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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권(53호-56호)
2015.07.08 16:04

55호/책 크리틱/허희/이행하는 사랑(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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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크리틱
허희

이행하는 사랑(이별)
―박완호의 너무 많은 당신과 안현미의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이별하고 사랑한다.’ 아무래도 이 문장은 어순이 뒤바뀐 것처럼 느껴진다. ‘사랑하고 이별한다.’ 이렇게 고쳐야만 할 것 같다. 시간의 선후 관계 때문이다. 먼저 사랑이 시작되어야 이별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전자는 틀리고 후자는 옳은가? 단언하건대 그렇지 않다. 사랑의 끝은 이별이 아니다. 진지한 사랑에 빠져보았던 사람은 경험적으로 그 사실을 안다. 더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중문을 결합해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사랑하고 이별하며 사랑한다.’ 처음도 나중도 사랑, 그 사이에 위치한 이별마저도 사랑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두 권의 시집을 나란히 놓고 읽으며 든 생각이다. 1991년에 등단한 박완호는 다섯 번째 시집을, 그로부터 10년 뒤인 2001년에 등단한 안현미는 세 번째 시집을 묶었다. 각각 너무 많은 당신과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라는 제목이 붙은 시집은 공교롭게도 같은 날(2014년 5월 23일)에 발행되었다. 두 시집이 출간된 시기가 같다는 것에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으나, 두 시집에서 ‘사랑(이별)’을 다룬 시편이 유독 눈에 띈다는 것은 호들갑을 떨 필요가 있겠다. 물론 사랑에 관한 시들이야 어느 시집에서나 대부분 찾을 수 있기 마련이다. 설령 사랑이라는 시어가 쓰이지 않았더라도, 전혀 사랑에 관한 시가 아닌 것처럼 보여도, 어떤 것은 사랑에 관한 시일 수 있다. 
  그렇지만 박완호와 안현미는 아예 사랑을 표제로 삼는다. “너무 많은 당신”도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도 모두 사랑에 관한 시의 한 구절이다. 명시적으로 이들은 사랑에 천착하는 시를 쓰고 있음을 천명한다. 슬쩍 사랑을 곁눈질하지 않고 곧장 사랑을 파헤친다는 뜻이다. 탐색이 아니라 탐구하는 시가 가진 힘은 고루한 사랑(이별)의 관성을 어떻게 깨뜨리는가. 한 시집에 실린 두어 편의 시―다만 일부가 아닌 전문을 볼 것―만으로 충분할 듯하다. 


  박완호의 너무 많은 당신

  ‘괴로운’‧‘아픈’ 등 부정적인 언사는 이별을 꾸미는 흔한 수식어다. 이별을 노래하는 많은 유행가의 상투적인 수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것은 대체로 납득할 수 있지만 완전히 수긍할 수는 없는 형용사다. 위에서 쓴 대로 이별도 사랑이라면 이별이 마냥 괴롭거나 아프기만 할 리 없다. 즐거운 이별, 흥이 나는 이별도 있는 법이다. 박완호는 가려져 있던 이별의 다른 속성을 쓴다.

신나는, 이별의 순간이 왔다 먼 데서 달려온 바람이 갑자기 똬리를 틀며 주저앉는, 작별인사가 끝나기 전 등 돌린 사람이 다른 길로 순식간에 발길을 꺾는 자리

웃자란 나뭇가지들 너의 창을 에워싸면
즐거워라,
안쪽 엿보려는 잎사귀들만 무성해

사랑할 때는 세상에 한 사람뿐이더니, 바람도 햇살도 한쪽으로만 향하더니, 이젠 당신이 너무 많아, 지하철이나 우체국 앞 육교 계단에서 툭하면 마주치는 당신, 당신들

드디어, 너무 많은 당신을 겪는 시간이 왔다

—「신나는 이별」 전문

  이별을 하는데 신이 난단다. 제목을 보고서는 의아했으나 시를 읽고서는 납득이 된다. 당신(들)이 여기저기 편재하는 것은 그만큼 몹시 그리워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보고 싶은 당신(들)이 모든 곳에 존재하기에 ‘나’는 역설적으로 헤어짐의 순간을 긍정할 수 있다. 「신나는 이별」은 사랑과 이별을 나누어 사유하지 않는다. 사랑과 이별은 분할 불가능한 한 몸이다. 사랑해서 행복하고, 이별해서 우울하다는 자동화된 감정이야말로 피상적인 연애를 했다는 방증이다. 어쩌면 감정을 내밀하게 궁굴리지 못하고 즉물적으로 표출하는 지나치게 얇은 삶을 살아온 탓인지도 모른다. 
  연애는 그까짓 사랑 타령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를 맺는 주요한 삶의 방식을 적실하게 드러내는 기제다. 이 시는 “사랑할 때는 세상에 한 사람뿐”이라는 사랑의 응집과 “너무 많은 당신을 겪는 시간”인 이별의 발산이 교차하면서 연애를 포괄하여 삶 자체를 역동적으로 이끌어간다. 그러니까 신나는 이별은 신나는 사랑일 뿐만 아니라, 신나는 삶으로 확장된다. 이처럼 이 시를 통해서 이별에서 사랑을 보았으니, 이번에는 다른 시를 통해서 사랑에서 이별을 보려고 한다. 
  
사랑한다고 썼다, 너를 사랑한다는 건

너의 부재를 긍정하는 일, 물 위를 나는 잠자리의 날갯짓에 얹힌 눈길에 잠깐 머뭇거리는 수면의 
굴곡을 감지하는 일, 누구도 읽어내지 못한 너의 잠언을 해독하는 일, 네가 밟아온 발자국들을 남김없이 헤아리는 일, 찡그린 이마에 파묻힌 번민의 무게를 재는 일, 눈금을 읽던 저울까지를 버리는 일,

바짝 말라 있던 꼭지에 물기가 감돌게 하는, 숨어 있던 꽃봉오리를 허공으로 쑥쑥 밀어 올리는, 창백하던 하늘을 한순간 홍조로 물들이는, 캄캄한 숲의 육체에 깃들어 있던 새의 문장을 끄집어내는, 더 이상 사랑한다는 말이 필요 없게 만드는

그런 일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전문

  너를 사랑한다고 썼는데 막상 거기에 너라는 실체는 없다. 온전한 너는 부재한 채로, 눈길‧잠언‧발자국‧이마 등의 흔적을 더듬으며 화자인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런데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추억을 떠올리며 너를 복기하는 것은 사랑이라기보다 오히려 이별에 어울리는 행위가 아닐까. 사랑과 이별의 이분법적인 고정관념에 기초한 의심은 뿌리 깊다. 하지만 어떤 사랑은 네가 없는 곳에서 발생하기도 한다. 롤랑 바르트가 사랑의 단상에서 한 말마따나 너를 소유하지 못하는 한에서 ‘나’는 사랑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사랑을 하면 너로 인해 나는 외롭지 않고 충만해진다.’ 이 명제는 사랑에 대한 절반의 표면적 진실이다. ‘사랑을 하면 너로 인해 나는 고독하고 위태로워진다.’ 이 명제가 사랑에 대한 나머지 절반의 이면적 진실이다. 그러므로 “천지사방이 거처인, / 세상 어디에도 없는, / 그런 당신을 향한다. // 고비 아닌 순간이 없다.”라는 ‘시인의 말’은 사랑의 표면과 이면을 아우르는 총제적인 진실의 고백이다. 언제라도 이별에서 사랑으로, 사랑에서 이별로 갈 수 있고, 가야만 한다. 도착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행 본연을 위해서다. 움직이지 않는 사랑(이별)은 부패하고 만다는 것을 너무 많은 당신을 읽고 확인한다. 


  안현미의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앞에서 박완호의 이별론으로 너무 많은 당신을 시작했으므로, 거기에 대응하여 안현미의 이별론부터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를 접근해보려고 한다. 「이별수리센터 P에게」라는 시를 골랐다.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라는 시집 제목은 이 작품의 시구에서 뽑은 것이다. 이별수리센터는 과연 어떤 곳인가? 

누나…… 나…… 내일부터 꽃을 준 여자랑 연애할 거예요 밑바닥에서 사랑까지 생을 바꾸어야만 다다를 수 있는 사랑 묵묵부답인 사랑 마네킹 같은 사랑…… 위상공간 같은 지옥과 싸이버 같은 천국을 하루에도 수십차례 왔다 갔다 하는 사랑 꽃이, 꽃이, P지 않는 사랑…… 울거나 술을 마시거나 울면서 술을 마시거나 하여간 취생몽사 몽생취사의 흐리멍덩한 사랑…… 변증법적인 단계를 거쳐 서른이 되고 싶다는 말…… 공산당선언만큼 낡아버린 그 말 누나…… 나…… 내일부터 꽃을 준 여자랑 여행할 거예요 다른 차원으로 사랑할 거예요 색연필로 그려준 누나의 사랑과…… 꽃도 시들면 쉰내가 난다던 말은 분리수거해서 사용할게요…… 그러니 누나…… 봄이나 기다리며 생을 낭비하자던 약속 같은 건 종량제 쓰레기봉투에나 버려줘요…… 우리 모두 미래의 누군가에겐 위로가 될지도 모르는 존재들이란 누나의 말은 이별과 함께 수리해서 쓸게요 누나…… 누…… 나……

P.s.
끝내기 위해서는 시작해야만 한다. 끝날 줄 알면서도 시작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이별수리센터 P에게」 전문

  이별수리센터는 마치 자동차를 수리하듯이 감정을 수리할 수 있는 곳인 것 같다. 주된 분야는 사랑을 수렴하는 이별이다. 그렇다고 일부러 이곳을 찾아 들를 수는 없다. 어떤 특정한 장소에 위치해 있지 않은 까닭이다. 감정을 수리하는 곳은 한 사람의 마음이다. ‘P에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것으로 짐작해보면, 아마도 P의 마음일 테다. 지금 그는 이별한 것처럼 보인다. 이 시에 쓰인 15개의 말줄임표가 예증하듯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면서도 P는 자신의 각오를 누나에게 전한다. 수신인이 누나인 이유는 “색연필로 그려준 누나의 사랑” 때문이리라. 
  자세한 상황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이 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가정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별 후에도 누나를 잊지 못하던 P가 어느 날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울먹이고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누나의 질투심을 유발하도록 일부러 “내일부터 꽃을 준 여자랑 연애(여행)할 거예요”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라고. 실상 이것은 대화가 아니라 P의 독백에 불과하다. 누나라고 애타게 부르지만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답변이 없다. 누나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전화가 끊어진 뒤에야 추신의 형태―P.s.로 덧붙인다. “끝내기 위해서는(끝날 줄 알면서도) 시작해야만 한다.”라고. 
  전체적으로는 누나를 향한 발신인 이 시는 바로 이러한 연유로 누나가 그에게 보내는 전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별수리센터」에 ‘P에게’라는 부제가 붙은 사정을 나는 그렇게 추정한다. 이와 다르게 “P지 않는 사랑”이라는 부분에 기초하여 P를 ‘피어나다’라는 동사로 볼 수도 있고, 화자가 누나를 P로 지칭하는 것으로 간주해서 P.s도 그가 한 말이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정도로 해석의 지평이 넓은 작품이지만, 어느 쪽을 택한다 해도 감정을 수리할 수 있다는 이 시의 함의는 왜곡되지 않는다.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는 사랑(이별)일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여야만(受理)’ ‘고칠 수(修理)’ 있다는 것이다. 이별수리센터에서는 삐걱대는 사랑(이별)의 접수가 우선이다. 그러면 사랑을 언급하는 다른 시를 참조해볼까. 

연암은 열하를 일러 ‘사나이가 울 만한 곳’이라 했다는데
당신은 바다를 일러 ‘사랑이 울 만한 곳’이라 한다

지금은 세계가 확장되는 시간

난 한번도 세계를 제대로 읽어본 적 없다
그건 늘 당신으로부터 사랑이 왔기 때문
그밖의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아주 나중에 말할 수 있다

지금은 사랑이 확장되는 시간

물고기가 키스하는
이 명랑, 이 발랄!

우리는 본능적으로 어떤 시간을 활용할지 아는 연인처럼
혹은 맨 처음 바다로 나아간 최초의 사람처럼

우리는 진짜 인생을 원해

저 바람 좀 봐 애인을 도대체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저 파랑, 저 망망!

그리고 공연히 무작정의 눈물이 왔다

―「사랑」 전문     

  「사랑」이라는 시를 인용했다. 당신이 “‘사랑이 울 만한 곳’”이라고 한 바다에 왔는데, 화자인 ‘나’에게 사랑을 준 당신을 바다 바람은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결국 “무작정의 눈물”로 끝나고 만다. 그것은 “세계가 확장되는 시간”과 “사랑이 확장되는 시간”을 거친 후에 온다. 이별에서 사랑으로, 사랑에서 이별로 이어지는 무한한 순환. 사랑(이별)은 돌고 도는 이행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를 읽고 재확인한다.


*허희 : 2012년 <세계의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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