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권(65호-68호)

제4회 전국계간지 우수작품상 시와정신|현택훈·수상작

by 백탄 posted Feb 18, 2019 Views 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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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전국계간지 우수작품상  시와정신|현택훈·수상작

두꺼비, 토끼, 계수나무, 항아* 외 1편



나뭇가지가 저녁바람에 흔들리면
별빛도 함께 흔들려요
사각사각 바람이 색칠한
여기 연못 있던 자리
연못이 하늘로 떠올랐나
돌멩이에 묻어있는 검은 물감
칡넝쿨이 하얗게 성글어 벋어나가고
여우가 말한 솔가지가 생각나
또 물감을 적시지요
구긴 신문지 뭉치 가득한 저녁
얼룩덜룩 하루가 저물어 가네요


네가 내 가슴을 문질러 주겠니


저녁바람이 그린 달이 막걸리 빛깔이네요
군데군데 풀벌레소리가 덧칠한 풀숲
별은 누가 그린 하얀 편지들인가요
장화와 홍련이 나타날 것 같은 어스름
이야기들이 모여 두런두런 깊어가는
저녁의 물감상자
맨발로 자전거 페달 밟는
항아 
다악다악 하늘로 물들어 가네요 


   *강요배의 그림 제목.





유선노트



구름부터 담으려고 했지만 이미 너무 많이 걸어와 버렸다


안개를 빼고 쓴다면 부드러운 돌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겠지
그러면 독서실 푸른 창문까지 선을 이을 수 있을까
말하자면 노래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아득하고 지난한 일


밤 바닷가에서 알몸으로 물에 들어갔던 날들의 달빛은
수많은 선으로 그어져 있어서 노트엔
납작하고 메마른 겨울이 잠들어 있다
그런 거라면 서랍 속에서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에게 물을까


라디오를 빼고 말하면 복잡한 회로도 실마리가 풀릴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해답이 눈에 보여서 오히려 어려운 문제
책상이라면 용서해 주리라 기대했지만 돌아서면
낭떠러지인 세상에서 사람들은
마지막 페이지를 미리 넘겨보곤 하니까


소풍을 가지 못한 다람쥐들이
모여 사는 나라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가방에 넣거나 들고 다니기에 적당한 꿈으로 기록되었다


사람들은 새 노트를 펼쳤다가 이미
누군가의 기록이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괜스레 옆에 있던 사람의 안부가 궁금한 척 편지를 쓴다
그러면 속눈썹이라는 가시가 축축한 채 돋아있는 노트가
눈을 뜬다



현택훈 2007년 《시와정신》으로 등단. 시집 『지구 레코드』, 『남방큰돌고래』. 지용신인문학상. 4.3평화문학상 수상.




신작

일일호프



지난밤 꿈이 일일호프 같아
하루 빌려 노래하고 춤 춘 그곳


정체 모를 사람도 정겨워서
하루가 가는 게 분명해서 좋은 밤


오늘의 교훈
다신 일일호프를 계획하지 말자


완벽하게 비참해지기로 했던 각오를
되풀이하지 않는 건
중쇄를 찍는 것처럼 어려워


바닷가 트램펄린에서
돌고래를 보기 위해 몸을 튕기는
소년의 날


그런 날은 일일호프 같아
하루 빌려 노래하고 춤 춘 그때




선정평

2017년도 제4회 전국계간지작품상에는 능력 있는 여러 시인이 지원을 했다. 심사할 작품이 많다는 것은 이를 선별하여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일이 어렵다는 뜻이다. 읽고 또 읽으면서 여러 시인 가운데서 두 시인의 작품으로 좁혔다. 두 시인은 그들마다 각각의 장점이 있었다. 한 시인의 경우는 이미지를 구성하는 능력이 우수했고, 다른 시인은 구체적인 일상들에 대해 담백하게 풀어내는 시적 진정성이 돋보였다. 막판까지 고심하다 이번 계간지작품상으로는 현택훈의 시 두 편, 곧 「두꺼비, 토끼, 계수나무, 향아」와 「유선노트」를 선정하기로 합의했다.
현택훈의 시들은 몽환적 분위기와 이를 이미지화하는 수법이 요즘 시인들에게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의 소재와 주제들은 어떤 신비주의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현실과 교묘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이런 시적 기법이야말로 이 시인이 보여준 시적 우수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특성이 이번 응모작 가운데서 현택훈의 작품을 수상작으로 선정한 이유이다. /김완하



수상소감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할 때 시를 쓰는 한 교수가 말했다. 시가 밥 먹여 줄 수 있다고. 나는 그 말에 수긍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요즘 내 모습을 보면 시가 밥 먹여 주고 있다. 시를 쓴다는 이유로 초등학교 방과 후 독서논술 수업을 하고, 시집 전문 서점도 열 수 있었다. 시를 쓰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대전에 머무를 때 《시와정신》으로 등단을 했다. 그때는 연애사업이 잘 되고 있어서 대전에서 정착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별을 했고, 대전과도 기약 없는 작별을 했다. 이제 남은 건 대전을 연고로 한 문예지뿐이다. 그러니 그 《시와정신》은 내게 옛 애인 같은 곳이다.
최근에 사주를 봤더니 내게 귀문살, 문창살, 역마살, 도화살이 있다. 귀신이 들어와 있고, 글을 쓸 운명이고, 떠돌이 생을 살아야 하고, 사랑 때문에 일을 그르치게 된다는 것. 지금까지 내가 썼던 시들을 돌아보니 이 네 가지의 신살로 쓴 시들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명리학 관련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니 부재 중 전화가 있었다. 옛 애인에게 전화를 거는 기분이었다. 《시와정신》으로 처음 나왔을 때의 감흥이 다시 일어나는 듯하다.
올해 사주엔 대운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상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앞으로 시를 발표할 때는 더 좋은 시를 내야한다는 의무감이 강해졌다.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노래한 것이 시라면 나는 좀 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강윤후 시인, 김완하 시인, 시와정신문학회, 라음, 김신숙 시인, 김세홍 시인, 장이지 시인들께 감사를 전한다. 오늘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 부르다./현택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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