있었다.
 우리는 반대편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멀리 산타모니카의 안개 낀 해변을 보았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푸른색을 가진 하늘이 수평선에 가만히 배를 대고 있었다. 12월의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갔다. 

-소 큐트
 한 중년의 여인이 내가 쓴 호랑이 무늬 모자를 보고 한쪽 눈을 찡끗한다. 
-뎅큐             
내가 웃었다.
우리는 역광 속에 유난히 빛나는 토팡가의 석양 속에서 엄청나게 긴 자신들의 그림자를 밟으며 산을 내려 왔다  
그날 밤, 나는 다섯 살 가량의 남자 어린애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서 있는 꿈을 꿨다 그는 조금 씩 지워지는 몸을 가지고 있었는데 남은 부분들이 잠깐씩 보이다 말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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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제14권(53호-56호) 56호/신작시/권순/코드아담 외 1편 편집부3 2015.07.09 2564
196 제14권(53호-56호) 56호/신작시/김태일/하루 외 1편 편집부3 2015.07.09 2328
195 제14권(53호-56호) 56호/신작시/이현/어떤 주검 앞에서∙1 외 1편 편집부3 2015.07.09 2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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