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권(65호-68호)

제4회 전국계간지 우수작품상 미네르바|김경성·수상작

by 백탄 posted Feb 18, 2019 Views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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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전국계간지 우수작품상  미네르바|김경성·수상작

소리의 미늘 외 1편



빛을 잘라내는 오르간파이프선인장 아래 태양의 눈썹이 쌓여 있다
태양의 즙을 많이 마셔버린 탓에 기댈 수 있는 등을 내어줄 수가 없다
너무 높이 올라간 것은 아닐까 닿을 수 없는 시간이 부표처럼 떠다닌다
 
온몸으로 허공을 밀면서 높은음자리로 흘러가는 용설란은
잎 가장자리에 가시를 키운다

 간절함이 달에 닿아
 높이 솟아오른 꽃줄기에서 원추화로 피어나면
 꽃 그림자 뒤로 찾아드는 비의
 잎을 구부려서 내려놓아도 다시 꽃대를 올리지 못한다

 가시가 박혀 있는 먼 기억이 일렁인다
 오르간파이프선인장을 있는 힘껏 껴안는다
 온몸을 찌르는 가시가 일으키는 소리의 미늘에
 아득한 것들이 걸린다





화장암華藏庵*



뱃가죽이 붉은 뱀 한 마리가 길바닥에 뒤집혀 있다, 한 번도 누워본 적 없다는 듯
기다란 몸이 물결처럼 길을 건너가는 사이
뱀의 등뼈가 부서지도록 누군가 밟고 지나갔다
길바닥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자국이 아니어도 순간이 빚어낸 참혹한 스침이다
 
몸을 구부려야 들어갈 수 있는
물푸레나무도 제 몸을 둥그렇게 구부려서 돌담에 기대고 있는 화장암華藏庵,
죽은 뱀을 뛰어넘어서 찾아갔으나
스님은 없고 
풍경소리만이 절마당을 돌아나와 낯선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오월의 작약은 제 향기를 이겨내지 못한 채 이끼 꽃 핀 담장에 꽃잎을 털어내고 있다
세월의 무게만큼 빛이 바랜 빗살문의 그림자가
먹물을 엎지른 듯 번진다
 
말 없음으로 텅 빈 하늘과 텅 빈 암자를 가득히 채워가는,
달 속에 있는 듯
점점 부풀어 오르는 달 안을 거니는 듯
고요의 담장을 두르고 높은 곳에 떠 있는
적막하고 쓸쓸한 암자
 
*경상북도 문경시 운달산 중턱에 자리한 김룡사의 산내 암자.





김경성 2011년 《미네르바》를 통해 등단. 시집 『 와온』, 『 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붉다』.



신작

하마비



성벽을 무너트릴 듯 몸 불리는 양버즘나무는 먼 나라에서 왔다
새들은 경계를 생각하지 않고 나무에 집을 올렸다


암문暗門으로 보이는 풍경이 너무 아득해서 
어떤 한 생각을 이끌고 들어갔으나 끝내 되돌아 나오지 못했다
근총안近銃眼의 씀바귀꽃, 원총안遠銃眼의 꽃향유 거리를 가늠하는 향기라고 여장女墻의 길이는 같았지만 성벽 너머로 보이는 것은 다 제각각이고 


낙산 산성 성곽 아래 사는 사람들이 밤 깊도록 별자리를 읽으며
골목길에 쌓여있는 발자국 소리를 하나하나 짚어갈 때
등불을 든 사람이 지나갔다


성 안에서 깃을 세우고 사는 사람들, 성 바깥에서
날개를 펴고 사는 사람들
꿈꾸는 일은 성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문 닫힌 성문 앞에 하마비는 어디로 갔을까





선정평

오랫동안 다듬어온 김경성 시인의 시는 표면은 외롭고 쓸쓸하다. 그러나 시인의 언어를 통해 깊이를 더해가며 ‘적당히’와 타협하지 않고 편편마다 사유와 표현의 심미적 결실을 동시에 보여준다. 우수 작품상으로 뽑힌 「화장암華藏庵」, 「소리의 미늘」 두 작품이 여실히 이를 증명하고 있다.
“길바닥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순간이 빚어낸 참혹한 스침” 현장의 비애를 흔들림 없이 균형 있게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시인의 화법은 다정하고 한없이 따듯하다. “점점 부풀어 오르는 달 안을 거니는 듯”, 이는 자신만의 고유한 시의 뜰에 독자를 끌어들이는 문체가 아닌가. 아니 끌려간다는 표현이 맞겠다. 이처럼 김경성 시인의 문체는 현란함이 없고 꾸밈도 없지만 단단하며 향기를 가지고 있다. 더하여 그녀를 ‘신비롭고 충만한 언어의 소유자’ 라고 평자는 말하고 있다.
“빛을 잘라내는 오르간파이프선인장 아래 태양의 눈썹이 쌓여 있다”
비상한 詩眼과 깊이의 형식, 그리고 내면의 필연적 파동으로 시의 흐름이 견고하다./이채민




수상소감

비 오는 숲에 들어 새집을 올려다봅니다. 그 많던 새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머나먼 나라에서 날아와 겨울을 지내다가는 새들은 철새가 아니고, “여행 다니는 새”로 부르자고, 어느 영화에서 본 그 말이 생각났습니다. 늘 새소리가 가득 차 있던 숲에서 장맛비에 새들의 소리가 사라졌으니까요.
  바위틈, 혹은 어느 나무 아래에서 날개를 접고 앉아있을 새들을 생각하며, 저도 날개 접은 새처럼 마음을 접고 우산도 없이 비 쏟아지는 숲길을 걸었습니다. 누군가 우는 줄 알았는데 뒤돌아보니 늙은 오동나무가 우는 것이었습니다. 푹 꺼진 뱃속에서 한 움큼씩 내어주는 소리가 제 속에 파고들어 깊은 떨림이 일었습니다.
일상적으로 흘러가는 날이지만, 그날만큼은 멀리 있는 말들을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너무 깊어서 닿지 못한 말들 속에 제 마음을 넣어두고 싶습니다. 그 속에서 오래가는 말을 마음으로 짜 놓은 명주 수건에 싸놓고 싶었습니다.
입추가 지나니 저녁 하늘에 붉은 노을이 소리 없이 번지며 호흡을 가다듬고 있습니다.
시의 길을 걸어가는 일이 오늘은 어제보다 더 깊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깊어지고 싶습니다./김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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