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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장석원, 김종옥, 김후영, 현택훈, 박시하

 

장석원

자목련 외 1편

 

 

뿌리가 밀어 올린

유혼幽魂

 

피 묻은

발톱의 악력

 

탁탁啄啄

부리가 벌어진다

 

이 생의 끝이 오기 전에 나는 뚝뚝 피를 흘리리

파먹는 바람 앞에서 나는 꺼지는 붉은 구멍이 되리

 

 

 

 

우리는 피티의 형제 우리의 누이는 로자

 

 

어스레한 골목길을 올라간다

빨가벗은 육체들의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는다

우리의 입술에 묻은 피를 지우는 것 그날 뒷목에 어룽진 쇳소리를 먹어치우는 것

안개였다 우리는 안개 앞에서 껍질 벗겨진 레몬처럼 쓸쓸하다

우리의 슬슬한 세계 콧수염에 묻은 술 냄새와 매질에 단련된 대학생들의 세계 파열된 슬개골의 세계 전자레인지 옆에서 삼분 동안 기다려야 할 의무와 잃어버린 전투화의 혓바닥에 새긴 이름 석 자의 필체를 떠올리려는 열망 사이에서 철학의 울타리 안에서 사랑은 풀을 뜯는 염소가 아니라 세포벽 안에 숨어 있는 펄사 (씨근펄떡씨근펄떡) 우리의 뒤에는 밀어붙이는 기계의 생리, 생활이라는 무서운 기계, 기다림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뭉개버리는 기계, 기계적인 신념, 기적적인 신앙적 이성 밑에서

사랑하는 역사는 아직 기록된 적이 없다

 

장석원∙2002년 <대한매일>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아나키스트, 태양의 연대기, 역진화의 시작. 현재 광운대학교 교수.

 

 

 

 

김종옥

염화강 외 1편

 

 

돈대놀이*를 지나 갈대밭을 지나 염화에 닿는 저녁을 보았다

축축한 어둠을 껴안고 온몸을 뒤척이는 강물에 그가 있었다

꽹과리 소리 꺼지고 사람들이 흩어지는 곳에 그가 있었다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드는 사이에 그가 있었다

그런데 내 발등을 기어오르는 저녁이 이렇게 살가워도 되는 것이냐?

늘 지나 다니는 골목에서 만났던 것처럼

책꽂이에 꽂혀 있는 질문처럼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처럼

 

그러나 그는 지금 하루살이들이 달려드는 가로등 밑에서

내일을 기다리듯

―순환버스 3분 후 돈대 도착―을 기다리듯

오늘 나를 떠미는 바람에 풀려나가는 어제를 기다리듯

그렇게 오지 않는―순환 버스 저녁 도착―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달려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을 바라본다

순간 내 눈을 멀게 하는 저 환한 빛 속으로 아무도 모르게 내 저녁이 온다면

돈대에 실린 수많은 영혼들처럼

마침내 어둠은 도착할 것인가

나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돈대놀이:강화 오두 돈대를 중심으로 진지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던 행사.

 

 

 

 

민간인통제구역

 

 

뙤약볕이 미친 듯 퍼붓고 있었어

몸빼 입고 신분증 맡기고 들어간 임진강 건너 민간인통제구역

점심주고 일당 오 만원이라는 것보다

민통선 들어간다는 말에 꽂혀 노파들을 따라 나섰어

한참을 걸어도 군인 한 명 보이지 않고

트랙터가 순하게 밭을 갈아 업고 있었어

평생 삼만 쫓아다니다 늙었다는 팔순 십장은

축축한 흙을 쥐어보고, 비벼 보고, 냄새도 맡아 보고

‘‘수 십 년 묵었어도 삼 냄새 배여 있다’

자기 땅처럼 흥분하고 있었어

진봉산*에서 동창리* 장단*까지 다 개성삼밭이라며

그 삼밭 몽땅 빼앗기고 삼씨 한 되 껴안고

몰래 강을 건널 때가 스무 살 무렵이었다는데

강화에서 삼 기르다 보면 곧 돌아갈 줄 알았다는데

커피 기운이 떨어지면 손발이 떨린다는 그, 또 커피를 타며

장단 지나 동창리 지나 진봉산

개 짖는 소리라도 들으려는 것인지 먼 곳만 바라보고 있었어

나도 서툰 솜씨로 종삼을 묻으며 귀 기울여도

둑 너머에서는 아무 소리 들리지 않고

온종일 까마귀만 넘나들고 있었어

비오는 날 빼고, 일요일 빼고, 한 달에 백만 원 벌이는 될 듯하여

십장 눈치를 살피는데

주름진 그의 얼굴에 흐르는 것이 땀인지, 눈물인지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어

 

*진봉산, 동창리:황해도. 장단:파주 장단면.

 

김종옥∙2005년 ≪애지≫로 등단. 시집 잠에 대한 보고서.

 

 

 

 

김후영

늪 외 1편

 

 

가을이 예쁘다

우리의 가을도 예뻐 볼까?

 

헌 책방에서 사온 소설 속지에 오래 갇혀 있던 말

 

가을이 가기 전

그들의 계절은 늪 속에 빠졌지

간절히 원해도 얻을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시작과 함께 예감한 그

그녀를 여신으로 섬겼던

그에게 여자는 상징 아니면 종교

그는 거룩했고 여자는 숨이 막혔지

모래시계의 틈새로 여자의 마음이 빠져나가고

늪에 빠져 허덕이는 그의 뒤로

급기야 겨울은 오고 말았네

 

그 해 그들의 가을은 정말 예뻤을까

 

 

 

 

그렇게 여름은 가고

 

 

손톱 끝에서 매니큐어가 벗겨지듯 하루가 게으르게 벗겨지고 있다 단순해서 명료한 일상이 안개 속으로 흩어진다 이도저도 아닌 어수선한 날 더운 소음들이 에코처럼 내 안에서 맴돌고 딱히 아픈 것도 아닌데 몸이 늘어져 손가락하나 까딱 할 수 없다 예감은 왜 상황보다 먼저 오는 걸까 서서히 오는 것들은 두렵다 잡을 수 없다면 놓아야지 모자이크처럼 조각난 일그러진 시간 속에서 터키석 같은 푸른 기억들이 밀폐되어 부패해 간다 눈물도 안 나는데 절로 숨소리가 흐느껴지고 속울음이 수위를 넘었다 때로는 독설이 살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한쪽 말만 들으면 한쪽만 커 보이는 것이지 그럴 수도 있겠다 심장이 투둑 투두둑 툭 툭 불규칙한 리듬으로 뛰고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이 눈물 속에 결박되어 있다

 

김후영∙2006년 ≪미네르바≫로 등단.

 

 

 

 

현택훈

신촌 가는 옛길 외 1편

 

 

도비상귀도 지나간 길. 연지, 분, 머릿기름, 비녀, 빗, 거울, 바느질함이 험치 따라간 길. 원당사 돌탑은 이끼가 푸르고, 송이 밟는 소리 먼 옛날로 설화처럼 흐르는, 고려 때 목호가 거미줄 같은 눈물을 치며 걸었을 길. 패망한 나라로 갈 수도 없고, 올레 끝집 복숭아 닮은 양씨와 조천포구 부근에 집 짓고 살려고 해신디. 아즈방은 두린아이 손 잡고, 아즈망은 동골락동골락헌 곤애기를 등에 업고. 셋아방집 가는 길. 식게 밥 먹으러 가는 길. 무밭을 지나고, 환삼덩굴 우거진 풀숲을 지나고, 난리 때 죽은 말젯아방 얘기허당, 뭍에 가서 소식 뜸한 족은아들 걱정허당 보민. 와흘 너머에서 들려오는 여호 울음. 바지춤엔 도깨비바늘이 달라붙어있고. 삼양에서 신촌 가는 길. 동카름 쪽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밤바람. 옛날이야기처럼 구불구불한, 신촌 가는 옛길.

 

 

 

 

전지훈련

 

 

우리가 지난 겨울에

다녀온 전지훈련지는

작은 항구도시였다.

겨울에도 따뜻한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푸른 남쪽이었다.

전지훈련이야 해마다 겨울이면 가는 것이지만

그 도시는 처음이었다.

갈매기가 시청 앞까지 날아오고

맑은 날엔 돌고래의 유영을 볼 수 있는

낯설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곳의 사람들은 걸음이 느렸다.

횡단보도를 아주 천천히 건너는데

차들은 경적을 울리지 않았다.

차들도 느릿느릿 솔바람처럼 다녔다. 

우리는 오전엔 몸을 살살 푸는 것이 전부였다.

결과가 중요하지 않았기에

느슨하게 연습경기를 했다.

평화롭고 부드러운 경기였다.

다음 시즌에 대한 포부나 준비가

점점 옅어졌다.

우리는 마법에 걸린 듯 느리게 움직였다.

시간도 달팽이처럼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봄이 되자 라인업이 짜였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그 도시를 빠져나왔다.

이제 다시 시즌이 시작될 테고

환희와 절망의 미로를 헤맬 것이고

치명적인 부상을 입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난 겨울에 다녀온

전지훈련지는 작은 항구도시였다.

경기력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아

다시는 전지훈련지로 택하지 않겠지만

경기 도중에도 문득문득 그곳을 그리워할 것 같다.

벤치에 앉아 경기장 위를 나는 갈매기를 그려볼 것이다.

락커룸에서 유니폼을 벗다가 푸른 바다가 떠오를 것이다.

우리가 지난 겨울에 다녀온 전지훈련지는 작은 항구도시였다.

 

현택훈∙제주 출생. 2007년 ≪시와정신≫으로 등단. 시집 지구 레코드.

 

 

 

 

박시하

수직의 잠 외 1편

 

 

지난밤 헤맨 길에

짙은 냄새와 흐린 울음이 있었지

기억해?

한 줄의 푸르고 비틀거리는

물컹한 꿈을

최초로 수평선을 그리던

파란 색연필의 욕망을

나를 갖고 싶어서

우린 울었어

부풀고 늙은 바램

터뜨리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눈물 마른 바닷가

이제는 지울 수 없는 자취들을 따라서

파란 알몸인 채로 걸었어

아무것도 그립지 않아서

나는 미역처럼 웃고

너는 녹이 슨 길을 짚고

먼 바다를 바라봤어

기억해?

죽지 않아서

거꾸로 잠이 들었지

 

 

 

 

슬픈 무기

 

 

그것은 몹시 슬픈 모양을 하고 있다.

당신은 그걸 무기로 이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건 내 가난한 이름에도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어떤 종류의 무기이기는 하다.

머리에 꽂거나 발에 신는 물건은 아니라는 말이다.

 

누군가 그걸 목격한다면

아마도 눈물을 흘릴지 모른다.

 

어제 가게에 다녀간 남자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런 걸로 삶과 싸워야 하다니……

너무 슬픈 일입니다.”

 

가끔은 지기 위해 싸우는 싸움도 있다.

 

그것에 가격을 매길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진열대에서 빛난다.

팔 수 없는 상품,

싸울 수 없는 무기.

차마 말로는 할 수 없는 그 모습은

사람이 행복할 때 짓는 웃음과

그 웃음이 누군가의 뇌리에 각인되는 순간처럼

반짝 빛이 난다.

 

당신은 오늘도 오지 않겠지만.

 

슬픈 모양의 내 무기를 그곳에 두고

나는 가게를 지킨다.

손님들이 찾아오면 나는 그들의 무기를 하나씩

잘 포장해서 내 준다.

 

모든 싸움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다.

 

박시하∙2008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눈사람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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