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권(65호-68호)

제4회 전국계간지 우수작품상 다층|임재정·수상작

by 백탄 posted Feb 18, 2019 Views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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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누바누 이민 안내 외 1편



처진 어깨로 골목을 돌면 바누비누에 닿는다지
내내 뒤쫓던 전신주가 뒤처지고
무엇을 신어도 맨발인 채로 가 닿는다지


울타리가 없고 바누비누는 
하지 말란 것도 없고 바누비누는  
새털을 매달고 지저귀는 버드나무 밑을 지나
마침내 물에 비친 얼굴이 전체인 곳


그러므로 바누비누에 가자고   
주문처럼 어깨 처지는 오후가 오지, 누구누구의
집이 아니어서 바누비누엔 개도 없고
정강이에 박힌 이빨자국 몇 개는 물결에 녹아 사라진다지
모잠비크로 가도 과테말라로 가도 어쩔 수 없지만 

바누비누엘 가다 갈림길을 만나면 
수염을 다 뽑고 처진 어깨 쪽으로 
강을 만나면 쇠붙이를 버리고 첫 물결에 발목을 내주고 되돌아갈 일
따위는 아예 잊은 채


바누비누에 가자    
각진 모서리를 지나친 뒤에나 알아채서
겨우 되돌아보는 곳
아이들인 그 나라 국민이 아기로 늙어가는
바누비누, 물방울 하나만큼의 나라 





저탄고에 속한 어둠 중에서 ‘나’ 부분



아흔아홉 칸의 밤, 첫 칸엔 뒤꿈치를 든 촛불 서른두 번째 칸엔 농을 견디느라 자지러지는 발가락 아흔세 번째 칸은 쓰러진 나를 밟고 일어서는 나 아흔아홉째 칸은 모든 칸을 수렴한 채 나를 토닥이는 창고가

나는 모든 꿈의 대리자
창고를 가리키지 않는 손가락은 해고야 빛에 복종하는 그림자는 지워버릴 테야 어둠 속에 가라앉으면 비로소 날개를 펴는 귀, 무릎 당기고 얼굴을 묻으면 푸드득, 날아오르는 차가운 생각의 불꽃들 소리가 가장 큰 몸뚱이로 부푸는 밤은 어떻게 기중기를 움직이는지
 
어떤 입구도 다 사라진 촘촘한 밤 외피를 들추고 거인의 늑골 깊은 곳을 더듬네 어긋난 문짝이 삐걱- 몇 번 몸 피하다 손을 허락하고 촛농은 간곡히 얼굴을 흘러내리지 아침이면 밤새 몸을 빠져나간 짐승의 검은 머리카락들 저탄고에 숨어든 나는 이미 재가 된 어제에서 태아로 발견될 거야



임재정 2009년 〈진주신문가을문예〉 대상 수상. 서울문화재단 ‘문학창작기금’ 수혜, 다층문학동인.




신작

마리에서 로렌까지*



침대에 누워 천 길 낭떠러지에서 깼다


온통 금간 얼굴을 더듬다 손을 베었다 내가 가려운 폐부에 손톱을 박고 무엇을 긁는지 알지 못할 때도 목 졸라 숨을 확인할 때도 화들짝 아침은 쏟아지고


거기에서도 깃대에 매달린 게 보이나요, 내가? 손 좀 흔들어주세요
   
누군가 발견할 때까지 나는 드라이플라워다 지하라구요? 거긴 늘 여기라면서요


한순간 천 길 절벽이 사방으로 솟는다 벽에 당신을 새긴다 젖은 얼굴을, 이름을, 긁힌 폐벽에서 흐르는 피, 깊은 미간을 버티다 쿵! 발등을 찍으며 떨어져 내리는 얼굴들


올려다볼 게 당신뿐이니까, 바닥이에요 여기는


꼬리를 무는 나를 끄덕이고 나면   
분쇄기를 지나온 느낌
더 무너지기 전에 함께 할래?
하긴 거기가 여기랬지


생의 이면에는 천 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뜬다지, 뫼비우스의 띠는 거기인 여기를 뜻 한다 다시 태어날 땐 사물의 몸을 빌 것, 뭐가 좋을까?
윤활유를 쳐야 하는 것이라면 뭐든!


삐걱 대면서 여기를 떠난다, 안녕


   *Marie-Antoinette-Josèphen-Jeanne D'Autriche-Lorraine. 마리 앙투아네트의 full name. 한 존재 안의 수많은 거주자들.




선정평

완성도나 작품성에 있어 뛰어난 수작



작품상 후보로는 다층문학동인 전체의 지난 1년간 발표 작품 전체를 대상으로 하였다. 그 중에 예심을 거쳐 논의한 작품들은 다양하다. 하지만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한 동인과 그들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1차 심사를 하고 우수작품 선정에 들어갔다.
그 결과 임재정 시인의 「바누비누 이민 안내」(《시와문화》 2016 가을호)와 「저탄고에 속한 어둠 중에서 ‘나’ 부분」(《문예중앙》 2016 가을호)을 우수작품으로 선정하는 데 최종 합의를 하였다.
이미 다른 문예지에 발표한 작품이며, 다른 회원들 작품과의 비교라는 측면에서 가혹한 잣대를 들이댈 수밖에 없었다. 대상이 된 모든 동인들의 작품이 각각 특장(特長)을 지니고 있지만, 작품성, 소통 가능성, 내적 구성의 긴밀성 등을 염두에 두었다. 무엇보다도 전체적으로 작품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도 큰 고려 사항이었다.
수상작으로 선정한 「바누비누 이민 안내」와 「저탄고에 속한 어둠 중에서 ‘나’ 부분」은 시적 완성도나 작품성에 있어서 수작이었다. 이 시들에서는 대상을 새롭고 깊이 있게 보며 내용을 의미화하는 면에서 뛰어날 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시선을 오래도록 붙들고 읽게 하는 흡입력이 있으며, 시의 긴장감이 전체의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는 의견이었다. 뿐만 아니라, 임재정 시인은 모든 작품에서 자신만의 독보적 서정의 발견과 그에 따른 단속적 어법의 유연한 전개 등이 돋보이며, 모든 작품이 고른 질과 함량들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선정의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김나영, 김효선, 박수빈, 변종태



수상소감

내 시는 폐사지의 마음으로 이어갈 것



공구를 들고 늘 벽과 마주하고 일을 하는 직업을 가졌다. 등뒤가 흩날리는 먼지로 가득하지만 나는 전면의 벽과 마주하며 뚫고 달고 조일 뿐이다. 그리고 간혹 뚫고 달고 조여선 안 되는 관념일체마저 두 손에 들고 있음을 무심코 발견하기도 한다.
거기, 벽 앞에서 나는 매 순간 지워진 채 상처투성이의 두 손만 남는다. 그럴 때의 손은 어느 소속도 아닌 나비에 가깝다. 공기의 이런저런 안팎을 가늠하지 않는 것으로 팔랑대는 나비. 그러나 나는 벽으로 환원되는 몰아의 지점이 더 좋다. 수염투성이 달마는 그것을 면벽수도라 불렀지만, 내겐 그런 치열하고도 거창한 것이 아닌, 나를 확인하고 위로 할 뿐이다.
소감이라고 하자니 부끄럽고, 고백이라고 하자니 창피하다. 어쨌거니 늘 끼니는 닥쳐오고 나는 꾸역꾸역 무언가를 먹는다. 그런 버둥거리는 과정으로서의 구린내에 매듭을 주신다니 더욱 구려지자 다짐한다. 손가락질을 해주신 분들께 감사해야 할 터인데, 낯이 얇아 혼잣말로나 우물거리게 된다.
그러니 더욱 낮은 자세로 시와 나와 세계에게 면벽! 이런 다짐으로나 갚을밖에. 깨어 부은 두 손을 맞주무르는 아침마다 늘. /임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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